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160여 년의 CIS 고려인 이주사에서 가장 독특한 사례로 블라고슬로벤노예 마을의 사례를 꼽을 수 있다. 한인 이주가 가장 먼저 시작된 극동 연해주 한인 사회의 규모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아무르주의 한인 사회 또한 CIS 고려인 연구사에서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곳이다. 아무르주에서는 연해주 지역에 비해 약 10년 정도 늦은 1870년대 초부터 한인(강제이주 이전 시기이므로 ‘한인’으로 표기함) 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아무르주 한인 사회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블라고슬로벤노예 마을(Благословенное; ‘축복받은 마을’의 의미, 사만리, 沙滿理)의 역사는 그 시작부터 연구사적인 흥미로움을 제공하고 있다.
필자는 2002년 여름과 2003년 겨울에 운이 좋게도 두 차례에 걸쳐서 국가보훈처와 독립기념관이 주관하는 CIS 지역 고려인 사적지 답사단의 일원으로 현재 러시아 내 유태인자치주에 속하는 블라고슬로벤노예 마을을 답사한 적이 있다. 이 마을은 하바로프스크에서 왕복으로 약 800km 정도 떨어져 있고, 도중에는 비포장 길로 되어 있어서 당일에 다녀오기에는 꽤 부담스러운 곳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이 마을은 중국과의 국경지대에 위치하고 있어서 사전에 허가서를 받지 않고는 출입이 불가능한 곳이다. 실제로 2002년 여름 첫 방문 시에는 허가서없이 마을을 답사하던 중 국경수비대에 체포되어 1시간 30분 동안 억류되었다가 각서를 쓰고 풀려나기도 했다. 마을 입구에는 위풍당당하게 마을명칭이 새겨진 이정표가 서있고, 그 사방에는 마을 명칭에서도 풍겨지듯 드넓고 비옥한 전답이 펼쳐져 있었다. 과거 한인들이 거주했던 건물들을 찾아볼 수는 없었지만, 주인도 건물도 바뀐 채 여전히 현지인들의 자부심 속에서 마을의 역사와 명맥이 유지되고 있었다. 실제로 2002년 방문 당시 마을사람들은 마을이 한인 이주자들에 의해 세웠졌고, 독특한 이주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는 것에 자랑스러워했고, 130주년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블라고슬로벤노예 마을은 프리아무르 대군관구로 분리되기 이전의 동시베리아 군사령관지사(генерал-губернатор) 시넬니코프(Н.П.Синельников, 1871-74)와 깊은 인연이 있다. 마을의 역사는 1871년 7월 남우수리스크 지역(현재의 연해주 남부)에 있는 포시에트 지구의 한인 103가구(431명)가 아무르주 남부의 아무르강 지류인 사마라 강가에 재이주되어 정착을 하면서부터 시작된다. 건립 이후 블라고슬로베노예 마을은 1세대 한인들의 각고의 노력으로 연해주 수이푼 지역의 추풍4사(秋風四社)로 불린 4개의 한인마을과 함께 손꼽히는 한인 부호마을의 하나로 부상하였다. 또한 마을에서는 고등교육을 받은 후 한인 민족운동 및 사회주의 운동의 지도자로 활동하게 되는 다수의 지식인들이 배출되기도 했다. 러시아 정교회 사제 출신으로 러시아 2월 혁명 후 민족운동에 투신하였다가 교육가로 활동한 ‘채신부’로 알려진 채병욱, 블라디보스톡에서 활동했던 박 페오도르 사제, 초기 사회주의 운동의 지도자로 활동하게 되는 박애와 남만춘 등이 이 마을 출신들이다.
필자는 블라고슬로벤노예 마을의 고찰을 위해 주요 분석 자료로 1890년대 중반 블라고슬로벤노예 마을에서 상주하며 현지조사를 수행했던 키릴로프(А.В.Кириллов)의 조사보고서(1895)와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종교 및 선교잡지들, 외무부 프리아무르 문제 전권위원 그라베(В.В.Граве)의 아무르탐험대 보고서(1912), 대한인국민회 시베리아지방총회(이하 ‘시베리아총회’)의 기관지였던 『대한인정교보』(총11호, 1912.1-1914.6), 그리고 상해판 독립신문에 게재되었던 계봉우 선생의 ‘아령실기「俄領實記」등을 1차 분석 자료로 활용했다.
1. 블라고슬로벤노예 마을의 형성 배경
1860년대 초부터 시작된 한인의 러시아 극동 이주와 정착은 주로 국경 지역에 국한되어 있었다. 당시 한인 이주자들의 연해주 남부(당시 남우수리스크) 국경지대 밀집거주는 점차 국경문제를 야기시켰다. 따라서 러시아 정부는 이주자들에 대한 우호적인 시각을 견지하고 있었음에도 한편으로 조선과의 인접국경 지역에 한인 이주자들의 대규모 정착을 우려했다. 러시아 정부의 이러한 우려를 실행에 옮기도록 한 것은 한 편의 기행보고서였다. 1860년대 후반(1867-69) 연해주 남부의 한인 사회를 목도한 저명한 여행가이자 극동 및 중앙아시아 연구자인 프르줴발스키(Н.М.Пржевальский, 1839-88)는 기행보고서를 통해서 한인들의 이주와 러시아화 문제를 조심스럽게 평가하고 있다. 그는, “한인들은 비록 조선에서의 삶이 고달팠어도 여전히 기억 속에 남아있고, 조선적인 것에 대한 기억을 잊기에는 너무 국경 가까이에서 거주하고 있다. 한인들이 과거를 생각하지 않고 조금씩 완전히 잊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주변환경의 변화가 필요하다. 무언가 기대할 만한 결과물을 얻기 전까지는 한인들의 러시아 유입을 잠시 제한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나아가 그는 한인들의 러시아화와 관련, “한인들은 러시아인들과는 적어도 200베르스타(과거 러시아에서 쓰던 길이이며 1베르스타는 1.067킬로미터임) 떨어진 국경 지역에서 자신들만의 독립적인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고 있다. 이는 한인들로 하여금 고국의 소식을 쉽게 접하고 기억나게 할 것이며, 결과적으로 러시아로부터의 적극적인 영향을 받지 못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아무르강 중류 지역이나 한카호수와 수이푼강 유역 사이 지대에 재이주 된다면, 조선과는 멀리 러시아인 농민들 사이에서 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한인들이 정교신앙과 러시아어, 러시아 관습을 배우게 될 것이다”고 언급했다. 즉 프르줴발스키는 한인들의 국경거주는 러시아화의 장해가 됨으로 국경에서 먼 내륙으로의 재이주가 바람직하다고 본 것이다.
프르줴발스키의 이러한 견해는 향후 프리아무르 지방정부의 한인 이주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 결국 1871년 여름 동시베리아 군사령관지사 시넬니코프는 연해주 남부의 러시아 국적의 한인 103가구(431명)를 아무르주 블라고베쉔스크에서 남쪽으로 547베르스타 떨어진 아무르강 지류인 사마라강 유역에 재이주시켰다. 그 결과 이듬해인 1872년 마침내 사마라강 유역에 블라고슬로벤노예 마을이 세워지기에 이르렀다.
이병조
(알파라비 카자흐국립대 한국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