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이라는 기치 아래 카자흐 땅 최서부의 고려인들이 더불어 일궈낸 성장의 역사 ②
1991년 창립 이래 ‘통일-아티라우’는 정부 기관, 카자흐스탄 민족회의, 나아가 한국의 여러 기관 및 기업들까지 연결하는 공공 협력의 플랫폼으로 성장을 거듭했다. 변방의 척박한 토양 위에 공장을 돌리고, 통신망을 깔고, 건물을 지어 올리며 지역의 뼈대를 세운 고려인 산업 역군들. 이들이 아티라우에 남긴 묵직한 땀방울은 아티라우 고려인 문화원 발족 35주년을 맞이한 오늘날,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깊은 이정표가 되고 있다.카자흐스탄 서북부 지역에서 4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왕성하게 활동해 오고 있는 저명한 언론인 류보비 모나스티르스카야(Любовь Монастырская)가 매체 ‘프리콤(Pricom)’에 기고한 글, <우리는 위대한 국가의 거대한 부대다(Мы – большой отряд великой страны)>를 지난호에 이어 계속해서 우리말로 옮겨 소개한다.
(지난 호에 이어서)
오랜 친구이자 직장 동료였던 코늬스바이 타지갈리예프도 김 아르카디 씨를 이렇게 회고한다.

‘통일-아티라우’ 부회장을 지냈던 故 김 아르카디 전 УС-99 대표이사
“그는 제게 친형제만큼이나 가깝고 소중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늘 함께했으니 말입니다. 항상 책을 가까이하며 박식함으로 두각을 나타냈던 그는 우리 사이에서 언제나 리더 역할을 했습니다. 저는 그를 형처럼 여겼고, 그의 조언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의 집에서는 카자흐어와 고려말이 동등하게 쓰였습니다. 러시아어는 그와 저 모두 나중에 군대와 대학에 가서야 제대로 배웠지요.”
생전의 김 아르카디 씨는 사회생활에서 뛰어난 친화력을 발휘했으며, 한번 약속한 바는 끝까지 지키는 정직한 이였다. 이러한 면모는 그의 사업 활동에도 큰 장점으로 작용했다. 그는 2001년 12월부터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유한책임회사 ‘US-99(УС-99)’의 대표이사를 지냈다. 그는 건축 기술을 철저하게 꿰뚫는 전문가였으며, 조직을 통솔하는 능력 또한 비범했다. 특히 그의 지휘 아래 건설된 마지막 건축물 중 하나인 대규모 농업 저장고(채소 저장고) 복합단지는 나자르바예프 전 카자흐스탄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높은 평가를 받았을 정도로 지역 사회와 국가적인 업적으로 인정받았다.
오늘날 김 아르카디 바실리에비치(그의 부칭)를 기억하는 이들은 그리움 섞인 따뜻한 감정을 품고 그를 돌아본다. 진정한 ‘사람 냄새’가 나던 인간으로서의 그를 말이다.
“나는 이 거대한 영향력의 한 부분인 것에 행복합니다”
아티라우 고려인 문화센터 ‘통일-아티라우’의 발전사를 이야기할 때, 본 단체의 산증인이자 원로인 최 세르게이 옹은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의 가슴에는 제2차 세계대전(대조국 전쟁) 당시 후방에서 바친 헌신적인 노동을 기리는 ‘노동영웅훈장’이 빛나고 있다. 포화 속의 1940년대는 그가 한창 철없을 소년 시절이었으나, 그는 여느 또래들과 마찬가지로 조국의 승리를 위해 아낌없이 땀방울을 흘렸다.
물론 그가 가족과 함께 이곳 카자흐스탄 땅을 밟은 것은 자의가 아니었다. 최 세르게이 옹은 “우리 ‘통일-아티라우’의 고령층 회원들은 지금까지도 강제 이주의 아픔과 서러움을 가슴 깊이 느끼며 살아간다”고 말한다. 이렇듯 극동 지역의 고려인들은 과거 소비에트 연방 전체를 통틀어 가장 먼저 강제 이주의 비극을 겪은 민족이었다. 오늘날 튀르키스탄 국가기록원에 보존된 문서에 따르면, 당시 극동에서 출발한 고려인 중 단 절반만이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의 최종 목적지에 무사히 도달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도 그럴 것이 장장 한 달이 넘는 시간을 화물 열차와 가축 수송칸에 몸을 싣고 이동했기 때문이다. 따뜻한 음식은 구경조차 하기 힘들었고, 난방용 난로조차 모든 칸에 구비되어 있지 않았다. 가진 비상식량이라곤 열차에 실리기에 앞서 급히 도축한 소나 돼지고기를 대충 말린 것과 겨우 챙겨둔 고춧가루가 고작이었고, 그나마 그것으로도 국 한 그릇 끓여 먹을 여건이 되지 않았다. 최 세르게이 옹은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이주길에 올랐던 이들로서는 물과 땔감을 제때 구하는 것도 어려웠소. 이따금씩 열차가 정차를 하긴 했지만, 언제 다시 출발할지 시간표를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지. 불을 피울 땔감을 구하려고 기찻길에서 고작 몇 미터 벗어났다가, 열차를 놓치는 이들이 허다했다오. 그렇게 낙오된 이들은 영영 찾을 수 없었지. 신원 조사를 받다가 체포되거나, 운이 좋으면 그나마 다른 목적지로 가는 열차에 실려 가 버리는 것이 다반사였소.”
그들이 열차에서 내려진 곳은 황량한 겨울이 한창인 대초원지대였다. 1937년의 11월은 유독 혹독한 칼바람이 몰아쳤고, 소년 세르게이의 어린 남동생은 그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심한 감기를 앓다 끝내 숨을 거두었다. 풍요롭던 극동의 삶과 터전을 빼앗긴 채 빈털터리 신세로 마주한 초원의 환경은 가혹하기만 했다. 훗날 고려인들은 씁쓸한 풀내가 배어나는 광활한 초원의 바람을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이 땅에 정을 붙이게 되지만, 그 첫 순간만큼은 모든 것이 낯설고 두려운 공포 그 자체였다.
당시 소련 정부는 카자흐스탄 땅으로 내몬 이주민들을 ‘국가체제의 잠재적인 적’으로 규정하며 격리를 시도했으나, 그렇게 차별과 분열을 조장하려던 국가적 음모는 보기 좋게 실패했다. 초원의 주민들은 토착민으로서 자신들이 가진 기득권을 앞세워 상처받은 이들을 억압하는 대신, 도리어 이들 이방인이 낯선 현실에 적응해낼 수 있도록 기꺼이 손을 내밀었다. 결국 증오의 씨앗을 뿌린 자들이 거둔 것은 역경을 뚫고 생존하기 위해 뭉친 인류애와 숭고한 연대였다. 최 세르게이 옹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카자흐 사람들이 내민 도움의 손길 덕분이었습니다. 자신들조차 굶주리던 1930년대의 혹독한 시절에, 기꺼이 음식과 거처를 나누어 준 현지인들의 은혜를 우리는 결코 잊지 못합니다. 우리는 자식과 손주들에게도 이 역사적 고마움을 뼈에 새기도록 가르칠 것이오. 특히나 당시 체제로부터 내려진 엄격한 금지령과 감시마저 무릅쓰고 우리를 품어준 이들이기에 그 온기는 더욱 귀합니다. 그렇기에 카자흐스탄 초대 대통령에 의해 ‘감사의 날(День благодарности)’이 제정되었을 때 나는 내 일처럼 기뻤다오. 우리는 피를 나눈 형제 같은 카자흐인들에게 늘 감사의 마음을 품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는 모두가 평등하게 존중받는 진정한 집이자 조국을 찾았소.”
그렇게 얻은 제2의 조국에 그는 무엇으로 보답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친아들과도 같은 진심 어린 태도와 사랑이었다. 그리고 그가 생각하는 사랑과 보은이란 곧 ‘노동, 노동, 그리고 또 노동’이었다. 곁에 살아가는 토착민들의 뿌리와 근원을 깊이 배워나가면서, 최 세르게이 옹은 자신과 모든 고려인을 진정한 형제처럼 맞아준 그 은혜에 보답해 나갔다. 그는 어린 나이부터 크질오르다주의 벼농사 지대에서 땀 흘려 일했고, 대학에 진학해 공부에 매진하는 와중에도 노동을 멈추지 않았다.
대학 졸업 후 그는 구리예프(지금의 아티라우)로 교사 발령을 받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뛰어난 화학 교사로 이름을 알리게 된 그는 수산공업 전문학교로 초빙되었다. 그렇게 새로 자리 잡은 곳에서도 남다른 탐구열과 진취적인 자세를 인정받아 곧 어류학과장 자리에까지 임명되었다. 그는 우리 지역의 젊은이들이 여러 일류 기업에서 실습을 쌓고 훌륭한 전문가로 성장할 수 있도록 헌신했다. 이후 학교에 해양과가 신설되었을 때는 학생들이 흥미진진한 항해 실습을 떠날 수 있도록 지원체계를 구축했고, 그 덕분에 아티라우의 젊은 인재들이 저 멀리 남반구 위도의 바다까지 탐험할 수 있었다.
최 세르게이 옹은 결코 민족을 기준으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았으며, 모두와 두루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지냈다. 특히 그는 생의 마지막 날까지 자신이 직접 기틀을 닦았던 고려인 문화센터의 활동에 최선을 다해 참여했다. 그는 아티라우 고려인 문화센터의 초대 회장 김 나데즈다 여사의 가장 든든한 조력자였으며, 그녀의 뒤를 이어 지역 동포들을 하나로 결속시키고 민족의 뿌리를 향한 진정한 관심을 깨워준 우테바에바-최 마리야 회장의 곁을 지킨 최고의 지원군이었다.
이들의 헌신 덕분에 현재 ‘통일-아티라우’ 문화센터에는 자체 합창단과 솔로 가수들, 그리고 무용단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으며, 차세대 청년들을 중심으로도 여러 프로젝트가 이루어지고 있다. 오늘날 아티라우 지역에서 고려인들이 얼마나 안정적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는 최근 실시된 인구 조사에서 이 지역 내 고려인 인구가 2천 9백 명을 넘어섰다는 사실(1999년 조사 당시 2천 5백 명)이 증명한다. 우리는 모두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하나의 국민’이자 ‘하나의 민족’이다. 그리고 최 세르게이 옹은 그 위대한 전진의 대열에서 당당하고 명예로운 한 자리를 차지하는 존재다.
앞으로 그들이 펼쳐갈 더욱 원대한 계획

리 류드밀라 현 ‘통일-아티라우’ 회장
현재 '통일-아티라우'를 이끌고 있는 리 류드밀라 회장은 카자흐스탄 고려인 사회에서 독보적인 경력을 자랑하는 인물이다. 일찍이 블라디미르 박 전 회장을 보좌하며 부회장으로 수년간 활동한 세월을 통해 그녀가 축적한 풍부한 경험은 동료들에게 늘 귀감이 되고 있다. 리 회장은 이렇게 강조한다.“우리가 걸어온 길은 기억과 계승의 길이며, 선조들에 대한 공경이자 미래 세대를 향한 책임의 길입니다. 창립 이래 우리 문화센터는 단순한 사회적 조직을 넘어 고려인의 언어와 문화, 전통, 그리고 정신적 가치를 보존하는 살아있는 공간이 되어왔습니다. 이곳에서 세대 간의 유대가 깊어졌고 새로운 주도성이 싹텄으며, 일체감과 상호 지지의 마음이 형성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센터는 전통에 충실하면서도 확신을 가지고 미래를 바라보는, 활력 넘치고 개방적인 조직으로 발전했습니다. 우리는 초석을 놓아준 선조들을 감사히 기억하며, 오늘날 이 공동의 과업을 이어가는 모든 이들의 기여를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1990년대 문화유산 보존센터에서 출발해 오늘날 시민사회의 핵심 기관으로 성장했습니다. 민족 축제를 조직하던 단체에서, 이제는 민족 간 대화와 자선, 중재, 그리고 카자흐스탄 국민으로서의 통합된 정체성을 강화하는 플랫폼으로 변모한 것입니다.”
그동안 ‘통일-아티라우’ 문화센터는 수많은 흥미롭고 교육적인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21세기의 리더’, 인텔리전스 쇼 ‘우리의 카자흐스탄’, 공화국 공모전 ‘민족의 영혼’ 등에서 당당히 1위를 차지했다. 또한 전국 발행 주간지 《고려일보》가 주관한 공모전에서는 ‘최우수 지역 센터’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기도 했다.
특히 카자흐스탄 국가어인 카자흐어 발전을 목표로 기획한 어학 교육 프로젝트 ‘카자흐어와 한국어의 유사점과 차이점(Сходство и отличие казахского и корейского языков)’은 빼놓을 수 없는 성과다. 하렐 도스무하메도프 아티라우 국립대학교에서 열린 이 행사에는 카자흐어 교사들을 비롯해 여러 민족문화센터 활동가, 대학교수와 학생들이 대거 참여해 국가어 발전의 기틀을 논했다.
이외에도 《고려일보》 창간 100주년을 기념해 기획된 국내 관광 활성화 프로젝트 ‘카자흐스탄은 나의 보금자리(Қазақстан – менің мекенім)’, 나자르바예프 영재학교(NIS)에서 주카자흐스탄 대한민국 대사관 관계자들을 초청해 300여 명 규모로 성황리에 개최한 ‘한국어 페스티벌’ 역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모스크바, 알마티, 아스타나 등지의 스피커들이 참여한 콘퍼런스 ‘The Top of success – 아이디어의 전환(Трансформация идей)’은 ‘통일-아티라우’ 소속 예술단과 NIS 소속 극단 학생들의 그림자극이 어우러진 감동적인 문화 무대로 대미를 장식했다.
또한 마함벳 구(區) 소재 베이바리스 마을에 ‘신이현 거리’를 조성하고, 당사자의 아들인 신 브로니슬라프 씨에게 ‘마함벳 구 명예군민’ 칭호를 수여하는 행사에는 고려인협회 이사회와 지도부, ‘통일-아티라우’ 활동가들과 마을 주민들이 모두 참여해 기쁨을 나누었다.
이 밖에도 어려운 이웃과 다자녀 어머니, 고아와 장애인을 돕고 어르신과 청년 세대를 살뜰히 챙기는 자선 활동은 이제 센터의 아름다운 전통이 되었다. 아티라우에서 열리는 ‘고려 문화의 날’ 축제마다 고려인 전통 의례 마스터클래스, 민속음식 시식회, 사물놀이 연주, 전통 무용 공연 등은 결코 빠질 수 없는 핵심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았다.
현재 ‘통일-아티라우’는 박 블라디미르, 유가이 에릭, 한 스베틀라나, 김 니콜라이, 최 발렌티나, 황 야나 등 책임감 있고 창의적인 인물들이 모여 핵심 팀을 구축하고 있다. 전체 활동가 수는 150명을 넘어섰으며, 이 중 50여 명이 젊은 청년들로 구성되어 조직의 미래를 밝히고 있다.
우리는 연대와 상호 존중, 서로에 대한 책임감이 그 어느 때보다 소중한 복잡하고도 중요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다민족 국가인 카자흐스탄의 힘은 언제나 우리 국민의 결속력, 그리고 서로를 지지하고 경청하며 이해하는 능력에 있었다. 우리 모두는 성실한 노동과 정직함, 가족과 고향 땅에 대한 사랑으로 이 공동의 미래에 기여하고 있다.
리 류드밀라 회장은 이렇게 말한다.
“다양한 민족의 수많은 가정이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당했던 그 가혹한 수난의 시절, 카자흐 국민들은 고려인들을 친가족처럼 받아주었고 마지막 빵 한 조각까지 나누며 보금자리와 먹을 것을 내어주었습니다. 고려인 카자흐스탄 이주 80주년을 맞이했던 2년 전, 우리는 카자흐 국민들을 향한 영원한 감사의 마음을 담아 마함벳 구 베이바리스 마을에 ‘카작 할크나 믕 알긔스 (Қазақ халқына – мың алғыс, 카자흐 민족에게 무한한 감사를)’이라는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이 기념비는 카자흐어, 러시아어, 한국어 등 3개 국어로 카자흐 국민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 새겨진 거대한 석조 양식으로, 그 때에 우리 민족이 겪어야 했던 고난을 나타내는 상징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 앞에는 앞으로 우리의 활동가들이 뜨거운 열정으로 실현해 나갈 원대한 계획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러시아어 원문: 류보비 모나스티르스카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