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이라는 기치 아래 카자흐 땅 최서부의 고려인들이 더불어 일궈낸 성장의 역사
1937년 강제 이주라는 가혹한 운명에 밀려 이 땅에 발을 디딘 고려인들. 고난의 고개인 ‘아리랑’을 넘듯 모진 세월을 눈물과 끈기로 버텨낸 이들은, 오늘날 제2의 고향인 카자흐스탄의 당당한 구성원으로서 자신들만의 찬란한 부흥기를 일궈내고 있다.
그동안 카자흐스탄 고려인의 역사와 삶을 돌아볼 때, 우리의 시선은 대개 특정 지역에 머물곤 했다. 최초의 정착지인 우슈토베, 척박한 땅을 황금 벌판으로 일군 크즐오르다, 그리고 현재 문화와 비즈니스의 중심지인 알마티 등 주로 중·남부 지역이 주목받아 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고려인의 강인한 생명력과 개척 정신이 비단 이들 지역에서만 만개했던 것은 아니다. 지도상에서 이들 중심지와 까마득하게 떨어져 있어 낯설게만 느껴지는 최서부 카스피해 연안에서도 고려인들이 일구어낸 삶의 터전은 지금까지 눈부신 번창을 이어가고 있다.
특히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는 석유·화학의 도시 아티라우(구 구리예프)에서 한민족 특유의 끈질긴 생명력은 더욱 묵직한 진가를 드러낸다. 이곳에는 단순한 디아스포라 내 친목을 넘어 카자흐스탄 서부의 땅을 개척하고 지역 경제 발전의 주춧돌을 놓은 고려인 민족문화연합 ‘통일-아티라우(Тхоньиль-Атырау)’가 있다. 올해로 창립 35주년을 맞이한 이 문화센터는 단순한 고려인 친목 단체가 아니다. 척박했던 카자흐스탄 서부 지역의 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한 ‘위대한 개척자’이자 ‘산업 역군’들이 써 내려간 선 굵은 서사, 그 자체다.
그렇다면 아티라우 지역의 타 민족 구성원들은 이들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을까? 현지의 저명한 언론인 류보비 모나스티르스카야(Любовь Монастырская)가 매체 ‘Pricom’에 기고한 글, <우리는 위대한 국가의 거대한 부대다(Мы – большой отряд великой страны)>를 우리말로 옮겨 그 답을 갈음한다.
<우리는 위대한 국가의 거대한 부대다>
뜻하지 않게 카자흐스탄 낯선 땅에 발을 디뎌야 했던 고려인들의 이주사도 이제 90년의 성상을 헤아린다. 강인한 생명력과 근면함을 지닌 고려사람들은 전후의 모진 역경을 극복하며 오늘날 카자흐스탄 속 다민족 사회를 떠받치는 중추적인 일원으로 확고히 자리매김했다.
카자흐스탄의 고려인들은 한민족의 민요에서 행복, 번영, 자유의 정점을 상징하는 ‘아리랑 고개(*본디 ‘아리랑 고개’는 이별, 기다림, 한(恨) 등을 상징하며, 더 나아가 삶의 시련과 고난, 그리고 이를 극복하려는 민중의 의지를 가리키나, 타민족 출신의 현지 기자가 본문에 쓴 표현을 그대로 우리말로 옮겨 싣는다)’를 넘는 험난한 여정을 극복하고, 이제 고향인 카자흐 땅에서 르네상스, 즉 부흥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본 글은 창립 35주년을 맞이하는 고려인 협회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하나의 여정이자, 새로운 성공을 향한 길에서 선구자 역할을 했던 이들에 대한 서사다.
1991년 고려인 문화센터 ‘통일’의 출발점에는 카자흐스탄 공훈 건설업자 텐 알렉세이, 노동적기·명예장훈장 수훈자인 농업인 오가이 노옥, 물리수학 박사 박 이반 등 지역사회의 명사들이 있었다. 초기 이 고려인 민족연합의 명칭은 ‘구리예프 고려인 문화센터 협회(Гурьевская ассоциация корейского культурного центра)’였으나, 1994년에 이르러 ‘아티라우 문화센터(Атырауский культурный центр)’로 개칭되었다. 본 단체를 이끈 초대 회장은 구리예프 사범대학(현 도스무하메도프 아티라우 국립대학교) 강사 출신의 김 나데지다 여사였다. 그녀는 활발한 활동을 펼치는 회원들을 모아 평의회를 구성하는 등 남다른 조직력을 보여주었으며, 당시 최초의 고려인 대표단 일원으로서 남·북한을 차례로 방문하며 민간 외교의 물꼬를 트기도 했다. 김 회장의 리더십 아래 문화센터는 지역 내 다양한 행사를 주도하며 고려인의 문화와 언어, 전통을 지키는 든든한 구심점으로 자리매김했다.
1996년에는 카스피해 연안 지역 고려인 공동체의 확립과 발전에 크게 기여한 오테바예바-최 마리야 여사가 아티라우 고려인 문화센터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도스틱 2등급 훈장’ 수훈자이기도 한 그녀는 본 한민족 문화원의 발전을 위해 여러 활동가들을 영입하고 화합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녀의 리더십 아래 모여 활약한 대표적인 지역사회 인사로는 최 세르게이 구리예프 수산전문학교 선임강사, 유가이 에릭 아티라우 정유공장 수석 엔지니어, 리 M. ‘보타고즈’ 봉제공장장 등이 있었다.
두 민족의 딸
장장 15년 동안 본 고려인 민족문화연합을 이끌어온 지도자, 최 마리야 여사. 1940년 크즐오르다주 테렌우제크역에서 태어난 그녀는 대학 졸업 후 아티라우 출신의 남편과 결혼하며 이곳에 정착했다(결혼 후 남편의 성을 따라 ‘우테바예바-최 마리야’가 되었다). 자신의 민족이 겪어야 했던 아픔과 수치심, 슬픔을 젖먹이 갓난아기 때부터 가슴 깊이 흡수하며 자란 최 마리야 여사는 동포들의 애환을 달래고 보듬고자 평생을 노력했다. 그녀는 특히 고려인들이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 전통, 그리고 영웅들에 대하여 배울 수 있도록 힘썼다. 최 마리야 여사의 이러한 노력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는 그녀의 주도 하에 개최된 바 있는 독서 컨퍼런스를 꼽을 수 있다. 이 행사는 지역사회 고려인 동포들의 교육사에 길이 남을만한 성과로 평가받는다. 우테바예바-최 마리야 여사는 이 행사를 통해 동포들에게 홍범도 장군의 경이로운 삶과 정신을 흥미롭고 감명 있게 전달해냈으며, 이외에도 한민족의 자랑스럽고 훌륭한 여러 인물들을 지속해서 소개하며 민족 교육에 앞장섰다.
본래 카자흐 학교의 러시아 어문학 교사로서 아티라우 시의 여러 학교들에서 37년간 교편을 잡았던 최 마리야 여사. 오랜 교육적 연륜을 바탕으로 그녀는 동포들을 하나로 결속시켰고, 현대의 삶과 존재로 이어지는 자신들의 뿌리에 대해 알고자 하는 진정한 열망을 깨워주었다.
최 여사의 헌신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노력과 의지만으로 대한민국과의 소통 창구를 개척해낸 것이다. 한국에서 전통 의상을 조금씩 공수한 것을 시작으로 이후 의상 제작용 원단까지 들여오며 문화 교류의 물꼬를 텄다. 그녀의 이러한 노력 덕분에 아티라우 고려인 문화센터 ‘통일’이 주최하는 모든 민족 축제는 언제나 눈부시게 다채롭고 화려하게 피어날 수 있었다.
최 마리야 여사는 타인을 위해 움직일 때 결코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냉담한 무관심 앞에서는 끈기 있게 버텨냈고, 필요할 때는 단호하게 밀고 나갔다.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관공서 접견실에서 몇 시간씩 기다리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가진 권위는 사사로이 남용하지 않고 오직 진실된 일에만 가치 있게 쓸 줄 아는 사람이었다.
우테바예바-최 마리야 여사는 재임 기간 동안 모든 연령대의 고려인 동포들과 함께 일하며 소통했는데, 특히 어린이들이 고려인으로서의 자긍심을 마음 깊이 새길 수 있도록 하는데 힘썼다. 한민족이 얼마나 근면하고 재능이 풍부한지, 그리고 역사 속에서 얼마나 모진 박해와 시련을 이겨내왔는지 알리고자 한 것이다.
그렇다고 그녀가 민족적 폐쇄주의나 고립을 지향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마리야 여사는 카자흐스탄이 박해받던 여러 민족에게 따뜻한 품을 내어준 ‘진정한 조국’이었음을 강조했다. 과거 전쟁 시기 수많은 이방 민족이 이곳으로 강제 이주당했을 때에 카자흐인들은 그들의 든든한 이웃이자 동반자가 되어주었다는 것을, 그리고 가정과 평화의 상징인 카자흐 전통 가옥의 천장 구조물 ‘샹으락(Шаңырақ)’처럼, 카자흐인들의 포용력은 모든 이주민을 향해 열려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소통과 연대를 다진 그들의 노력
허가이 빅토르 옹은 1951년에 태어났다. 군 복무 후 타슈켄트 통신대학을 졸업한 그는 정부의 발령을 받아 구리예프 통신소 산하 다기능 통신 노드의 책임자로서 첫 직무를 수행하였다. 이후 서카자흐스탄 철도 통신 책임자를 거쳐 1991년부터 1994년까지 아티라우 주 ‘카작텔레콤(Kazakhtelecom)’ 총괄사장을 역임하였다. 그의 지휘 아래 추진된 통신망 발전은 아티라우 일대 여러 지역의 인프라 개발을 한층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허가이 빅토르 옹은 자신의 본업 외에 아티라우 지역 사회와 고려인 디아스포라 내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활동했으며, 특히 김나데지다 초대 회장의 작고 이후에는 아티라우 고려인 문화센터 ‘통일’의 차기 회장직까지 맡았다.
2010년 본 문화센터는 명칭을 ‘통일’에서 ‘통일-아티라우’로 변경했으며, 같은 시기 총회를 통해 기업가 박 블라디미르 씨가 신임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박 회장은 본 고려인 센터가 지역 사회는 물론, 카자흐스탄 전역에서 그 위상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그의 리더십 아래 ‘통일-아티라우’는 본격적으로 ‘카자흐스탄 공화국 민족회의’의 중앙 및 주 지부를 비롯해 지역 공공연합, 지방 자치단체, 교육·문화·비즈니스 기관 등 다양한 분야와 적극적인 협력 관계를 구축해 나가기 시작했다.
문화센터의 조직 및 발전 과정에서 김 아르카디 바실리에비치 부회장의 역할 또한 결정적이었다. 그는 모든 행사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며 센터 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2011년 개최된 설맞이 축제는 박 블라디미르 회장이 기획한 첫 공식 행사였다. 이 자리에서 그는 아티라우 고려인 문화센터 수장으로서 탁월한 리더십과 통솔력을 증명해 보였다. 무엇보다 공익을 향한 강한 책임감, 그리고 민족 문화에 헌신하는 이들에 대한 깊은 예우를 보여주며 대내외적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이후 그는 정부 기관, 지방 민족회의, 카자흐스탄 고려인협회, 한국 기업인 간의 다각적 협력 네트워크를 단기간에 구축하며 아티라우 고려인 민족문화연합의 기반을 공고히 다졌다.
‘통일-아티라우’의 눈부신 성장은 박 블라디미르 회장을 비롯해 리 류드밀라, 유가이 에릭, 관 올가, 김 아르카디 등으로 구성된 핵심 임원들의 탁월한 업무 능력에서 비롯됐다. 이들은 특히 지방의회 및 정부 기관, 지방 민족회의 등 유관 기관과 공고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며 단체의 성공을 견인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현재 ‘통일-아티라우’를 이끌고 있는 리 류드밀라 회장은 당시 단체를 함께 일구었던 동료들과의 시절을 회상하며, 이제는 고인이 된 김 아르카디 전 부회장을 떠올렸다.
“김 아르카디 바실리에비치 전 부회장님은 약 7년의 재임 기간뿐만 아니라, 본 센터의 설립 초기부터 단체의 발전을 위해 한결같이 힘을 보태신 분이셨습니다.
본업과 마슬리하트(시의회) 활동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도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행사는 단 하나도 없었지요. 그는 ‘통일-아티라우’의 진정한 동반자로서, 본 단체의 발전을 위해 늘 노심초사하며 정신적·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든든한 버팀목이었습니다.
그는 어르신들부터 젊은 세대까지 두루 소통이 잘 통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평범한 노동자부터 동료들에 이르기까지 모두에게 깊은 신망과 존경을 받았지요. 근면하고 정직하며, 겸손하고 공정할 뿐만 아니라 말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 그리고 섬세한 유머 감각을 지닌 사람 — 이것이 우리 모두의 기억에 남은 그의 모습입니다.
고인은 우리 민족의 문화와 전통을 보물처럼 소중히 여겼고, 동포들의 근면함과 과학·군·비즈니스 등 각계각층에서 이룩한 성과를 무척 자랑스러워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민족을 초월한 화합을 중시하는 진정한 ‘국제주의자’였습니다.”
(다음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