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오전 9시 30분경 누런 갤러리에서 고려인 현지 코디네이터인 빅토리아 최와의 짧은 만남을 가졌다. 그녀는 2017년 우즈베키스탄에서 열린 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 기념행사인 <기억>에서 고려인 화가들을 위하여 전반적인 전시 총괄을 맡았다고 한다. 빅토리아의 개인적인 호출로 온 빅토리아 최에게서 니콜라이 신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들은 후, 다음에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오후에는 화가 스베틀라나 최의 손녀인 아나스타시야 안을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는데, 시간에 여유가 생겨 우즈베키스탄 국립미술관에 방문할 수 있었다. 1918년에 설립된 이 미술관은 구소련에서 가장 많은 작품을 보유하고 있었다는데, 우리나라의 국립중앙박물관을 능가하는 크기로 보였다. 18~19세기의 러시아 이콘화(아이콘화, 그리스 정교에서 모시는 예수, 성모, 성도, 순교자 등의 초상)를 거쳐 1900년대 이후의 우즈베키스탄의 미술 경향을 살펴보던 중, 전시회장 벽면에 걸려있는 니콜라이 신과 이스크라 신의 작품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수많은 소수민족 중 하나에 불과한 고려인의 그림이 유서 깊은 박물관에 당당히 걸려 있다는 사실이 못내 자랑스러웠다. 약속시간이 다가와 필요한 도록을 구매하고 서둘러 나올 수밖에 없었다. 박물관을 나와 아나스타시아 김(아나톨리 김의 큰딸이자 임시 통역)과 택시를 타고 아나스타시야 안의 집으로 향하였다.
타슈켄트 도심의 아파트에 살고 있는 고려인 4세인 아나스타시야 안은 서툰 한국말로 내게 소박한 인사를 건넸다. 현재 한국나이로 스무 살인(1999년생) 그녀는 외할머니(스베틀라나 최)와 같은 예술가의 길을 걷기 위하여 입학시험 작품 준비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었다. 평소에는 시간이 날 때마다, 한국어를 배우기 위하여 고려인문화원을 가곤 한다는 말에서 고국의 언어를 배우고자 노력하는 그녀가 귀엽고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5-6평 남짓 되는 거실 한 구석에는 스베틀라나 최의 작품들이 보자기에 씌어져 줄지어 서있었다. 하나둘씩 풀어놓으며 이미 고인이 된 외할머니의 인생과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1943년생이자 고려인 2세인 스베틀라나 최는 타슈켄트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인 명진 태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1932년 처음으로 설립된 고려극장의 예술 감독이었는데, 강제이주 후 우즈베키스탄에도 극장을 설립하였다. 어머니 니나 반 역시 극장에서 무대의상을 담당하는 일을 맡았기에, 스베틀라나는 어린 시절부터 극장을 놀이터 삼아 지냈고, 이런 예술적 환경과 부모의 예술성으로부터 예술가의 자질을 물려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1967년 벤코브 예술대학에서 학업을 마친 뒤, 치르치크의 탱크 대학을 졸업한 군인인 젠나디우 최 와 결혼을 하였다. 시아버지 최길준 역시 원동에서 태명진과 함께 고려극장을 만드는 데 일조하였던 직장 동료로, 강제이주 후 타슈켄트 외곽에 위치한 집단농장인 북극성에서 재회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다시 연을 맺은 두 사람은 60년대 즈음 그곳에 국립극장을 설립한다. 이후 스베틀라나 최는 군인인 남편의 직업 특성상 우즈베키스탄, 러시아, 우크라이나, 아제르바이잔, 투르크메니스탄, 독일, 헝가리 등등의 나라를 이동하며 생활하게 된다. 평소에 그녀는 가족을 보살피는 일에만 집중하였기에 작업에 열중할 수 있는 시간이 없었지만, 때때로 머물렀던 곳의 인상적인 풍경을 스케치로 남기고는 하였다. 또 우즈베키스탄 국립 연극 극장에서 일했던 경력을 살려, 투르크메니스탄의 수도인 아시가바트 와 우랄 산맥에 위치한 도시 첼랴빈스크에 머물 때에는 오페라 극장에서 장식가로 잠시 일하기도 하였다. 70년대에 이르자 소비에트 연방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적 갈등이 심화되면서 전쟁 발발의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소비에트 연방 정부는 (고려인들이 간첩이 될 상황을 염려하여) 러시아계 고려인인 제나디우 최를 국경에서 물러날 것을 명령하였다. 제나디우는 정부가 자신을 믿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크게 분노하였고, 의무기간 복무 후 곧바로 제대를 하였다.
그 후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왔는데, 그때의 충격이 컸는지 갑작스런 병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그것이 파킨슨병이었는지 아무도 몰랐던 그 병에 대해 무지한 시절이었기에 스베틀라나의 극진한 간호에도 불구하고 2008년 5월에 남편 제나디우 최가 사망하였다. 스베틀라나는 20년 동안 남편을 돌보며, 힘들고 지쳤던 마음을 달래고자 다시 붓을 들었다고 한다. 지난날은 가정에만 충실하여, 장식가로서 일을 하거나 그림 그리는 일에 온전히 몰입할 수 없었고, 남편의 빈자리에 대한 슬픔과 아픔을 풀기 위함이었다. 이 시기에 그녀의 재능을 알아본 러시아 화가인 아나톨리 지보에도브가 그녀의 작품을 자신의 전시회에 함께 실어주었고, 그녀의 대학 동료 또한 꾸준히 작업 활동을 할 것을 권고하기도 하였다. 그녀가 제출한 작품으로는 ‘그동안 가족이 함께 거주지를 옮기며 보았던 다양한 풍경을 목가적으로 스케치하거나 유화로 그려낸 것’이 대다수였는데, 개중에 패치워크를 한 작품이 돋보였다. 실크재질로 보이는 천을 조각조각 오려서 꽃과 줄기, 바위 등을 표현해낸 것이다. 이 작품을 보자마자, 장식가로서 극장에서 일한 경력에서 착안한 것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이런 창작 기법은 다른 화가들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작업 형태로, 한국의 패치워크인 조각보를 연상시켰다.
스베틀라나는 극장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의상과 전반적인 무대 장식을 넘나드는 영역을 감독하면서 자연히 자투리 천에 시선이 갔을 것으로 예상해 볼 수 있다. 천을 단순히 서로 이은 것이 아닌 조각의 천을 여러 겹 중첩시켜 덧대거나, 캔버스 위에 천을 붙이고 그 위에 물감을 덧칠하여 입체감을 두드러지게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물론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직물을 활용한 자수 공예가 많이 발달하였지만, 이와 같은 형태의 작품은 우즈베키스탄 내에서도 보기 드물다. 한복의 재질과 유사해 보이는 천으로 꾸준히 작업을 한 것과 전시회 도록 안에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그녀의 사진에서 그녀가 비록 한국어를 잘 몰랐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기 위하여 노력하였음을 느낄 수 있었다. 손녀인 아나스타시야는 15년간 외할머니 스베틀라나와 함께 생활하여 영향을 받은 탓인지, 자수를 활용한 미술 작품을 만들고 있었다. 손녀가 외할머니의 작품과 삶을 선보이며 자랑스러워하듯, 하늘에 있는 스베틀라나 역시 자신을 이어 예술 활동을 하고 있는 손녀 아나스타시야를 기특해 하며 미소 짓고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마음이 뭉클해진다.
전선하 홍익대 미술학과 예술학전공 박사과정 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