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제국 원동의 카사께위체워 촌에서 1913년 6월 5일에 태여난 남 야꼬브 뻬뜨로위츠는 1950-1953년 조선전쟁 시기에 온 세계에 알려졌다. 그당시 그는 조선인민군 총참모장이였고 개성에서 있은 평화조정 회담에서 북조선의 주요 대표였다. 그는 1946년에 남일이란 이름을 가지고 통역으로 북조선에 왔는데 그후에 지방 사회정치 생활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야꼬브는 빈농의 가정에서 태여났다. 가정에는 야꼬브 위로 형이 세명이 있었다. 야꼬브가 태여난후 일년이 지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네명의 자식을 거느리고 홀몸이 된 어머니는 살아가기 위해 그 애들의 도움을 받으며 부업을 하게 되었다. 야꼬브는 소베트정권 시기에 워로실로브 시에서 이미 9학년을 졸업하고 1930년초에 역시 이 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였다. 2년동안 수학교사로 일한후에 똠스크 국립대학에 입학하여 1939년에 성과적으로 대학을 필하고 <기계사-이론가> 졸업증을 받았다. 재정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에 야꼬브는 학업을 똠스크의 한 학교에서 수학교사의 일과 겸했다. 1937년에 그의 모든 친척들을 원동에서 중아시아로 강제이주시켰기 때문에 야꼬브는 로련 인민교육위원부에 의해 침켄트교원대학 수학교사로 파견되었다. 그는 이 대학에서 근무하면서 과학연구 사업에 몰두하여 정든 똠스크 대학에서 <이론 기계학>이란 테마로 학사논문을 통과시켰다. 그런데 생활은 그의 계획을 바꾸어 놓았다. 이 시기에 이르러 야꼬브는 이미 가정을 이루고 자식도 둘이 있었다. 그는 과학사업을 계속하기 위해 1941년에 카자흐스탄에서 우스베키스탄으로 이주했는데 우스베키스탄인민교육위원부의 결정에 의해 까르시 중학교에서 교무주임으로 부득이 일하게 되었다.
이 직위에서 실력을 보인 야꼬브 뻬뜨로위츠는 우스베크소베트사회주의공화국 인민교육부의 지도적 직위에 추천되었다. 그가 까스카다리인스크 주인민교육부 부부장의 직책에서 근무하였을 때 <위대한 조국전쟁 시기에 헌신적 로동>메달을 수여받았다.
이 시기에 그는 재혼하여 1945년에 딸애가 태여났다. 가정생활은 또다시 평탄하지 못했다. 그래서 1946년에 북조선에 가서 일할 통 역을 모집했을 때 야꼬브 뻬뜨로위츠는 안해와 의논도 하지 않고 평양으로 떠났다. 그는 같은 해 5월에 이미 소련공산당에 입당하였었다. 평양에서 그는 같이 근무하는 박 마리야 아르쎈찌예브나와 재혼을 했는데 마리야는 야꼬브와 함께 중앙아시아에서 평양에 왔었다. 그들 사이에 낳은 아들을 후에 소련으로 공부하러 보냈다.
남 야꼬브 (이제는 그에게 남일이라는 조선 이름이 주어졌다)는 소련군사행정부에서 보통 통역으로 오래 근무하지 않았다. 그의 비범한 조직자적 실력과 그 시기로 보아 비교적 높은 지식정도에 주목을 돌렸다. 그리하여 33세의 소련출신 남 야꼬브는 처음에 북조선인민 교육위원회 간부교육부 부장으로 임명되었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형성된 후에는 교육성 부상의 직책을 맡았다. 그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제 1기 대표로, 집권하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성원에 선거했다. 그가 북조선에 오기전에 자기의 당증을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에 보관해 달라고 두고 옴으로서 실지에 있어 소련공산당에의 소속을 중지하였기에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의 성원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평양에 온 야꼬브는 기타 많은 소련고려인들과 마찬가지로 소련공민으로 남아있으면서 입당하게 된 것이다.
1950년에 조선전쟁이 시작되었다. 남일의 생활에는 형식적 논리의 견지에서 본다면 놀라운 사건들이 일어난다: 군사활동의 경험이 전혀 없고 대학의 군사강좌에서 얻은 지식만 가진 예비군 하사를 조선인민군 참모장으로 임명하여 그는 장령이 된다. 모스크바에서 작성된 그의 개인정보철에 의하면 이것이 정치적 의미를 띤 임명에 가까웠는데 우리는 그 동기를 이해하기가 어렵다. 이런 경우에는 보통 <우연한 기회였다>고 말한다. 군사 지식과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남일이 그 어떤 군사행동도 지휘하지 못했던 것이 당연한 일이다. 중국과 북조선 장령들이 이 일에서 남일을 대신하였다. 그런데 1951년부터 시작하여 그에게는 군사외교 분야에서 자신의 장점을 발휘할 가능성이 나타났다. 그 당시에 작성된 한 평가서에는 강한 의지, 완강성, 결단성, 대담성, 창발성 그리고 좋은 조직자적 능력과 같은 그의 개인 품성이 지적되었다.
1953년 여름에 군사작전이 끝날 때까지 남일은 미국과 그의 동맹국들의 회담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중화인민공화국 합동대표단 사업을 지도했으며 고명한 정전협정을 서명하였는데 그 협정이 오늘날까지 효력을 내고 있다.
사진 2. 남일이 조선전쟁 총화에 관한 정전내용에 서명하고 있다.
소련에서도 남일에 대해 알게 되었다. 소련 중앙 신문과 잡지들에는 정전위원회에의 남일의 참가와 사업에 대한 자료들이 정기적으로 실렸다. 예를 들어 그 시기에 특파기자였으며 후에 유명한 작가가 된 알렉산드르 차꼽쓰끼가 소련에서 인기있는 잡지 <오고뇨크>에 남일에 대해 좋은 기사를 썼다. 기자는 <오고뇨크>잡지와 인기있는 미국잡지 <라이프>에 개성에서 있은 회담에 남일이 참가한 사진들을 많이 게재하였다.
전쟁이 끝난후에 남일은 새로운 책임적 직책에 임명되었다: 외무상으로 임명된 그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 당 및 국가 지도부의 성원에 넣었다. 남일은 1953년 9월에 있은 김일성의 소련 두번째 공식방문시에 김일성과 동행하였다. 이것은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전원회의에서 니끼따 세르게예위츠 흐루쇼브가 중앙위원회 제 1 비서로 선거되었던 시기였다. 남일은 1956년까지 소련공민으로 남아있었으며 김일성이 소련고려인들에게 공민권을 확정하라고 단호히 제의했을 때에라야 자기의 운명을 모국과 완전히 연결하였다. 남일의 이 행동을 <배신>으로 간주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모스크바에서는 이것이 문젯거리로도 되지 않았다. 왜냐 하면 크레믈리는 자기의 공민들을 북조선에 파견하면서 소련영향의 전도자로 그들이 북조선에 <무기한>체류할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민족주의적 기분을 가진 김일성과 그의 측근자들의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 김일성과 그의 가까운 전우들은 1955년부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주체사상에 근거한 새로운 정치체계 건설에 대해 공개하였다.
1956년 2월에 있은 소련공산당 제 20차 대회가 남일의 금후 행동과 김일성과의 그의 접근에서 큰 역할을 놀았다. 북조선 지도자는 모스크바의 초대를 받았으나 아마 불길한 예감이 들었든지 대회에 가지 않았다. 스탈린의 개인숭배 폭로는 스탈린이 살아있을 때 김일성을 <스탈린과 꼭 닮은 인물>로 만든 모든 북조선 지도부의 심중한 우려를 불러일으켰다. 김일성에게는 모스크바의 지나친 후견을 벗어 날 동기가 생겼다. 이 면에서 남일이 김일성을 도와야 하였다. 한반도의 북부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함에서 지탱할 인물이 바로 김일성이라는 것을 우선 모스크바에 설득시켜야 하였다. 그래서 남일이 이 일에서 성공했다. 그는 얼마간 망설임끝에 주로 소련과 중국에서 온 조선 정치가들로 이루어진 야당과의 투쟁에서 김일성을 지지했다. 이것이 1956년 9월에 특히 뚜렷이 나타났다. 그 때 아나스타스 미꼬얀과 변두후아 원수를 수위로 하는 소련공산당과 중국공산당 대표단이 초대도 받지 않고 평양에 왔다. 그들은 김일성으로 하여금 이에 좀 앞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정권을 박탈당한 앞잡이들을 지도적 직책에 복직시키도록 하려고 계획했다. 김일성의 <세기의 소용돌이에서> 회상록 제 8권에 내포된 정보에 의하면 바로 남일이 미리 전화를 걸어 당과 국가 정권으로부터 김일성을 밀어내려는 음모자들의 시도를 알리였다. 북조선 지도자는 잘 준비하여 결국에는 기회주의자들 자체가 해직되었다. 물론 이에 대해 김일성이 어느 정도 생의 마지막 날까지 남일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김일성은 소련출신의 고려인들이 임의의 시각에 그를 난처하게 만들 수 있다고 간주하였기에 완전히 믿지는 않았다.
소련대표단 단원 – 우스베키스탄공산당 중앙위원회 제 1 비서 엔.아.무힛지노브의 회상담을 본다면 남일이 그 외에 소련 및 중국 대표단의 방문 과정에 그와 같이 높은 급의 관리에 있어서 전례없던 일 즉 조선어 통역의 역할을 담당했기에 김일성이 옳으며 그의 반대자들이 옳지 않다는 것을 설득시키려고 온갖 시도를 다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일은 당 및 국가의 높은 직위에 남았다. 1970년까지 그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회 성원에 들어 있었고 1959년부터 시작하여 생의 마감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부수상들중 한 사람으로 근무하였다.
남일이 참사한 1976년 교통사고에 대해 모순되는 글들이 많았다. 그러나 북조선 출판물의 공식적 보도를 본다면 김일성이 직접 남일의 장례식에 참가하였으며 그의 이름이 새겨진 화환을 고인의 관 곁에 세워두었다.
온 세계에 남일로 알려진 소련고려인 남 야꼬브 뻬뜨로위츠의 생이 이렇게 끝났다.
간단히 맺는 말
대중보도수단에서와 마찬가지로 인터넷에서도 남일에 대한 자료를 많이 볼 수 있다. 그 자료들은 우선 남 야꼬브 뻬뜨로위츠의 자필 이력서와 러시아 중앙보관소에 보관되여 있는 남일의 개인 정보철에서 얻은 자료에 근거한 본 기사의 자료들과 많이 차이난다.
예를 들어 러시아어와 영어 위키백과에 나와 있는 이력서를 본다면 그것이 옳은 정보를 준다기보다는 반대로 혼돈시킬 수 있다. 일부 필자들은 남일이 일제 강점시기에 마치도 조선에서 태여났으며 위대한 조국전쟁 시기에 붉은 군대의 대령으로 스탈린그라드 부근에서 싸웠다고 지적되었고 다른 원천의 <사실>을 본다면 그가 어느 한 때 우스베키스탄 사범대학 학부장이었고 그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원수가 되었다는 것이다. 일부 사이트에는 남일이 타스켄트보병학교에서 공부하였다고 쓰면서 지어 동창생이나 같이 복무한 사람들을 찾아보려는 시도도 하고 있다.
왜 이렇게 혼돈시키는가 하는 질문이 스스로 생긴다. 북조선으로 떠나기전에 남일이 작성한 앙케이타를 본다면 그의 친형이 전선에 나가서 싸웠다고 지적되었는데 남일에 대해 글을 쓰는 사람이 혹시 혼돈하여 그릇된 정보를 내 보냈을 수 있다. 우리가 상상하는 바에 의하면 나머지 모든 것은 의심스러운 센세이슌에 탐욕을 내는 기자들과 평론가들의 허구이다. 그 허구가 없이도 남일의 생이 불안한 20세기의 소용돌이에서 흥미있고 교훈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고리 셀리와노브 – 역사학 박사,
교수, 꾸르스크국립대 역사강좌장,
<20세기 국제관계> 과학실험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