세속당국의 교육을 통한 한인 러시아화의 노력
기획 연재 < CIS 고려인 이주사 속 최초의 고려인 모범정착촌: ‘블라고슬로벤노예’ 마을>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앞선 회에서는 블라고슬로벤노예 마을이 정교회의 선교 거점이자 한인 기독교화의 중요한 무대였음을 살펴보았다. 마지막 4부에서는 세속 당국이 교육을 통해 한인 사회의 러시아화를 어떻게 추진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타난 성과와 한계는 무엇이었는지를 중심으로 정리해 본다.
마을 한인들에 대한 정교회 세례와 더불어 러시아 세속당국은 교육을 통한 한인들의 러시아화 정책에도 힘을 기울였다. 이는 기존의 정교신앙을 통한 선교활동이 이민족의 기독교화와 러시아화라는 국가의 입장에서 볼 때 만족할 만한 결과를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인식의 변화 때문이었다. 러시아 세속당국은 이민족의 체계적인 교육을 통한 러시아화에 더 역점을 둔 선교정책을 수립 및 추진해 나가기 시작했다. 특히 1880-1905년 시기 신성종무원장을 역임했던 포베도노스체프(К.П.Победоносцев)에 의해 정교회 선교는 일종의 국가 정책으로 전 지역의 이민족들 사이에서 강력히 추진되어 나갔다.
19세기 후반의 정교신앙 및 체계적 교육에 기반을 둔 이민족 선교정책의 영향은 프리아무르 한인사회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났다. 1870년대 들어서 아무르주의 블라고슬로벤노예 마을에서도 정교회 세례에 이어 독자적인 학교교육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한인교육은 1872년 5월에 블라고베쉔스크 정교선교협회 위원회의 지원으로 마을에 최초의 한인학교가 세워지며 시작되었다. 사실 한인자녀들의 교육은 이보다 조금 앞서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1871-72년 겨울에 11명의 한인 소년들이 미하일-세묘노프스코예 카자크 학교에 입학해서 러시아어를 공부했으며, 3명의 한인 학생은 블라고베쉔스크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1872년 7월 8일 이르쿠츠크 베니아민 대주교가 블라고슬로벤노예 마을의 교회와 학교를 방문했다. 이 무렵 11세에서 17세까지의 50여명의 학생들이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러시아 세속당국은 학교교육을 통해서 한인들의 러시아화를 유도해 나가고자 했다. 당시 언론에서는 “개교시작부터 희망자들이 많았으며, 학생 중에는 러시아어 알파벳을 배우려는 어른들도 있었다. 젊은 카자크군인이 교사로 임명되어 새로운 방법으로 과목을 가르쳤다”고 적고 있다. 학생들은 러시아어 문장을 작성하거나 ‘우리아버지’, ‘성모’와 같은 기도암송 공부를 배웠다. 1872년 말 무렵에 곰쟈코프 사제는 “학생들은 매우 괄목할 만한 수준에 올라있었으며, 읽고쓰기와 큰자리수까지 셈이 가능했으며, 기도를 할 줄 알았다”고 보고서에서 기록하고 있다. 한인 어린이들에 대한 초기의 교육활동에서 거둔 성공에 감동받은 베니아민 대주교는 한인학교를 위해 적극적으로 기부금을 모으고, 칠판과 주판, 잉크 등을 보내기도 했다. 한인들이 재이주되어 올 당시인 1871년에 한인 이주자의 수가 400여명이었던 점을 감안했을 때, 바로 이듬해에 50여명의 학생이 학교에 출석했다는 사실은 한인들의 교육에 대한 열정이 그 어느 지역보다도 강하게 표출되고 있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물론 이는 블라고슬로벤노예 마을의 경제적 부요함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블라고슬로벤노예 마을은 당시 프리아무르 전체 한인마을 중에서도 상위 수준에 드는 비옥한 토지와 농업생산성을 갖추고 있는 마을이었다.
1880-90년대 한인민족학교의 등장으로 연해주 지역의 정교회 측의 선교학교 운영이 한때 위축을 받고 있었던 것을 감안해 볼 때, 블라고슬로벤노예 마을에서 한인교육의 성장은 고무적인 현상이라 평가해 볼 수 있다. 당시 한인민족학교의 활동은 정교회의 한인교육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이 학교의 등장은 연해주 내에서는 초반에는 정교회의 한인교육에 장해요인이 되기도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정교회로 하여금 한인교육을 더 분발시키는 자극제가 되기도 했다. 가령 1884-85학년도에 남우스리스크 남부의 얀치헤 선교학교에는 12명 정도가, 1880-85년도에 코르사코프카 선교학교에는 25-36명의 학생들이 있었다. 이에 반해 마르티니안 주교에 따르면 한인민족학교에는 총 1,000여명에 가까운 한인소년들이 있었다. 반면 아무르주의 블라고슬로벤노예 마을에서 한인교육은 연해주보다는 보다 안정적으로 진행되어 갔다. 1880년에 캄차트카 선교부의 지원으로 마을에는 1,200루블을 들여 완전한 형태의 학교건물이 건립되었다. 이어서 1880년 초에는 이르쿠츠크 교사양성학교를 마친 한인이 학교의 정규교사로 채용되기도 했다.
20세기에 들어서도 아무르주 블라고슬로벤노예 마을에서의 한인교육은 여러 측면에서 변화를 맞이하며 꾸준한 성장을 이어갔다. 1909년에 마을에는 이미 100명의 남학생들이 러시아인 정교사와 한인 보조교사 밑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이 남학교는 총 4,500루블을 들여 건축되었고, 이중 500루블은 블라고베쉔스크 주교구 위원회에서 지원되었다. 또한 같은 해에 비록 신구세대 간의 갈등은 있었지만 여학교도 건립되었다. 이 학교는 50명 규모로 1,890루블을 들여 교육부의 지원으로 건립되었으며, 그해 30명의 여학생이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교사 숙소와 학교 난방은 한인들의 지원으로 유지가 되었다. 두 학교 모두 젊은 세대 학생들 사이에서 배움의 열정이 두드러지게 표출되고 있었다. 특히 러시아 정부가 여성교육을 중요시 한 까닭은 조선여성은 전통적으로 가사를 책임지며 자녀들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미래의 정교도-어머니의 교육과 2세의 러시아어 교육과 빠른 언어동화를 통해 러시아화시키기 위함이었다.
물론 교육을 통해 한인들을 통합하고자 하는 교회 측의 노력이 항상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20세기에 들어서도 일부 한인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학교를 무시하는 경향이 남아있었었기 때문이다. 학교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는 주로 구세대 한인들에게서 두드러졌고, 이들은 특히 여성들의 학교교육에 거부감을 나타냈다. 예로 1909년 블라고슬로벤노예에서 여학교 설립을 둘러싸고 신세대와 구세대간의 갈등이 불거져 나오기도 했다. 구세대는 교육으로 인해 한인들의 의식 속에 자리잡고 있는 전통적인 특수성이 사라지게 됨을 우려했던 것이다. 이외에도 앞서 언급한대로 지속된 한인민족학교의 영향을 들 수가 있다. 일부 한인들은 러시아어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으며, 자녀들을 한인민족학교로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선교학교의 러시아식 교육을 통해 러시아 사회에 진출한 한인 2세대의 등장은 세대 간에 전통적인 문화적․종교적 관계의 단절을 가져오기도 했다.
비록 세속당국과 정교회 측의 노력이 때로는 어려움에 부딪히기도 했지만, 한인교육은 가시적으로 꾸준한 성장을 거듭해 나갔다. 한인교육의 성장 원동력은 한인의 교육에 대한 열망이 세속당국 및 정교회 선교부의 적절한 활동과 교구교육을 받은 젊은 한인세대의 협조가 어우러진 데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이러한 상황은 정교회 한인교육 활동의 바람직한 모습이며 성과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1899년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에 블라디보스톡 주교구(Владивостокская епархия) 설립으로 정교회의 한인교육은 더 많은 관심과 지원을 받으며 성장해 올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해 설립된 동방대학 조선문학 교수인 포드스타빈(Г.В.Подставин, 1877-1924)의 한인학교를 상대로 한 발전방안 연구는 프리상대로 지방당국이 한인의 러시아화를 위한 교육활동을 지속해 나가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무엇보다 주목할 점은 1905년의 비테에 의해 기초된 10월선언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통한 한인교육 활동이 정교신앙을 통한 기독교화 활동과는 달리 크게 위축되지 않고 이어져 왔다는 점이다. 이는 19세기 후반 이전까지 정교신앙을 통한 기독교화 선교활동이 반드시 러시아화로 이어지지는 않았다는 국가 차원의 인식 속에서 세속당국이 교회의 신앙활동과 관계없이 학교교육을 통해서 이민족의 러시아화를 이룰 수 있다고 여겼던 것과 맥이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프리아무르 세속당국이 한인교육의 결실을 지속해 가기에 주어진 시간은 너무나 짧았다. 1914년 1차세계대전과 1917년 10월사회주의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러시아 정교회의 한인에 대한 선교 및 교육활동은 중단되었고, 새로운 이데올로기와 체제교육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나가는 말
2022년에 블라고슬로벤노예 마을은 건립 150주년을 맞이했다. 2002년에 필자가 마을을 방문했을 당시 마을 주민들은 유태인자치주의 수도인 비로비드좐 국영 TV, 국립문서보관소와 공동으로 마을 건립 130주년 기념 다큐멘터리 필름을 제작하고, 성대히 기념식을 치렀다. 마을주민들 스스로도 마을의 역사 자체를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블라고슬로벤노예 마을 중앙에는 마을 이름이 새겨진 높다란 쇠탑이 당시 번성했던 마을의 영광을 말해주는 듯 위풍당당 솟아 있다. 130여 년이 지났건만 방문 당시 한인들의 흔적은 마을의 여기저기서 찾아볼 수가 있다. 중심거리에는 형체가 보존된 한 채의 한인구옥과 마을 모퉁이에는 공동으로 사용했던 연자맷돌이 남아있고, 쌀독으로 사용했었을 것 같은 큼지막한 항아리가 푸른 눈의 주인으로 바뀐 채 아직도 사용되고 있었다.
이병조
(알파라비 카자흐국립대 한국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