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에서는 블라고슬로벤노예 마을이 러시아 정부의 계획적인 재이주 정책 아래 형성된 ‘최초의 고려인 모범 정착촌’이라는 점을 확인했다. 이어지는 이번 부에서는 이 마을에서 정교신앙이 어떻게 확산되었는지 그리고 한인들의 개종과 종교 생활이 어떤 양상으로 전개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들여다본다.
정교신앙의 확산과 한인의 기독교화
아무르주의 블라고슬로벤노예 마을은 당시 한인들의 주류가 연해주를 중심으로 거주하고 있었지만 연해주 못지않게 주목의 대상이 되어갔다. 이는 이주와 더불어 곧바로 마을구성원 전체를 상대로 정교회의 세례와 개종이 이루어 졌고, 독특한 지리적 환경으로 인해서 외부와의 교류가 많은 부분 제한된 채, 이른바 시범적인 한인마을이자 정교회의 요람으로서 독자적인 발전을 이루어 나간 곳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1860년도 중엽 연해주 남부의 포시에트 지구에서 이미 한인들을 상대로 정교회 선교가 진행되던 상황 속에서 한인들이 재이주 된 것이니 만큼 아무르주 한인들의 정교회 수용은 지리적 특성을 고려하더라도, 연해주 한인들의 정교회 수용과정의 연속선상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정교회의 아무르주 한인선교 또한 1871년 9월에 동시베리아 군사령관지사의 지원금으로 성인 알렉산드로 네프스키를 기리는 최초의 교회가 블라고슬로벤노예 마을에 세워지며 시작되었다. 당시 블라고슬로벤노예 마을 한인들의 세례를 주도해 나간 사제는 마을 서쪽에 위치하고 있던 예카테리노-니콜스코예 카자크 마을의 요안 곰쟈코프(И.Гомзяков) 사제였다. 곰쟈코프 사제는 마을에 이미 약 40명의 세례한인들이 이미 있었기 때문에 비세례 한인들의 기독교화에 큰 관심을 두고 있었다. 첫 세례로 교회 착공식날 부모들의 희망으로 3명의 소년들이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곰쟈코프 사제는 성인 한인들의 신앙적인 진실성을 잘 알지 못해 세례를 주저했고, 이 때문에 성인세례는 조금 늦게 이루어졌다. 1872년에 최초의 성인세례가 후에 알렉산드르 Ⅲ세(1881-94)가 될 후계자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의 생일날인 2월 26일날 행해졌다. 15-25세 미만의 11명의 세례희망자가 예카테리노-니콜스코예 카자크 마을에서 곰쟈코프 사제에게 세례를 받았다. 곰쟈코프 사제는 대육식금지기간(Великий пост)에는 교구민들에게 성만찬식을 베풀었으며, 둘째 주에는 블라고슬로벤노예 마을에서 약 50명의 한인정교도들에게 성만찬식을 베풀고 추가로 세례를 주었다. 나아가 5월에는 29명에게, 6월 정기순회 동안에는 49명의 한인에게 세례를 주었다.
당시 교회는 “신앙에 대한 한인들의 진실성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한인들은 과거의 신앙 속에 남아있는 것은 러시아인 기독교도들 사이에서 자신들의 새로운 상황을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전하며 재이주 초기 마을의 한인들이 정교회의 세례와 개종에 대해서 긍정적인 반응을 나타냈다고 평가했다.
한편 1872년 7월 8일 이르쿠츠크 베니아민(В.Благонравов, 1868-73) 대주교의 블라고슬로벤노예 마을 방문 또한 한인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 자바이칼주 선교부 책임자를 지낸 베니아민 대주교는 1868년 인노켄티 베니아미노프(И.Вениаминов, 1840-68)의 후임으로 캄차트카 주교가 되었다가, 이후 1873년 이르쿠츠크 주교로 전임된 인물이다. 한 목격자는 베니아민 대주교와 한인들과의 만남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베니아민이 탄 배가 포구에 닿자 모든 한인들이 부두에 나왔다. 먼저 기독교도들이, 이후에 비기독교도들이 축복을 받기 위해 주교에게 다가왔다....많은 한인들이 러시아식 복장을 하고 있었으며, 더러는 마포로 된 흰색의 조선 민속의상을 입은 자들이 있었고, 이들은 베니아민 대주교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 이러한 모습은 당시 블라고슬로벤노예 마을 한인들은 이미 상당수가 정교회를 받아들였으며, 이들의 기독교화가 상당히 진행되고 있었음을 짐작해 보게 한다.
지역 교회의 최고 대표자인 베니아민 대주교의 방문 이후에 한인들의 정교회에 대한 관심은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 해 7월에는 47명이 더 세례를 받았으며, 1872년 후반에는 거의 모든 성인 한인들이 세례를 받았다. 이후 곰쟈코프 사제는 블라고슬로벤노예 마을을 방문하여 비기독교도 부모가 희망하는 유아들에게만 세례를 주었다. 1872년도 캄차트카 주교구 선교부 보고서에 따르면, 곰쟈코프 사제는 1년 동안 아무르주에서 총 148명(남자-93명, 여자-55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1873년부터는 블라디미르 벨랴예프(В.Веляев) 사제가 곰쟈코프 사제를 대신했으며, 9월부터는 예카테리노-니콜스코예 카자크 마을의 파벨 세르기예프스키(П.Сергиевский) 사제가 블라고슬로벤노예 마을 한인들을 영적으로 양육해 갔다. 이 두 사제의 노력은 결실을 맺어 이후 95명의 한인들이 추가로 세례를 받았으며, 1871-72년 시기에 대부분의 마을한인들이 세례를 받았다. 정착 원년인 1872년 블라고슬로벤노예 마을의 전체 한인인구 431명(남자-246명, 여자-185명) 중에 세례자가 148명으로 세례율은 34%에 이르렀다.
블라고슬로벤노예 마을 한인들의 세례는 계속해서 크게 증가해 나갔다. 1879년 동시베리아 군관구 산하 특별위임관리인 비슬레네프(В.Висленев)에 의해 실시된 블라고슬로벤노예 마을의 인구조사 결과, 129채의 건물과 농가들(Фанза)에 마을인구는 624명으로 정착 원년에 비해 약 50% 가까이 증가했다. 이중에서 세례자는 618명으로 세례율이 99%까지 크게 증가했다. 이러한 압도적인 세례율은 한인들에게 주어졌던 법적, 경제적 혜택과 정교회 세례 간의 관련성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1908년에는 새로운 교회의 건축이 이루어 졌다. 이 무렵 러시아인 사제 1명과 한인 시낭송자(Псаломщик)가 마을의 사역을 담당하고 있었다. 20세기 들어서 마을 한인들의 대부분은 이미 정교도인이 되어 있었다. 블라고슬로벤노예 마을의 높은 세례율은 비록 내적인 개종까지는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지만 대부분의 시기 동안 유지되어 나갔다.
한편 1910년 일제에 의한 한일합방은 프리아무르 지방 전체 한인사회의 종교활동에 적지 않은 변화의 계기를 가져다 주었다. 무엇보다 한인들 사이에서는 나라잃은 슬픔을 정교에 입교함으로써 달래고자 하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또한 1880-90년대 교회교구학교 출신의 젊은 한인사제들의 등장과 활동으로 한인들의 세례 및 입교상황은 사뭇 달라지기 시작했다. 연해주뿐만 아니라 아무르주에서의 정교회 선교 상황도 예외는 아니었다. 교회교구학교 출신의 한인 전도사나 사제의 활동으로 세례받은 정교도 한인들이 늘어났으며, 아무르주의 수도인 블라고베쉔스크에서는 수십명이 세례를 받았다. 한인 선교사 중에서는 한인 전도를 도맡아 했던 김봉초의 역할이 컸다. 그의 한국어로 전하는 정교교리는 많은 이들이 정교에 입문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비슷한 시기에 연해주 지역에서 조선에서 입국한 최관흘 선교사(목사) 일행에 의해 거둔 성공적인 장로교파 선교의 사례와 비슷한 맥락이라 할 수 있다.
다음 호에 계속
이병조
(알파라비 카자흐국립대 한국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