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가이 알렉세이 이와노비치는 북조선 국가 역사의 첫 단계에서 가장 유력하고 영향력 있는 인물들중 하나이다. 그는 1908년 러시아 원동에서 탄생했다. 가족들은 하바롭스크에서 거주하였다. 료샤는 하바롭스크에서 청소년 때부터 생존을 이어나가기 위해 힘든 일을 하면서 가족들을 도왔다. 이미 열한살 때 료샤는 담배공장에서 부업을 하였고 다음 이발소에서 보조자로, 그 후에는 와인공장에서 3년동안 일하게 되었다.
1928년에 20세된 알렉세이가 블라디보스톡에 가서 직업동맹 학교에 입학했다. 2년동안 이 학교에서 공부한 알렉세이는 졸업한 후에 전련맹레닌공청동맹 원동변강위원회 비서로 일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4년간 이 직책에서 근무하였다. 다음 젊은 열성자는 끼네스마 도시로 이주하여 가서 구역공청동맹위원회 비서의 직책을 맡았다. 비교적 높은 직책에서 5년간의 사업년한은 알렉세이로 하여금 모스크바 전러농업대학에 입학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가정의 재정난으로 그는 일년후에 고향에 돌아와 공청동맹의 책임 직책을 다시 맡게 되었다. 원동에서 고려인들의 강제이주를 앞둔 그의 마지막 직책은 포시예트 구역공청동맹위원회 비서였다.
어떻게 보면 알렉세이의 운이 좋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스탈린의 <대폭적 테로>의 시대에 수많은 당, 소베트, 공청동맹 일군들이 꾸며낸 기소에 따라 총살당했거나 정치와 연관된 조항으로 수용소에 감금되었기 때문이다. 일부 자료에 의하면 알렉세이가 공산당에서 출당될 위험이 있었는데 다행히 <빠져나왔다>.
중아시아에 강제이주되어 온 허가이 알렉세이는 가정과 함께 양기율에서 살게 되었다. 1939년에 그가 공산당에 복당된후부터 구역당위원회 조직지도부 부장으로 일했으며 1941년부터는 니즈니치르치크구역당위원회 제 2비서로 일하였다. 그 곳에서 2년 근무한 알렉세이는 새 책임적 직책 즉 화르하드수력발전소 건설장의 공산당 중앙위원회 부비서로 임명되었다.
1945년에 알렉세이 이와노비치는 양기율 군사위원회의 모집에 따라 소련강점군 통역으로 북조선에 파견되었다. 알렉세이 이와노비치는 그 곳에서 호가이 (허가이)라는 조선 성명으로 일을 시작하면서 즉시 훌륭한 조직자적 및 교제적 능력을 시위했다. 이런 실력으로 그는 소련 군정민사부 (소군정)의 주목을 이끌었다. 거기에서는 직무 실행에 대한 심중하고 양심적인 태도를 여러 번 지적하였다. 소련에서 직맹사업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 그에게 북조선 직업동맹 운동을 조직할 것을 위임하였다. 실례로 그는 직맹 대회와 전원회의 사업조직, 직맹사업을 위한 지방 간부선택을 책임지었다.
당면 문제 해결에서 교제성, 정중성, 통달성이 알렉세이 이와노비치의 성격에서 특점이였다. 그는 소련관리들 사이에서도, 지방주민들 사이에서 위신이 높았다. 얼마 지나 소련 군정민사부는 그를 방금 창당된 조선공산당의 지도적 사업에 출장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이에 있어 그는 소련공민으로는 남아 있었으나 소련공산당원의 신분은 멈추게 되었다.
1946년부터 <호가이 동무>의 당 출세가 시작된다. 그의 첫 직책은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조직부 부장이였는데 이는 실지에 있어 청소한 당의 모든 실천적 사업을 지도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같은 해에 공산당이 새 인민당과 결합된후 알렉세이 이와노비치는 그당시 최고 당기관인 북조선 로동당 중앙위원회정치회 성원에 들어갔다. 이 새로운 정치적 구조에서 모든 당건설 사업이 그의 지도하에 있었다. 바로 그 년간에 그를 <당 사업 교수>라고 동료들이 비공식적으로 존칭하였는데 이것은 북조선의 다른 정치지도자, 소련붉은군대 전 대위 김일성를 초조케 하였다. 김일성은 당의 독재를 시도하였다.
1945년 9월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채택된 헌법에 따라 최고인민회의가 공화국의 최고기관으로 되었다. 호가이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거되었다. 동시에 그는 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의 임무를 수행하였고 정치회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조직 뷰로의 성원에도 들어갔다. 1949-1951년에 그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서기국을 지도했는데 서기국은 한반도의 북부와 남부에서 조선공산당원들을 형식적으로 지도하였다.
그 시기에 또한 허가이 알렉세이 이와노비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전 <소련 프락치야>의 비형식적 지도자이기도 하였다. 그는 소련고려인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재 소련대사관 일군들 사이에서 논의의 여지도 없는 큰 신임을 샀다.
존재하는 비공식적 자료를 본다면 알렉세이 이와노비치가 당 및 정부에서 높은 직책을 차지한 김일성 그리고 외무상 박헌영과 함께 <미국괴뢰> 이승만으로부터 남조선을 해방시킬 목적으로 습격할 계획을 꾸민 발기자 및 강구자들중 한 사람이였다.
전격전으로 남조선을 점령하려는 계획이 실패하고 유엔군 (여기에서 미군무장편대가 주요 역할을 놀았다)이 이 이승만을 지원하러 오자 평양에서는 장본인을 찾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이미 오래전부터 모스크바의 후견을 벗어나려고 꿈구었었다. 결국 김일성은 간책의 방도로 마치도 수많은 과오를 범했다는 구실하에 1951년 11월에 허가이 알렉세이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비서의 직책에서 해임시켰다. 예를 들어 허가이 알렉세이가 입당하는 자들에게 지나친 요구를 제기하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체계에서 유일민주조국전선의 역할을 과소평가한다는 등이였다.
알렉세이 이와노비치를 정부기관으로 전임시켰다. 그는 북조선 공업을 관리하는 부지도자들중 한 사람으로 되었다. 류혈전과 폭격의 과정에 실지에 있어 공업이 거의 다 소탕된 사실을 고려한다면 허 알렉세이의 권한이 아주 제한되어 있었다.
나라에서 위신이 있는 허 알렉세이에게 과오만이 아니라 큰 공로도 있었다는 것을 어떻게 좀 보이려고 1952년에 그에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최고 표창들중에서 국기훈장 제 1급을 수여하였다. 그러나 이 사정은 허가이 알렉세이에게 대한 김일성괴 그의 주위에 이미 모여든 아첨장이 그루빠의 태도를 조금도 변하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전에 북조선의 당, 국가 및 사회 구조에서 허가이 알렉세이의 사업을 높이 평가한 일부 소련대사관 직원들을 부추켜 그를 반대하여 나서게 하였다. 부정적 평정서를 정기적으로 모스크바로 보냈다. 그리하여 이제는 허가이에게 그가 자기의 사상-리론 수준을 높이기 위해 불충분하게 사업하며 대사관 일군들의 충고를 <무시하며> 조선로동당의 대중적 성격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기소를 들씌웠다. 그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기구 간부들과 기타 북조선 지도구조 일군들에게 <힘겨운>요구를 제기했다는 것이었다. 지어는 허가이가 마치도 마음을 완전히 터 놓지 않는 사람이고 자존심이 강하고 우쭐대고 음모를 꾸밀 수 있고 김일성과 위신있는 다른 지도자 – 박헌영 사이에 <쐐기를 박을 수 있다>는 말까지 하기로 약속했었다. 그 외에 한 소련외교관은 호가이가 지방 지도간부커녕 소련고려인들 사이에서도 위신이 없다고 보고하기도 하였다. 정부 부상의 새 직책에서 허가이 알렉세이가 마치도 수많은 과오를 범했고 <수령주의>와 <간책>의 경향이 있다는 것이었다.
김일성의 지지자들과 그들을 지지하는 일부 소련외교관들의 의견에 의하면 이 모든 것이 소련지도부의 앞에서 허가이의 부정적 형상을 들어내고 일정한 결론을 짓게 해야 하였다. 알렉세이 이와노비치를 소련으로 소환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도인데 그런 경우에는 알렉세이 이와노비치가 자신을 변명하기 위해 김일성과 그의 지지자들의 모험주의적 행동의 수다한 실례를 들을 수 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도자들에 대한 자기의 기소를 제기할 수 있었다. 아마도 이것이 그 시기에 모스크바에도, 평양에도 필요가 없었던 모양이였다.
복잡한 사태가 비극적으로 해결되었다. 공식적 설에 의하면 1953년 7월초에 허가이 알렉세이 이와노비치의 시신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건물의 그의 사무실에서 발견되었다. 마치도 그가 자살했다는 것이었다. 바로 이 정보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재 소련 대사관에서 모스크바로 전달되었다. 그러나 평양에서는 소련고려인 지도자가 김일성의 명령에 따라 아니면 그의 묵묵한 승낙하에 살인당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허 알렉세이 이와노비치의 친척들도 자살 설을 믿고 있다.
알렉세이 이와노비치의 사위인 이름있는 군사활동가, 조선인민군 장갑땅크군대 조직자 최 뻬.이. 장령은 그 비극적 나날에 김일성과 만나 호가이의 사망에 대해 그가 생각하는 것을 날카로운 형태로 다 말했다. 그는 곧 북조선에서 소련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소련에서 그는 군사출세를 계속하였다.
그 때부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도부는 이미 죽은 자기 반대자를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김일성의 지지자들은 자기 죄를 남에게 전가시켜 소련공산당 22차 대회 이후에 허가이 알렉세이가 자신의 개인숭배, 조선로동당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한해서 <해로운> 사업방법을 보급시켰다고 비난하였다. 당 및 국가 건설에서 허 알렉세이의 모든 공로를 김일성에게로 돌렸다. 김일성은 허가이 알렉세이가 사망한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최고기관에서 <소련프락치야>를 처음에는 약화시키고 다음에는 청산하는 투쟁을 시작하였다. 만일 알렉세이 이와노비치가 살았더라면 김일성이 벌을 받지 않으면서 그렇듯 급진적 방법으로 행동하지 못했을 것이다.
허가이 알렉세이의 가족들은 소련으로 귀국할 수 있게 되었다. 식구들은 누구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물질적 지지를 받지 않았다. 그들에게 허가이 알렉세이가 묻힌 곳도 알리지 않았다. 무덤을 방문할 허가를 받을데 대해서는 말을 꺼낼 여지도 없었다.
김일성과 그의 후계자들에 한해서는 허 알렉세이가 숨은 적이 아니면 보다 위험한 <프락치야 분자>로 남아 있었는데 이 프락치야는 북조선 인민앞에서 <위대한 수령>의 공로를 낮추면서 북조선의 정치무대에서 존재한 (1946-1953년) 사실 자체로도 위험했다는 것이다. 북조선에서는 독재자 즉 김일성의 마음에 들도록 역사를 파렴치하게 고쳐 쓰기 시작했다.
물론 허가이와 소련에서 북조선에 파견된 기타 소련고려인들이 어느 정도 도입한 스탈린의 와리안트로 된 소련 사업방법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적 체계에 준 효과성에 대해서도 판단할 수 있지만 허가이 알렉세이 이와노비치가 실지 경험을 토대로 하여 자기의 구상을 실천함에서 그의 성의, 정직성, 사심없는 태도에 대해서는 의심할바 없다.
이.엔.셀리와노브 - 역사학 박사, 교수,
꾸르쓰크 국립대 세계사 강좌장,
<21세기 국제관계> 과학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