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호에 이어 < CIS 고려인 이주사 속 최초의 고려인 모범정착촌∙∙∙> 기획 연재를 이어간다. 앞서 살펴본 블라고슬로벤노예 마을의 형성과 역사적 배경을 이어, 이번 호에서는 블라고슬로벤노예 마을의 건립배경과 러시아 정부, 즉 동시베리아 지방정부가 재이주 정책의 일환으로 어느 정도로 마을의 발전에 관심을 기울였었는지 살펴보자.
한인들의 이주와 정착까지의 과정은 러시아 정부의 치밀하고도 계획적인 의도 속에서 이루어졌다. 연해주 남부의 한인 재이주 계획에 착수한 아무르주지사 페다쉔코(И.К.Педашенко)는 한인 80가구를 기준으로 주택에 건축에 필요한 목재와 연장, 건축재료, 한인들이 자립할 때까지 지급할 15개월 분량의 식량, 농사에 필요한 가축 등에 대한 필요한 예산을 미리 편성했다. 이주에 따른 예상 총비용은 15,271루블로 책정되었지만 실제로는 이주 이후에 그 이상의 추가금액이 소요되었다. 한인의 이주 및 정착에 따른 재정적 지원 이외에도, 한인들은 1861년 4월 21일자 No.36928호 원로원령에 의거 러시아인들과 나란히 인두세 납부 영구면제, 20년간 토지세 면제, 3년간 부역면제라는 특권을 부여받게 되었다. 또한 한인들은 이주 직후에 세례와 더불어 러시아 국적을 받고 가구당 100데샤티나의 토지를 받게 되었다. 재이주에 관한 페다쉔코의 이 기획보고서는 당시 동시베리아 군사령관지사 시넬니코프에 의해 주목할 만한 것으로 인정받았으며 전격적으로 승인되었다.
한편으로 한인들이 이주하게 될 현지에서도 사전작업이 진행되었다. 당시 한인정착촌 건설준비 과정에서는 현지의 카자크(코삭) 병사들이 다수 동원되었고, 주변의 카자크인 마을에서도 인력지원을 해주었다.
마침내 1871년 7월 27일 한인 103가구, 총 431명(남자-246명, 여자-185명)이 일차적으로 예카테리노-니콜스코예(Екатерино-Никольское) 카자크 마을로 임시 이주되어 왔다. 이주한인들은 모두 연해주 남부에서 거주하고 있던 자들로서, 마을별로 보면, 티진헤(지신허) 마을에서 65가구(남자-157명, 여자-129명), 얀치헤 마을(연추)에서 38가구(남자-89명, 여자-56명)가 이주되었다.
한인들은 기존의 재이주와는 다른 미지의 세계로의 이주에 대해 기대와 두려움으로 받아들였다. 계봉우는 상해판 『독립신문』에 연재한 「俄領實記」(아령실기)에서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기원 4214년(1871년-필자) 신미 4월에 지신허 빈민 70여호 남녀 315인이 아관(俄官, 랴비코프 대위-필자)의 지도를 따라 남부여대(男負女戴)하고 흥개호(興凱湖, 홍개호, 한카호수-필자)를 연(沿)하야 끼고 화발포(花發浦, 하바로프스크-필자)까지 도보(徒步)하고 흑수(黑水, 흑룡강, 아무르강-필자)에 지(至)하야 승선(乘船)하고 마침내 사만리(블라고슬로벤노예-필자)에 하륙(下陸)하매 삼천간운(參天干雲)한 삼림이 울창한 대야(大野)에 의거생활(依居生活)이 참으로 무로(無路)하야 상부하앙(上俯下仰)함에 만목(萬目)이 처연(悽然)할 뿐이었다....이종겁화(異種昅化)의 수완(手腕)이 대민활(大敏活)한 아관(俄官)으로서 여간양식(如干糧食)을 공급하지만 그것뿐으론 사신곡복(絲身穀腹)이 넉넉할 수 없었다....그러나 누(淚)로서 파종(播種)하고 마침내 낙(樂)의 실(實)을 추수하게 되야 지금은 인구가 번창함을 따라 가산(家産)이 다 섬유(贍裕)하고 또 그중에서 고급교육(高級敎育)을 수료한 인물이 다산(多産)하였다”. 신문 기사는 고달픈 고국의 삶을 등지고 러시아 땅에 들어왔던 한인들이 또 다시 미지의 먼 곳으로 길을 떠나야 하는 처량한 심정과 곤궁한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카자크 마을에서 짧은 휴식을 취한 한인들이 사마라강 유역에 최종적으로 이송되어 온 것은 8월 1일 무렵이다. 텅빈 대지에 자리잡은 한인들은 이튿날부터 주변 카자크인들의 도움을 빌어 건축작업을 시작했다. 8월 말경에는 20채의 통나무 건물과 2채의 작은 농가, 11월 무렵에 이르러서는 25채의 통나무 건물과 6채의 작은 농가가 지어졌고, 학교와 목조 교회의 초석이 놓여졌다. 이후 계속된 건축으로 총 53채의 큰 통나무 건물이 세워지고, 한인들의 입주와 더불어 마침내 블라고슬로벤노예 마을은 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동시베리아 군사령관지사와 아무르주지사는 한인들의 초기 정착과정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카자크부대 책임자인 체스노크(Чеснок) 중령은 2주마다 한인들에 관한 상황보고를 했으며, 1872년 2월에는 군사령관지사가 직접 블라고슬로벤노예 마을을 방문해 정황을 살펴본 후 한인들의 생계를 위한 일련의 조치들을 취하기도 했다. 초기에 한인들은 새로운 생활환경에 적응해 나가는데 어려움이 많이 존재했지만, 식량에서 의류, 종자, 가축 등에 이르기까지 러시아 정부의 지원으로 첫 겨울을 무사히 보낼 수 있었다.
아무르주 한인사회의 시작을 알리는 블라고슬로벤노예 마을은 러시아 정부의 주도 하에 이루어진 전무후무했던 재이주정책의 결과물이자 ‘최초의 모범정착촌’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세례와 개종, 국적편입, 인두세와 부역, 토지세 면제 등 이주한인들에게 주어진 혜택은 실로 엄청났다. 하지만 러시아 정부에 의해서 교회건축비를 포함한 한인들의 이주와 정착, 경제적 자립을 위해 22개월 간에 걸쳐서 투입된 실비용은 총 16,570루블에 다다랐다. 따라서 기획적인 재이주 정책은 결과적으로 엄청난 재정적 부담을 러시아 정부에 안겨주었고, 향후 그와 같은 정부 지원 하의 재이주는 더 이상 반복되지 않았다.
다음 호에 계속
이병조
(알파라비 카자흐국립대 한국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