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금요일 공화국 국립 아카데미 고려극장에서 <카자흐스탄공화국 초대대통령 옐바싀의 논문 <미래에 대한 견해 – 사회의식의 현대화>에 관한 <뚜간 제르>강령의 범위내에서 카자흐스탄공화국의 저명한 국가 및 사회 활동가 허가이 알렉세이 유리예위츠의 탄생 90주년에 즈음한 회상의 야회가 있었다.
이 날 친구들, 근무와 사회사업 과정에 알렉세이 유리예위츠와 가깝게 알고 지낸 사람들, 친척들이 고려극장 관람석을 채웠다. 야회는 카자흐스탄공화국 국회 하원의원 김 로만 우헤노위츠의 발언으로 시작되었다:
-오늘 우리는 국가에 큰 공로를 세웠으며 고려인들의 자랑으로운 되는 분을 회상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날로 면모를 바꾸는 아름다운 알마티를 보면서 알렉세이 유리예위츠를 회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의 설계에 의해 메데오 계곡에 새워진 제방이 무서운 토석류로부터 알마아타를 구원했습니다. 알렉세이 유리예위츠와 같은 분이 우리 고려인의 이미지를 더 높여줍니다. 고려인 사회운동이 시작되자 첫날부터 이 사업에 몸담아 고려인 사회단체의 시초를 닦아놓았습니다.
인간의 생은 짧습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추억은 그의 위대한 업적에서 영생합니다.
이어서 회상담을 나눈 공화국 공훈트레이너 황 마이 운데노위츠는 그가 메데오 스케이트 경기장에서 선수들을 훈련시키는 나날에 알렉세이 유리예위츠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제방건설장에서 작업을 지도하던 일이 기억에 남았다고 말하였다.
-40년대 말에 세 친구 – 박 이완, 김 프리드리흐, 허가이 알렉세이가 수학가가 될 희망을 안고 알마아타 국립대학을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후에 알렉세이는 입학서류를 카자흐농업대학 수문토지개량 학부로 돌렸습니다. 그것은 이 학부는 기숙사도 주고 장학금도 주었기 때문입니다. 전후의 어려운 시기에 부모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했다는 자식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일생을 두고 그는 수문학과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오늘에 와서 우리는 대학 입학시에 그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다음 발언한 알마티고려민족중앙회 신 브로니슬라브 회장은 청춘 시절을 회상하였다:
-알렉세이 유리예위츠가 저에게는 외삼촌이 됩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의 학업성적이 그닥지 못했거던요. 삼촌은 <공부를 하기 싫으면 일을 하라>고 하면서 나의 손에 첫 삽을 쥐여줌으로서 나는 부득이 로동의 길을 밟기 시작했습니다. 저의 출세가 이날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오늘 달성한 모든 성과는 알렉세이 유리예위츠의 덕분입니다.
알렉세이 유리예위츠의 아들 허가이 일라리온은 아버지를 회상하기 위하여 모인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야회참가자들은 고려극장 집단이 준비한 공연을 구경하였고 공연이 끝난 후에는 알렉세이 유리예위츠의 친척측이 마련한 간식도 하였다.
허가이 알렉세이 유리예위츠는 1929년에 쁘리리예 변강에서 태여났다. 강제이주 시기에 부모와 함께 카자흐스탄의 구리예브시에 오게 되었다. 1953년에 카자흐농업대학 수문토지개량힉부에 입학하여 1953년에 졸업했다. 졸업후 구리예브주 수문관리국에서 인지니어로, <도르워드스트로이>트레스트 제 2호 건설조립관리국에서 국장으로 근무했다. 1986년에 카자흐소베트사회주의공화국 내각직속 토석류 보호시설 건설 및 운영 총관리국 국장, 공화국 자동차도로건설성 부상으로, <카스셀레사시따>생산연합 국장으로 일하였다.
그는 로동적기훈장, 인민친선훈장을 비롯하여 수많은 표창장과 메달, 소련 전연맹인민경제 성과 전람회 동메달, 금메달도 받았고 소련 내각 국가상도 받았다. 허가이 알렉세이 유리예위츠는 2011년에 세상을 떠났다.
본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