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조국전쟁 참전자인 최 찌혼 루끼츠에 대한 약전이 <위대한 조국전쟁에 참가한 소련고려인들>이라는 책에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그 책에 이용된 자료외에 보관소 자료들, 장학봉의 책 <북조선을 만든 고려인 이야기> (서울. 경인문화사) 중에서 그에게 대해 쓴 글이 상기 책에 들어가지 못했다. 이 중요한 원천외에 최 찌혼이 손으로 쓴 자서전의 사본이 저의 손에 들어왔다. 본 기사에는 저의 개인보관소에 있는 사진과 타스켄트에서 김 블라지미르 나우모위츠에게서 받은 사진들을 처음으로 공개하는 바이다.
중요한 부분부터 정확화하기로 하자. <위대한 조국전쟁에 참가한 고려인들>책에는 최 찌혼 루끼츠가 1904년에 쁘리모리예에서 태여났다고 지적되었다. 그런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상주하며 1955년 12월 7일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소련대사관 영사처에 등록되어 있는 명단 (로련대외정치 고문서, 폰드 0102, 목록 11, 공문서 42, 철 64, 52페이지)에는 <최 찌혼 루끼츠: 생년월일: 9. X1.1913 원동변강, 수찬구역; 페스포드 № 117 КОПК 017. 장학봉의 책에는 생년월일이 1913년 9월 (11월이 아니라) 9일로 지적되었다. 자서전에는 오직 탄생 년도만 즉 1913년만 적혀있는데 나의 계산에 의하면 이것을 옳은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태여난 달에 차이가 있는 것은 한 경우에는 음력달력의 날자로 쓰이고 다른 경우에는 그레고리우수력으로 쓰인것과 연관되어 그럴수가 있다.
자서전에는 최 찌혼이 소년 때에 자립적으로 부모의 집을 떠나 우크라이나의 오데싸시로 갔다고 지적되었다. 그 곳에서 중학교를 필한 다음 오데싸 농업대학에 입학했다. 다른 자료에 의하면 <최 찌혼이 1929년에 원동에서 그의 사촌 형이 살고 있는 하리꼬브로 이주하여 <세르프 이 몰로트> (낫과 마치)공장에 로동자로 취직하여 일하면서 라브파크 (로동자를 위한 예비대학)에서 공부하였다. 다음 오데싸 토지정리 대학을 졸업했다>. 알게된 바에 의하면 오데싸에는 이런 대학이 없었다.
그가 쓴 자서전에 의하면 <대학을 필한 후에 그는 우크라이나 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쳤다. 위대한 조국전쟁이 시작되자 그는 소련군대에 징병되어 제 14저격사단에 파견되어 포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이것은 어긋나는 부분이 확실하다. 왜냐 하면 중아시아로 강제이주되어야 할 <불온건한>고려인을 현역 붉은군대에 징병하여 더군다나 지휘관의 직책을 주어야 할 특별한 원인이 없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아래의 자료를 옳은 것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대학을 필한후에 그는 끼예프 포병전문학교 학생으로 되었다. 민족성의 원인으로 1937년에 학교에서 퇴학되었다. 1941년까지 즉 4년간 오데싸주 노보아르한겔쓰크 구역에서 수학교사로 일했다. 여기에서 그는 여교사 왈렌찌나 가스뽀렌꼬와 결혼하여 그들사이에 아들이 태여났는데 그를 블라지미르라고 불렀다.
전쟁 초기에 최 찌혼은 로농 붉은 군대에 징병되었다. 전문 군사지식을 소유한 그가 포병중대를 지휘할 수 있었는데 그는 제 14 윈니쯔끼 근위포병사단 대전차포 지휘관으로 되었으며 그 후에는 총사령부 제 1 예비 포병사단을 지휘하였다. 그는 근위하사로 우크라이나, 헝거리, 폴스카,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벌어진 전투에 참가했다. 최 찌혼은 베를린 점령에도 참가하였다. 찌혼은 위대한 조국전쟁을 압스트리아에서 끝냈다. 그는 폴스카 해방전에 참가하여 영웅성을 발휘했으며 파시스트 땅크를 반대하는 전투에서 능숙하게 행동한데 대해 <명예>전투훈장 3급으로 표창되었다.
전승 이후 최 찌혼이 복무하는 사단이 압스트리아에 주둔하고 있었다. 1945년 6월 초에 하사를 모스크바로 호출했다. 권위있는 기관 일군들이 그더러 군사아카데미야에서 공부할 생각이 없는가고 물어보았다. 그런 소원이 없다고 대답하자 블라디보스톡으로 가라고 명령했다. 찌혼은 여기에서 통역원 학교로 가느냐 아니면 군대복무를 계속하느냐 이 두가지중 하나를 또 선택해야 하였다. 그는 군대복무를 계속하기로 했다.
1945년 9월에 최 찌혼은 제 1 원동전선 제 25군 참모부 정찰부의 성원으로 관동군으로부터 조선을 해방하는 전투에 참가했다. 이 공로로 그는 <조선 해방전>메달로 표창되었다. 평양주재 소련군사행정 지도부는 해방된 조선의 38선 이남과 이북에서 정당들간에 대결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련행정부는 조선주민들을 유식하게 선전하는 것을 아주 중요한 과업으로 보고 있었다. 이 원인으로 군사정찰부에서 복무하던 최 찌혼을 특별히 창간된 신문 <소베트 신보>신문사로 파견하였다. 그는 이 신문사에서 1946년부터 1954년까지 근무했다. 말이 났으니 말인데 그와 함께 다른 소련고려인들도 선동 및 해석 사업을 하였다. 명 드미뜨리 월보노위츠 교수가 회상하는 바에 의하면 그의 부친 명월봉이 조선전쟁이 끝난후에 상기 신문사에서 일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필요가 없는 원인으로 1955년에 이 신문이 페간되었다. (명 데.웨. ( 노트와 펜을 들고. – hups://koryo-saram.ru/s-bloknotom-i-ruchkoj/) 이 기사를 쓰는 과정에 <소베트 신보>의 여러 부수가 모스크바에 있는 러시아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여 있다는 것이 알려졌다. 이 신문에서 우리의 테마 <소련고려인들이 북조선에서>에 관한 자료가 앞으로 탐구될 것이다.
최 찌혼이 전선에서 싸우면서 중상을 입어 겨우 죽음을 면했던 1943년에 그의 안해 왈렌찌나 가스뽀렌꼬가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 블라지미르는 친척집에서 자랐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 홀아비인 찌혼 루끼츠는 평양에서 북조선 아가씨 조애자와 결혼하였다. 조선에서 그들 사이에 딸 둘 – 옐레나 (1947년생)와 따마라 (1954년생) 그리고 아들 둘 – 뾰뜨르 (1948년생)와 유리 (1950년생)가 태여났다.
최 찌혼 루끼츠는 1955년부터 시작하여 소련으로 귀국할 때까지 제 6호 학교에서 교무주임으로 일하면서 상급반에서 수학을 가르쳤다. <6고> 또는 <6고중>으로 알려져 있는 이 학교는 북조선에 파견된 소련사절들의 자식들을 위해 조직되었다. 학생들의 다수가 우스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에서 간 고려인들의 자녀들이었다. 1950년대 후반기에 돌기 시작한 <사상적 숙청>의 맷돌에 소련고려인들이 다 휘말려 들어갔다. 최 찌혼도 예외가 아니였다. 한번은 그를 호출하여 아래와 같은 질문을 하였다: <왜 소련신문과 소련 책만 읽습니까?, 허 가이 (허 알렉세이 이와노위츠), 박창옥, 박의완, 남일 기타 사람들과 어떤 관계였지요?, 어떤 목적으로 학생들에게 소련에서 사회주의의 우월점에 대해 이야기 합니까?>. 압력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탄압의 구름이 짙어지는 것을 보는 찌혼 루끼츠는 1957년에 평양주재 소련대사관에 귀국을 허가해 달라는 신청서를 올렸다. 그런데 그와 마찬가지로 거의 모든 소련고려인들이 귀국하기를 원했다.
최 찌혼 루끼츠는 소련에 귀국한후 타스켄트에 안착하여 여러 기관들에서 일했다. 은퇴를 앞두고 몇 년간 <골로드노스쩹스트로이>기관에서 책임 경리로 근무했다. 가정에는 식구들도 많았다. 첫 안해와의 결혼에서 태여난 아들 블라지미르가 타스켄트로 이주해 왔다. 두 전쟁의 참전로병, 전투 훈장과 메달로 표창된 근위하사, 수학교사, 전설적인 <6고중>학교 교무주임 찌혼 루끼츠는 은퇴한 후에도 적극적 생활을 계속하였다. 장학봉의 말에 의하면 전쟁 및 로동 원로는 날마다 신문을 읽었고 70세까지 가까운 곳에 있는 타스켄트 시구역 칠란사르의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수학을 가르쳤다.
사진: 최 찌혼 루끼츠가 안해 조애자와 함께.
1993년이 왔다. 구 소련의 고려인들이 북조선을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평양에서 태여났으며 남편과 우스베키스탄에 온 후에 한번도 모국에 가 보지 못한 찌혼 루끼츠의 안해 조애자는 칠순이 되는 해에 살아 있는 친척들 (부모들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과 만나보기를 몹씨 원했다. 부부는 36년이 지나서 청춘시절이 흘러간 곳에 다시 가 볼 수 있게 되었다. 북조선을 다녀온 후 6년이 지나 최 찌혼 루끼츠는 가족들의 곁에서 숨졌다. 고인은 타스켄트의 공동묘지에 모셔져 있다.
김 게르만 – 역시학 박사,
알-파라비명칭 카자흐국립대 한국학 연구소 소장,
교도 (일본) 동남아시아 연구센터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