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아베총리가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를 통한 ‘한국무릎꿇리기’와 반역사적인 망언으로 인해 그 어느때 보다 한일 갈등이 고조되고 있는 요즘, 연해주에서는 일제강점기 당시 해외항일독립운동을 주도한 최재형선생의 기념비가 현지에 세워졌다. 이를 계기로 최재형을 비롯한 연해주와 만주일대에서 벌어진 광범위한 항일독립운동가들의 활동들이 다방면으로 조명되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더불어 일제가 독립운동을 와해시키기 위해 잔인한 토벌과 함께 얼마나 간교한 술책들을 자행했는지도 함께 알려져야 할 것이다.
특히, 최재형 선생이 검거되어 총살당한 1920년, 연해주에서는 일제의 총칼에 의해 부녀자와 어린아이까지 무참히 학살당한 ‘4월참변’을 비롯하여 1932부터 37년까지 동만주 항일세력내부에 밀정을 침투시켜 서로를 불신하게 만듦으로써 독립투사들이 밀정으로 오인받아 학살당하게끔 한 ‘민생단 사건’ 과 1937년 연해주 거주 동포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당하게 만든 직접적 원인을 제공한 일제의 연해주 침략야욕들이 좀 더 소상히 알려져야 할 것이다. 본지에서는 그 어느 해보다 의미있는 광복절에 즈음하여 연해주 항일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의 증손녀인 최 따찌야나 찌모페예브나 신임 카자흐스탄독립유공자후손회장을 만났다. 알마티고려문화원에서 만난 그녀의 입을 통해 최재형은 어떤 분이었는지? 그리고 그녀가 이끌게 된 ‘카자흐스탄독립유공자후손회’는 어떤 단체인지와 함께 항일독립운동가들의 수난의 가족사와 신임회장으로서의 포부를 들어보았다.아래는 인터뷰 전문이다.
- 먼저, 신임 카자흐스탄독립유공자후손회장이 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 감사합니다. 막중한 책임감 때문에 여러 차례 거절을 했습니다만….. 회장직을 수락한 만큼 열심히 봉사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문재인 대통령의 카자흐스탄 방문을 앞둔 지난 4 월, 저는 독립유공자후손회를 이끌어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작년에도 제안을 받았는데, 내 자신의 사업이 바쁘기 때문에 수락할 수 없다고 거절했었습니다. 그후 재차 독립유공자후손회를 이끌던 임원들이 거듭 부탁을 했을 뿐 아니라 우리 공관에서도 요청을 해 왔기에 수락을 하였습니다. 그때 저는 계봉우 선생의 자손인 계 이리나씨를 추천했습니다만, 그녀는 조직을 관리하거나 경영한 경험이 없다면서 완강히 거절했습니다.
- 회장을 맡으시고 매우 바쁜 일정을 보내고 계신 것 같습니다?
- 네, 지난 7 월 18 일 공식적으로 회장이 된 이후 첫 사업으로 우리 단체를 재등록해야 하는 과제가 생겼습니다. 최근 카자흐스탄의 정치사회적 환경변화에 따라 불가피하게 일부 정관을 수정하여 카자흐스탄 법무부에 우리 단체를 재등록하게 되었습니다. 단체명이나 정관에 ‘독립’이나 ‘투사’ 등의 단어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인데요, 한국어 직역하면 ‘자손’재단 이라는 명칭으로 재등록을 진행중에 있고, 현재 거의 마무리단계에 있습니다. 한국이름으로는 계속해서 독립유공자후손회라고 불려지겠지만 현지 기관에 등록된 명칭이 이러하다는 것입니다”
- 그런 속사정이 있었군요. 단체등록이 조속히 마무리되기를 바라구요, 본격적인 인터뷰로 들어가겠습니다. 회장님이 아시는 증조 할아버지 최재형은 어떤 분이셨나요?
- 제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저는 최재형의 딸인 저의 할머니 최 나제즈다 를 통해서 약간 전해들은 것이 전부입니다. 물론, 최재형에 대해서는 항일독립운동사를 전공한 한국의 역사학자들이 더 많은 것을 알고 있겠죠. 제가 아는 것은 그런 분들의 지식에 비해서 너무나 보잘 것 없는 것이여서…."
- 물론, 저도 인터뷰 직전에 최재형 선생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았고 회장님을 인터뷰하는 한정된 시간내에는 도저히 소개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독립운동가였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 최재형 선생의 항일독립운동에 대해서는 따로 제가 잘 요약을 해서 인터뷰지면과 별개의 지면에 소개토록 하겠고, 회장님이 맡으신 ‘카자흐스탄 독립유공자후손회’에 대해서 먼저 여쭈어 보겠습니다.
- 원래 이 단체는 러시아(모스크바와 연해주 지역)와 카자흐스탄에 흩어져 사는 독립유공자후손들이 단체결성의 필요성을 제기한 1995년, 모스크바에서 공식 창립되었습니다. 이후 98년, 카자흐스탄 독립유공자후손회가 러시아에서 분리되었습니다. 이때 유명한 음악가였던 정추, 카자흐국립대 철학교수였던 박일, 카자흐스탄의 유명한 판사였던 최재형의 딸 엘리자베타, 황운정선생의 아들, 황 마이 공훈체육인, 이동휘의 손녀였던 이 류드밀라 등 여러 독립유공자후손들이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정추선생이 초대회장을 맡았고 2001년부터는 계니꼴라이 회장이 우리 단체를 이끌었습니다. 계회장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2017년 부터는 안 스타니슬라브가 2년의 임기를 마쳤고 올해부터 제가 회장을 맡게 된 것입니다. 우리 단체는 매년 삼일절 행사와 11월17일 순국선열의 날 행사를 주관하면서 동포사회내에 민족의 정체성을 고양하고 항일독립운동의 역사를 차세대에게 알려주기 위한 다양한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
- 카자흐스탄에는 독립유공자후손들이 대략 몇 명쯤 살고 있습니까?
- 카자흐스탄에는 현재 약 500 명의 독립유공자 후손들이 살고 있고, 그 중 절반은 알마티와 아스타나에 살고 있습니다. 물론 알마티에서 주로 살고 있죠. 최재형의 후손들만 해도 카자흐스탄에 77 명입니다.”
- 현재 러시아독립유공자후손회를 이끄시는 최 발렌틴회장도 최재형의 후손이지 않나요?
- 네 맞습니다. 손자이지요. 현재 최재형의 후손들은 카자흐스탄과 러시아를 비롯하여, 캐나다에도 살고 있습니다. 최재형은 슬하에 11명의 자녀를 두었어요. 그래서 후손들이 많고 사는 지역도 거의 전세계에 살고 있다고 봐도 됩니다.”
- 올해가 삼일운동 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인 만큼 독립유공자들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때보다 높은 것 같습니다. 특히, 최근 우리 대법원의 강제징용배상 판결을 문제삼으면서 독립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일본 아베정부의 조치들과 망언들이 이어지는 요즘에는 더욱 더 항일독립운동가들의 삶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현재 한국에서는 국민들은 자발적으로 일제불매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일본의 이번 무역보복을 통한 도발은 일본 극우들이 아직도 한국을 과거 자신의 식민지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전국민이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또한 내부적으로 누가 친일행위를 하고 있는지? 지식인이라고 불리우는 일부 인사들의 이번 사태에 대한 논평속에 친일파의 논리가 어떻게 교묘히 숨겨져 있는지도 우리 국민들이 다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국민들은 과거 일제강점기 처럼 당하지는 않겠다는 결의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 그래서 올해의 광복절은 그 어느해보다 의미가 깊다고 생각이 되는데, 카자흐스탄의 광복절 행사는 어떻게 진행되었는지요?
- 8월 15일은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날입니다. 카자흐스탄 동포들은 매년 이날을 성대히 기념해 왔습니다. 올해도 동포들이 고리끼공원에 모여서 ‘한국문화의 날’이라는 이름으로 일제로부터 해방되던 순간의 기쁨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알마티고려문화중앙회 산하 문화단체들과 고려극장의 전문 예술인들이 꾸민 공연이 있었습니다. 특히, 한국에서 온 손병휘 서울 민예총 이사장이 이날 공연에 함께 참여하여 더 의미있는 무대가 되었습니다.
- 지난 4월에 계봉우, 황운정 선생의 유해가 국내로 잘 봉환되었습니다. 그때 홍범도 장군의 유해 봉환은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현재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말씀해주십시오?
- 지난 문재인 대통령의 카자흐스탄 방문시에 “봉오동 전투 100주년인 내년에는 홍범도 장군 유해를 봉환했으면 좋겠다”며 관심을 부탁했고 이에 대해 토카예프 대통령은 “양국 관계와 국민 간 교류 등을 감안해 내년까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직접 챙기겠다”고 답했기 때문에 차질 없이 진행될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봉환된 계봉우, 황운정 의 경우 아시다시피, 계학림, 황마이 라는 직계 아들이 자신들이 너무 연로하니 더 이상 묘소관리가 어려울 뿐 아니라 한국에서 우리의 애국영웅들을 어떻게 모시는지를 잘 보았기 때문에 흔쾌히 국내봉환에 대해 동의를 했던 데 반해, 홍범도 장군의 경우 두 아들과 부인이 모두 일본놈들의 총에 죽었기 때문에 그런 청원서를 쓸 후손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희 독립유공자후손회가 동의서를 대신 쓰게 되었고, 저를 포함한 독립유공자 후손들이 지난 봄에 한국을 다녀오면서 한국정부가 항일독립투사들의 후손들을 챙길려고 한다는 강한 확신을 가졌습니다. 홍범도 장군의 유해 봉환은 내년까지는 마무리 될 것으로 예상되고, 또 앞선 경우와 같이 유골들은 먼저 화장을 위해 러시아로 이송시킨 다음 다시 여기로 가져와서 한국으로 나가게 될 것입니다.”
- 독립유공자후손회의 기존활동 외 새로운 활동 계획은 ?
- 차세대들이 우리의 역사적 뿌리를 잊지않고 잘 보존하기 위해 우리 단체가 더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미 우리의 차세대들은 국제화되어 있고 솔직히 한국과 한국의 역사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청소년들이 보다 더 한국과 한국문화에 대해 호기심을 가질 수 있도록 다양하고 입체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봅니다. 젊은 세대들이 유튜브를 통해 K-POP에 관심을 가지면서 조금씩 한국을 알아가고 급기야는 스스로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공부하거든요. 이를 위해 우리는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를 통한 활동을 더욱 적극적으로 하기 위해 도메인을 구입했으며, 홈페이지를 새롭게 꾸미고 있습니다. 독립투사들의 영웅적인 이야기를 게시하고 독립유공자후손회의 활동을 신속히 업로드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동포사회내에서 좀 더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함께 모이고, 카자흐스탄과 한국간의 교량 역할을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양국간 의료협력이나 물류, 경제, 문화 교류에도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역할을 해 나갈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카자흐스탄에 있는 한국 대사관과도 더 밀접한 협력관계를 유지해 나갈 것입니다.
- 이제는 회장님의 개인이력과 가족사에 대해서 좀 여쭤보겠습니다.
- 저는 1951 년 7 월 25 일에 태어났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최재형의 손녀입니다. 당시 거부였던 최재형의 딸로 태어난 할머니가 독립운동을 하던 남편(김 이반)이 총살당하게 되자 재혼을 하게 되고, 이때 홀로 남게 된 어머니는 매우 궁핍하고 고난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37년 어머니는 당시 고려인 동포들이 그랬던 것 처럼 중앙아시아로 이주당하게 되었는데 어머니는 홀로 우랄스크로 이주당했습니다. 당시 출생 증명서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그러나 어머니는 공부를 잘해서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고, 대학 4 학년이 되었을 때 할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아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대학에서 추방을 당하는 불운을 겪었습니다. 당시 고려인들에게 딱지 붙여졌던 것 처럼 ‘인민의 적’의 딸이자 손녀라는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최재형의 손녀라는 사실 때문에 졸업을 앞둔 시점에서 졸업장도 받지 못하고 학교를 떠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어머니는 교사를 하던 아버지를 만나 저희 5남매를 낳으셨고 저는 그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의 노력 덕분에 모두가 잘 공부했으며, 항상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교육이라고 믿었습니다. 우리가 학교를 마칠 수 있었던 방법은 바로 형제들이 열심히 공부 하여 장학금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언니는 토목분야 엔지니어이고 , 형부도 토목기사 이며. 여동생인 엠마는 현재 아스타나에 살고 있는데, 모피 및 가죽 제품을 만드는 엔지니어이고 언니 류드밀라는 육류 및 유제품 및 제과 공정의 엔지니어입니다.
저는 경제학을 전공한 경제학자입니다. 저는 1971 년 대학생 대표로서 브레즈네프 소련공산당 서기장으로부터 우수 메달을 받기도 했습니다. 1976 년 모스크바에 있는 건설 경제 연구소에서 대학원 과정을 다녔습니다. 건설 관리 조직 경제학을 전공했습니다.이후 오랫동안 국립 경제 연구소, 즉 KazGASA에서 일했습니다. Kazakh State Architecture and Civil Engineering의 아카데미라고 불리는 이곳에서 저는 경제와 건설 조직을 가르쳤습니다. 저는 선임 연구원으로 일한 후 건설 경제 부서장으로, 현재는 KazNIISA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스타나시에 있는 국립동식물 검역원, 국립심장센터 등은 제가 몸담고 있는 기관에서 진행했었습니다. 카자흐스탄이 시장경제로 체제이행을 본격화하던 90년대 중반 저는 감정평가회사를 설립했는데, 카자흐스탄에서 팔린 모든 것을 평가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때 동포기업인들이 카자흐스탄의 기업이나 부동산을 매입하려할 때 저는 매우 기뻤어요. 사유화 대상 목록에 세부 정보에 접근할 수 있었던 저는 가능하면 우리동포들이 이 과정에 많이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랬습니다. 저는 이때 최 유리 전 상원의원(전 고려인협회장)를 알게 되었습니다.
- 끝으로 한국정부에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 먼저, 한국정부와 국민 모두에게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짧은 기간에 발전을 이루어 냈고, 경제와 의학,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괄목할만한 성장을 달성했기 때문에 우리는 늘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전통을 계승해서 다음 세대에 잘 물려줄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독립유공자 후손들 중에는 거의 절반이상이 연금생활자이거나 실업자들이지만 큰 활약을 펼치는 후손들도 있습니다. 더불어, 우리는 동포 어린이들이 모국을 알아가고 모국의 어린이들과 서로 연락하기 시작할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싶습니다. 어린이들 스스로 관심을 가지고 접근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들이 스스로 호기심을 갖기 시작하면, 조상들이 겪은 일, 그들이 겪은 시련에 대해서 알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말하고, 스스로 녹음하고, 유튜브에 올리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청소년들이 한국 음악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데, 이렇게 음악, 문화, 역사를 통해 언어를 공부하기 시작했을 때에 비로소 진정으로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 장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인터뷰, 정리 : 김상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