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5 호의 계속)
디아스포라 사회단체: 소련공산당 마지막 총비서 미하일 고르바쵸브의 <개편, 공개성, 민주화>라는 정치강령은 인종별로 사회단체를 조성할 수 있게 하였다.
결과 도처에 <민족문화센터>라는 명칭하에 소수민족 협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것은 민족 의식, 전통, 풍습을 재생시키며 다 사라져 가는 <모국어>를 되살리기 위한 상기 단체들의 정관의 첫 과업과 직접 연관되었었다. 모든 고려인 민족문화센터들이 같은 표준에 따라 형성되었으며 성장과 발전에서 비슷한 길을 경과하였다. 그들이 부닥치게 된 문제, 범한 과오도 비슷했으며 곳곳의 지도부들 사이에서는 비슷한 모순이 생겼고 현실적 성과와 결과도서로 별로 차이가 없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년령별로 조직된 사회단체들이 생겼는데 원로회 (고려노인, 노인단, 노인회), 청년클럽과 센터, 여성클럽, 과학기술협회 (안또크, 과학, 진보), 장교클럽, 창작인테리 협회가 그런 사회단체들이다. 취미에 따라 모이기도 하는데 이는 장기클럽, 합창단, 성악단, 무용단 등이다. 사회단체 활동의 첫 시기에는 모국어 크루쇼크가 많이 생겼다. 일부 사회연합들은 모국의 재정원조도 받았는데 게다가 처음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한국 두 나라에서 받기도 하였다. 한국과의 협조에 목표를 둔 전러소련고려인협회 (BACK) 와 친북한 단체인 조선통일협력 협회 (ACOK)의 대결 사연을 모두가 잘 알고 있다. 한국의 조직 및 재정 원조로 <독립유공자협회> (현재 <자손회>로 개칭)가 제정되었고 민주평통자문회 평의회, 태권도 그루빠와 사물놀이가 조직되었다.
러시아와 CIS 나라들의 다른 지역과 달리 사할린에는 공민권과 귀국 문제해결을 위한 민간 창발인 그루빠가 조성되었다. 박노학이 지도한 <카라후토 한인귀국 협회>, <주 사할린 한인 이산가족 사회단체>, <박노학 추억영구화 협회>, <사할린 한인 지역별 사회단체>를 실례로 들 수 있다.
사할린 한인들의 귀국문제 해결에서 대한민국 적십자회가 적극적 역할을 놀았는데 대륙의 고려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에서는 상기 국제적십자협회의 활동이 보이지 않는다.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고려인들의 수가 한국에서 급히 장성됨과 관련하여 그들의 입국과 연관된 날카로운 문제를 해결할 필요성이 나타났다. 이와 관련하여 한국정부는 고려인-노동이주민들을 적응시키는 자기 권한의 일부를 한국 비정부 기관들에 넘겨주고 그들의 활동을 융자하고 있다. 얼마전에 한국의 안산시에 첫 고려인협회가 나타나 첫 걸음을 내 디디고 있다. 오늘현재 한국에서 러시아어로 구사하는 고려인들의 다수가 사회망을 걸쳐 교제하는데 그중에서 가장 큰 그루빠 <82아웨뉴 우리 고려인들이 한국에서>에 106.815명 (2019년 8월 7일 현재)이 참가한다. 그루빠 참가자들의 기본 부분이 현재 한국에 있는 것이 예측되며 한국의 경외에 있으면서 이 그루빠에 들어갔거나 고려인이 아닌 참가자들의 몫은 확정되자 않은 것으로 남아있다. 사회망에는 <러시아어를 사용한다>그루빠 망이 많이 올라 있는데 이에 있어 러시아어로 구사하는 안산, 인천, 광주, 서울, 부산 기타 도시들이 지적되었다. 상기 공동체의 콘텐트는 테마가 아주 제한되어 있고 주로 무역, 광고 그리고 생활상 성격을 띤 질문과 답이다.
정보 공급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사할린 귀국자들 사이에서의 교제가 아주 제한되어 있다. 그들의 나이가 많고 많은 귀국자들이 건강상태로 잘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 그 원인이다. 사할린 귀국자들 다수가 고립된 생활을 하는데 그들의 자식들과 친척들이 다 사할린에 남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할린을 그리워하며 한국에 힘들게 적응하고 있다.
모국 (역사적 조국) 과의 관계. 국제관계에서 디아스포라의 역할이 현재 의심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그리고 모국과의 협조에서 가교와 중개자로서의 디아스포라의 역할은 연구와 토론의 주목을 이끄는 테마들중 하나로 되여 있다. 이와 관련하여 대륙의 고려인들과 사할린의 한인들의 중재의 집단적 형태와 디아스포라 엘리타 즉 가장 영향력 있고 애국심이 강한 대표들의 중개에 차이를 두어야 할 것이다.
<프로레타리 국제주의의> 정책을 실시한 소련에서는 한국과의 관계에 대해 말할 여지도 못되었다. 때문에 사할린에 거주한 한인들을 비롯한 소련의 고려인들은 오직 북조선과만 부득이 연계를 맺게 되었다. 대륙의 우수한 고려인 몇백명이 형제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사회주의 건설에 참가했다는 사실이 지금에 와서는 비밀이 아니다.
소련과 대한민국간에 접촉을 하려는 시도는 고르비쵸브의 개편과 노태우 대통령의 <북방정책>이 선포됨에 따라 시작되었다. 다음 소련이 붕괴되고 사회주의 나라 동맹이 파탄된 후에 구 소련의 자주국가들이 한국과 공식적 관계를 수립하려고 서둘렀다. CIS의 나라들 우선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나라들에 한국 대사관이 열림에 따라 모국과의 대륙 고려인들과 사할린 한인들의 관계가 해마다 발전되어 갔다. 최근 30여년간에 구 소련의 고려인들은 <외국의 고려인 빨갱이들로부터> 모국의 품에 안긴 동포들로 되었다. 일련의 사정과 원인으로 한국에서 대륙의 고려인들의 수가 장성될 것이 명백하다. <해외동포들>의 4세에 속하는 아이들은 모국에서 장기간 살면서 적응되고 ….하고 다음 한국시회에서 귀화하고 동화하여 대한민국의 떳떳한 공민들로 될 것이다.
정체성과 사고방식: 오늘현재 CIS에는 정체성과 사고방식으로 보아 서로 차이가 있고 유사점이 있는 두 아인종 디아스포라가 형성되었다고 확언할 수 있다. 디아스포라로서 대륙의 고려인들과 사할린의 한인들에게는 인종적 및 민족적 정체성이 특유한데 많은 척도로 보아 그것이 서로 차이가 나지만 당초의 핵심 – <민족성>을 포함하고 있다. 대륙의 고려인들도, 사할린의 한인들도 우선 자신을 하나의 한인인종으로 간주하면서 <남과 북에 사는 사람들도, 한반도의 경외에 사는 사람들도 우리는 다 한인들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둘째로 그들은 오직 공민권 소속 즉 다시 말해서 자기의 페스포드에 따라서만 차이가 있다고 보고있다. 하긴 러시아의 대륙 부분과 사할린 섬에서 그들이 같은 공민증 – 러시아 공민증을 가지고 있지만 디아스포라의 자체의식에는 차이가 있다. 개별적 수준에서는 이상에 지적한 세가지 정체성에서 우월권이 각이할 수 있다. 이 경우에는 그루빠적 (디아스포라) 자체의식에 대한 것이 아니라 개별적 정체성에 대한 것이다.
디아스포라의 인종적 자체의식의 구조적 요소의 의의와 역할은 역사-정치적 사태의 특성, 규합, 주위의 인종의 특성에 따라 변한다. 모국의 경외에서 거주한 오랜 역사를 가진 디아스포라는 인종-차별적 징조가 주로 의식, 풍습, 예식과 혼합된다. 실지에 있어 디아스포라에 소속되는 사람들은 전통적 가정의식, 생활문화 그리고 고대 민족명절의 나날에 다른 디아스포라와의 차이를 특히 절실히 느끼게 된다.
대륙의 고려인들과 사할린 한인들의 사고방식은 한민족의 공동의 역사적 및 사회문화 발전을 근거로 하고 있다. 그런데 19세기 하반기에 러시아의 원동에 온 이주민들 그리고 20세기의 30-40년대에 카라후토에 오게 된 자들의 역사적 운명에서의 차이는 두 아 인종 그루빠의 사고방식에서 발산과정의 시초를 닦아놓았다. 그와 동시에 공산주의 건설자의 하나의 법칙, 소베트사상, 도덕 원칙, <소베트 공동생활 규칙>에 따른 생활은 대륙의 고려인들과 사할린 한인들간의 일부 차이를 없앴다. 그런데 일제통치가 사할린 한인들의 사고방식에 영향을 주었다는 의견이 아직까지도 존재하고 있다. 때문에 사할린 한인 1 세의 성격이 소련 령토에서 현저한 정도 <일본화된> 것으로 남았다고 간주하고 있다.
소련이 붕괴된 후 지난 근 30년 동안에 열강의 페허에 나타난 자주국가들이 변화와 발전의 각이한 길을 경과했다. 이는 고려인 디아스포라 존재의 여러가지 조건을 조성했으며 그들 사이에서 발산과정을 계속하게 했다. <러시아>, <우스베키스탄>, <카자흐스탄> 고려인이라는 용어를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것이 습관으로 되기도 했다. 그리고 카자흐스탄의 고려인들은 이웃 국가의 자기 동포 – 고려인들을 <우스베크> 또는 이와 반대로 우스베키스탄 고려인들이 카자흐스탄에서 거주하는 고려인들을 <카자흐>라고 칭하는 것을 자주 들을 수 있다.
사할린 한인들을 여전히 <고려사람들>을 자기의 동아리에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서술한 내용을 총화지으면서 대륙의 고려인들과 사할린의 한인들 사이의 구별이 아직도 지워지지 않았다는 결론을 지을 수 있다. 게다가 서로 다른 나라에서 거주하는 대륙의 고려인들 사이에 금이 가는 일도 있었다. 때문에 몇십년 후에 대륙의 고려인들의 아 인종 디아스포라에 대해서가 아니라 <러시아의 고려인 디아스포라>, <카자흐스탄고려인 디아스포라>, <우스베키스탄고려인 디아스포라>라는 말이 나올 수도 있다. 그런데 이것이 아직은 가정이니 논증된 과학적 증명이 필요하다.
박승이 간주하는 바에 의하면 사할린 섬에서는 현시 고려인 디아스포라가 <지방>, <대륙>, <북조선> 그루빠로 나뉘지 않는다. 현재 디아스포라에서 문화변용 과정이 거의 끝나가고 있다. 왜냐 하면 3-4세가 러시아화되었으며 모국어와 인종문화의 많은 요소들을 잃었기 때문이다.
김 게르만 – 역사학 박사,
교수, 카자흐국립대 한국학 센터 소장,
일본 쿄토대학교 동남아시아 연구센터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