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 11월초순에 자기 생일 82주년을 맞이한 리 꼬마 꼰쓰딴찌노위츠와 처음 만나게 된것은 거의 60년전 즉 1960년도에 내가 스웨르들롭쓰크 영화촬영소에서 시보영화촬영가로 일하던 시기였다. 크즐오르다 출신인 젊은 리 꼬마는 스웨르들롭쓰크음악대학 성악과 에서 공부하는 학생이였다. 바로 그 해 스웨르들롭쓰크시에 있는 수백명의 젊은 남녀학생들이 모인 우랄종합기술전문대학 강당에서 사회주의10월혁명을 기념하는 큰 명절행사가 있었고 성대한 음악회도 있었다.
시보영화촬영가인 나는 촬영과정에서 나에게 특별한 인상을 주었고 내마음을 몹시 감동시킨 한 장면이 있었다. 그것은 키가 그리 크지않은 고려인 음악대학생 리 꼬마였다. 그가 부른 노래는 ‘피가로’ 였다. 그가 노래를 끝냈을 때 관람석에 앉아 있던 젊은 남녀 학생들은 전원이 기립하여 오래동안 우렁찬 박수로 그를 환영했고 그에게 많은 꽃다발을 드렸다. 그후 여러 신문기자들이 그를 둘러싸고 그에게서 인터뷰를 받는 등 따라서 그는 아직은 훌륭한 러시아인 선생님들께서 배우는 학생이였지만 이름있는 성악가수로 성장하기 시작했으며 차츰 많은 고려인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1960년도 초기에 스웨르들롭쓰크로 오기 전까지 나는 1년중 12달이 겨울이고 나머지는 봄이며 6개월간은 태양빛이 거의 없는 아주 살기 험한 북극권의 도시 무르만쓰크 TV방송국에서 몇해 동안 일했다. 그후 스웨르들롭쓰크로 이주한 얼마후 처음으로 고려인 리 꼬마를 알게 된 것이다. 그와 고려말로 대화를 나누면서 처음부터 느낀것은 비록 초면이였지만 그는 마치 친한 벗을 대하듯 아주 따뜻하고 친절하게 나를 대하기 때문에 그의 인간성에 몹시 감탄했고 그 때 느꼈던 감정은 말로서 표현하기 어렵다.
특히 그의 집에 초청되어 10년만에 처음으로 먹은 된장국은 내고향의 어머니의 따뜻한 정을 느끼게 하였다. 차차 나날이 흐름에 따라 특히 휴일이면 스웨르들롭크시에 사는 젊은 남녀들이 리 꼬마의 노래를 듣기 위해 그의 집을 찾아왔고 그후 점심을 같이하고 헤여지는 일이 빈번했다.
얼마후에 리 꼬마는 자기만 부르는것이 아니라 노래를 좋아하는 그들에게 이미 우리 말로 번역된 소련 노래들을 우리 말로 가르치기시작했고 모이게 되면 우선 모두 합창을 하군 했다.
< 나의 조국 넓고넓은 나라 강하산림 전야도 많다. 사람들의 자유로운이 나라 다른 나라 나는 몰라라.모쓰크와에서 변강먼곳까지 남쪽에서 북극의 해여 이넓은 땅 주인공답게 사람마다 활개치누 나 …>
합창이 끝나면 모두가 이야기를 나누고 웃으면서 아주 즐겁게 나날을 보냈다. 앞으로 시일이 지나면 리 꼬마의 지도하에 고려인들의 훌륭한 합창단이 조직될수 있는 전망이 없는것은 아니였다.
세월은 흘렀다. 리 꼬마는 음악학교를 졸업하고 카자흐스탄 조선극장으로 배치받고 떠났다. 조선극장에서 리 꼬마는 자기 창작집단과 함께 알마따에서는 두말할것없고 해마다 소련의 여러 공화국들 그리고 고려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농촌들을 순회공연하면서 계속 노래를 불렀다.
고려인들이 많은 농촌야외무대에서 리 꼬마가 노래를 불렀을 때 거기에 모인 수백명의 관중들이 모두 일제히 일어서서 두손을 높이들고 그를 환영하였다. 그 주위에 있는 산천초목 들도 가수를 환영하는듯 했다 . 가는곳마다에서 열열한 환영을 받는 젊은 가수는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기쁨을 안겨주는 자기 직업에 크게 만족해 하였다. 리 꼬마를 잘 아는 고려인들은 우즈베끼스탄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어 떤 기념일이나 혹은 성대한 명절이 있었을 때 년금생활을 하고있는 리 꼬마 꼰스딴찌노위츠를 개별적으로 초청하는 일이 빈번하며 따라서 그는지금도 계속 고려인들앞에서 노래를 부르고있다.
생일전에 그는 여러 친구들앞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일생동안에 가장 인상적이였든것은 평양공연이였습니다. 우리 극장창작집단을 아주 따뜻하게 대했고 우선 역사박물관, 미술박물관 그리고 여러 유적지들을 찾아다니며 시내 관광을 했습니다. 다음으로는 금강산관광인데 그 아름다운 경치에 정말 감탄했습니다. 시내에서나 금강산에서나 할것없이 만나는 사람들은 우리를 아주 친절히게 대했 습 니다.
이윽고 평양대극장에서 공연이 시작되었을 때 내가 부른 노래는 <문경고개>였습니다.
가사의 몇 줄을 아래에 인용하는 바입니다. < 문경고개는 얼마나 높던가 , 오르면서 칠십리 내리면서 몇십리, 새벽부터 오르는 가벼운 안개는 힘겨워선가 무거워선가 높은 령 중턱에서 잠들고 말았다오… “ 이노래가 끝났을 때 관람자들이 일제히 일어서서 오랫동안 우렁찬 박수로 환영했습니다.얼마후 김일성 수령이 나타나 나와 악수를 하면서 다음번 평양공연을 오게 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훈배우 칭호를 수여하겠다고 말했습니다.나는 이말을 가슴깊이 간직하고 있으며 영원히 잊지 않을것입니다…
130여민족이 화목하게 사는 다민족국가 카자흐스탄에서는 고려인들 역시 나라의 인민경제의 여러 분야에서 성실하게 일하는 동시에 각자가 자기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다. 예로, 리 꼬마의 부친 리가이 꼰쓰딴찐은 크즐오르다주 <아바이>꼴호스에서 회장으로 일했는데 경리는 해마다 다수확을 거두었다. 1950년에 그에게 고상한 사회주의로력영웅 칭호가 수여되었다.
알마따에서 수십년동안을 같이 살았고 년금생활을 하는 리 꼬마 꼰스딴찌노위츠와 나는 여러 친구들과 함께 명절 때 마다 자주 모인다. 주로는 휴일을 이용하여 낚시대를 들고 캅챠가이호수 혹은 일리강변으로 떠난다. 그 어느 날이 였다. 갑자기 날이 찌프리고 바람이 시꺼먼 구름들을 몰아오기 시작했다.이윽고 바람은 심한 파도를 일으키고 폭풍우가 쏟아젔다. 이 때 나와 꼬마는 낚시에 걸린 큼직한 메기를 호수가로 끌어내기 위해 비를 맞으며 고무보트의 노를 계속 저었다. 그런데 얼마후 폭풍우가 멎었을 때 메기의 배를 따자 메기배속에서 위대한 조국전쟁참가자 훈장을 발견했든것이다. 그날 우리 낚시군들은 이 메기를 알마따 조국전쟁참가자들의 공동묘지에 매장하자는 리 꼬마의 의견에 모두 합의했다.
년금생활을 하는 우리 낚시군 일행은 전번에 경치좋은 일리강변에 모였다. 이른 아침에 천막에서 일어나니 심한 안개때문에 앞이 전혀 보이지않았다. 안개속을 뚫고 일리강변을 걸어가니 우리는 마치 대자연의 품에 안긴듯했고 그와동시에 우리는 이 대자연을 아끼며 보호할 의무감을 느꼈다.
아침식사가 끝났을 때 리 꼬마는 일리강변에서 이번에도 “ 청춘을 돌려다오 젊음을 다오, 흐르는 내인생의 애원이란다. 가는 세월 막을수는 없지않느냐 , 청춘아, 청춘아 어디로 갔느냐”라고 또 불렀다. 마치 창공에 높이 뜬 흰구름을 따라 계속 달리다가 문득 서서 뒤돌아보는듯 했다. 어느듯 고귀한 청춘은 그렇게도 빨리 흘러가버렸다. 그렇지만 자기 출생 82주년을 맞이하는 리 꼬마 꼰스딴찌노위츠는 훌륭한 나라 다민족국가 에서 근심걱정 없이 사는데 대해 카자흐스탄정부에 무한한 감사를 드리며 자기가 오늘날까지 노래를 부르며 살아온 일생을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다.
나는 그의 생일에 주로 캅챠가이호수와 경치좋은 일리강변에서 수년동안에 거쳐 낚시군일행이 낚시질을 하며 수영을 하며 물고기생선국을 끓이는 장면들을 포함한 많은 사실들을 비데오촬영했는데 그것을 그날 꼬마 꼰스딴찌노위츠에게 선물했다.
김종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