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에서 거주한 한인들은 수와 의의로 보아 균형이 잡히지 않은 세개의 그룹으로 나뉘었었다: 첫 그룹은 고려인들, 둘째 그룹은 사할린 한인들, 셋째 그룹은 귀국하지 않은 북조선인들이였다. 소련에 남아서 살기를 원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민들은 극소수인데 몇십명으로 예상되여 있다. 본 기사에서 북한인들이 연구대상으로 되지 않는데 그것은 그들의 수가 적어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1930-1990년대에 소련 고려인들에 대한 책, 논문, 논설이 적지 않게 발행되었을 때 사할린 한인들에게 대한 자료들이 적었다. 고르바쵸브의 <개편, 공개성, 민주화가>시작된 때로부터 고문서에 보관되여 있는 서류들에 대한 금지가 취소되고 제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항복한후에 남부 사할린에 남은 한인들의 역사를 연구할 가능성이 나타났다. 복시코우 (박수호)가 발행한 논설, 소책자들 그리고 <한인들이 사할린에서> (1993년)라는 책이 사할린의 한인들에 대한 첫 발표물로 되었다. 아.떼.꾸시나, 박승의, 유.이.진 및 기타 러시아, 한국, 일본 연구자들의 작품에 의해 사할린 한인들의 특이한 역사적 운명 그리고 그들이 부닥치게 된 많은 문제들이 발표되었다.
고려사람 (현재 고려인이라고 칭하는)들의 역사는 150여년이 되지만 소련에서 사할린 한인들의 과거와 현재 러시아에서 그들의 역사는 두배나 짧다. 그런데 고려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사할린 한인들도 새로운 공동체 – 소베트인민 형성의 같은 단계를 겪었다. 처음에는 그들 사이에 유사성 보다도 차이가 더 많았다. 물론 40여년 (1945-1990년) 기간에 그 차이가 많이 사라지고 소련붕괴에 이르러 기본 사회문화 척도로 보아 같게 되었다. 그런데 과학계, 미디어 그리고 보통 의식에는 <대륙>의 고려인들과 사할린 섬의 한인들로 여전히 나뉘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에 있어 그들 사이에 차이가 왜 그리고 어떻게 생겼으며 오늘의 생활에서 유사성이 어디에 있는가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다. 질문이 아주 많은데 거기에 대한 답은 없다. 바로 그러기 때문에 구 소련의 이 두 인종그룹을 비교적으로 분석할 아이디어가 생긴 것이다.
서언. 본 논문을 쓰게 된 원인들중 하나는 아카데미 문학, 대중보도수단 그리고 일상용어에는 소련에서 거주한 한인인종에 대한 용어 (명칭과 자칭)들이 많기 때문에 혼돈시키는 것이다. 자주는 소련에 거주한 모든 한인들을 통달아 소련 꼬레이쯰 (한인들)라고 칭했다. 그런데 실지에 있어서 <소련꼬레이쯰>란 어결은 사할린 한인들을 비롯하여 소련공민증을 가지고 있던 모든 한인들을 칭하는 집합명사이다. 각이한 역사적 시기에 이용한 한인 일부 그룹 (출생지, 거주지, 공민권, 언어, 신앙이 다른)의 명칭이 비교적 많다: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한인들, 러시아 한인들, 중앙아시아 한인들, 대륙의 한인들, 사할린 한인들, 고려사람들, 한인들, 한인 디아스포라, 카자흐스탄 한인들, 우스베키스탄 한인들, <깝까스 한인들>, 정교신자 한인들, 강제이
주된 한인들, 한인이주민들 및 기타.
본 논문에서 두 디아스포라 그룹의 차이와 유사성을 확정하는 방도로 대륙의 고려인들과 사할린의 한인들 간의 역사적 및 사회문화적 차이를 비교하여 널리 분석하려고 처음으로 시도해 보는 것이다.
각이한 역사적 시대와 러시아제국과 소련에 소속되는 정치-법률상 조건이 그들 사이의 차이점의 기본 원인으로 된다. 대륙의 고려인들과 사할린 한인들의 공간-시대의 척도에서 바로 그것이 불균형의 조건을 붙인 것이다. 통례로 복잡한 대상의 분석은 그것을 몇 부분으로 나누어 분석하게 한다. 때문에 상기 두 한인 그룹의 비교적 연구는 아래의 관점에 따라 구성된다: 역사-인구학적, 법률적, 경제적, 인종문화적, 인종언어적, 사회구조적 및 국제적 관점이다. 그러면 첫번째 관점부터 보기로 하자.
이주역사의 시대 구분. 연해주와 남부 사할린으로의 한인들의 이주역사에서 우선 비동기성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땅을 잃은 조선농민들이 1860년대 중순에 러시아의 원동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이미 알려져 있는 한인들의 이주역사에 깊이 파고 들지 않고 이주가 1920년 말까지 계속되었다는 것을 지적하는 바이다. 그 시기에 튼튼해진 소베트정권이 자국 영토로 들어오는 이주민들을 막기 위해 국경을 공고화할 수 있게 되었다.
사할린의 한인들은 자원적으로 섬에 이주하여 왔다. 후에 그들을 탄광과 공장에 강제적으로 동원하였다. 일본식민주의자들은 1930년초부터 1945년까지 수만명의 한인들을 사할린 섬의 남부 – 카라후토에 싣고 왔다. 부양자가 없이 조선에 남은 가족은 사할린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소련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간 협조의 범위내에서 1946-1949년에 근 2만 6천명의 북조선인들이 사할린에 동원되었다. 그들은 주로 어업에 종사하였다. 그들중에서 거의 1만 4천 5백명이 귀국하고 나머지는 사할린주 주민들에 합류되었다. 1945-1949년에 45만명의 이주민들이 대륙에서 섬으로 이주했다. 그들중에는 카자흐스탄과 중아시에서 온 고려인들도 있었다. 그들의 수가 근 2천명에 달했다. 사할린으로의 한인들의 대폭적 이주가 이것으로 중지되었다.
이주민들의 배치도. 원동의 대륙부분에 온 한인이주민들은 처음에 총 면적이 165천 평방키로메터되는 연해주에 거주지를 정했다. 다음 자원적으로 또는 강압적으로 이주 분포권이 하바롭스크변강, 쁘리아무리예, 사바이깔리예, 북부 사할린까지 6밀리온 평방키로메터 이상 확장되었다. 1937년도 강제이주는 고려인들을 총 면적이 3백만 평방 키로메터 되는 카자흐스탄과 중아시아에 이주시켰다. 전후에 2,5천명의 고려인들 (가족과 함께)을 카자흐스탄과 우스베키스탄에서 북조선과 남부 사할린으로 특별 출장을 보낸 것은 임시나마 소련의 경외에서 대륙의 고려인들의 거주지역을 확대하였다. 가속적 집중화, 고본지라는 명칭으로 알려진 도시 주민들이 농사를 짓는 반합법 기업활동, 소련군대에서의 의무적인 복무, 종합대학과 대학들에서의 학업은 지구촌의 6분의 1이 되는 지역에서 고려인들의 거주지역을 확장하였다.
사할린의 한인주민들은 1970년까지 3만6천 평방키로메터의 면적 (사할린의 총 면적은 7만 6천 평방키로메터) 의 거주지를 떠날 수 없었다. 엄격히 제한된 거주지역, 섬의 생활양식, 다수 소련고려인들로부터의 격리는 사할린 한인들의 사회문화 생활양식과 법적 권한의 특점을 보존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인구:대륙의 고려인들의 수는 150년을 내려오면서 상시적으로 증가하였는데 고문서 서류와 인구조사 자료들이 이것을 확증하여 준다: 1895년 – 18400명; 1905년 – 28500명; 1923년 – 103.482명; 1929년 – 150.795명; 1939년 – 182.339명; 1959년 – 313.735명; 1970년 – 357.507명; 1979년 – 388.926명; 1989년 – 438.650명.
1893 - 1937년에 사할린의 북부 (러시아 다음은 소련)에 북부 사할린 한인 그룹이 형성되었는데 그들은 대륙의 고려인들과 마찬가지로 카자흐스탄과 우스베키스탄으로 강제이주되었다. 1959년부터 시작하여 전러 인구조사는 사할린에 거주하면서 소련공민증을 받은 한인들도 명단에 넣었다.
사할린 한인들의 수에 대해 말한다면 사할린에서 거주했으며 현재 거주하고 있는 사할린 한인들을 구분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CIS의 대륙부분에 자리잡은 사할린 한인 1, 2세와 한국에 귀국한 한인 1세를 념두에 두는 것이다. 사힐린 한인 수가 1951년에 가장 많았는데 거의 4만 3천명에 달했다. 후에 그 수가 차츰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상세한 부분에 파고 들지 않고 그저 지적한다면 섬의 남부가 소련영토에 합병된 후로부터 현재까지 한인수가 절반이상 (2019년에 26,4천명까지 ) 줄어 들었다. 사할린에서 태여났으나 섬의 경외에서 거주하는 사할린 한인 수는 계산하기가 어렵다.
이동 과정. 대륙에 이주한 한인들은 여러가지 형태와 방법으로 섬을 떠났다. 이주 마다가 독립적으로, 전문적으로 연구할 테마로 될 수 있다. 거주지를 확대하고 농촌 환경을 도시의 환경으로 바꾸는 것이 소련에 사는 한인들의 이동의 기본 관점이었다.
최근 몇년 기간에 <대륙의 고려인들>의 수가 한국에서 8만 5천명까지 달했다. 이 사실은 경제적 원인으로 설명된다: 한편으로는 지연되는 경제감퇴, 수입수준의 현격한 저하, 생활의 질 악화, 실업장성 등이다. 다른 편으로는 로동력에 대한 수요, 돈을 벌 가능성 그리고 고려인들에게 <재외동포들을 위한> 비자 F-4와 취업비자 H-2 를 내주는 것이 고려인들을 이끈다. 돈을 벌기 위해 한국에 들어오는 고려인들의 수가 계속 증가되며 본국에 다시 돌아가는 고려인들의 수는 소수이다. 아마도 임시 노동이주가 이른바 상시적 거주처로 되는 모양이다.
소련 시대에 사할린 한인들의 생활은 <농노권>을 상기시켰다. 젊은 사할린 한인들이 소련공민증을 받은 후에라야 대학에서 공부하기 위해 소련의 다른 지역으로 갈 수 있었다.
일본, 한국 그리고 부분적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로의 귀국이 사할린 한인들의 이동에서 특점으로 되었다. 소련시대에 일본이나 한국으로 보낼 것을 요구하는 사할린 한인-열성자들을 강압적으로 사할린에서 쫓아버린 사실이 있었다. 북조선으로 그들을 추방한 것은 자기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투사들을 처벌한 것으로 되었다. 모스크바, 서울, 일본 간 합의의 결과 1990년 중순부터 시작하여 사할린 한인 1세가 한국으로 귀국하기 시작했다. 년로한 사할린 한인 총 4천여명이 귀국하였는데 오늘날에 이르러 그중에서 천여명이 선조들의 땅에서 사망했다. 사할린 한인들의 귀국은 거의 끝났다. 그것은 건강상태로 자리를 뜰 수 없는 극소수만이 남았기 때문이다. 20-25년이 지나면 귀국한 사할린 한인들이 한국에서 생을 마감한다는 것을 슬픔을 안고 지적하게 된다.
인구학적 지표로서의 민족간 결혼. 1960년부터 시작하여 기타 민족 대표들과의 결혼이 대륙의 고려인들 사이에서 인종-인구학 과정의 중요한 요인으로 되었다. 그런 결혼의 몫이 십년마다 장성되어 1980년도 말에가서 알마아타에서 근 40%를 차지하였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소련시대 전에 사할린 한인들과 일본여성의 결혼이 드물지 않았다. 이것은 사할린 한인으로 하여금 가족으로서 전후 귀국을 할 가능성을 주었다. 대륙의 고려인들과 달리 사할린 한인들은 주로 자기 민족끼리 결혼을 하였다. 오직 1970년 말에 가서야 타민족과의 잡혼이 나타났으며 사할린 한인들과 대륙의 고려인들이 결혼하는 것이 보통 일로 되었다.
법률상 권한. 소련공민증을 가진 것이 1945-1980년대에 대륙의 고려인들과 사할린의 한인들간 차이의 기본 표준들중 하나로 되었다. 위대한 조국전쟁이 끝날 무렵에 가서 카자흐스탄과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된 성인-한인들이 실지에 있아 다 소련공민증을 가지고 있었다. 대륙의 고려인들은 1937년 전에 이미 소베트화 과정을 경과했으며 전쟁시기에는 자기의 헌신적 로동으로 소베트 정권에 대한 충직성을 확증하였다. 그리하여 <믿지못할 민족>이라는 딱찌를 벗어났다. 러시아어를 훌륭히 소유하고 지식정도가 높으며 조기 및 지도 사업의 실력이 높으며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공산주의 리상에 대한 충성은 사할린 한인들을 소베트화하기 위해 대륙의 고려인의 큰 그루빠를 출장보낼 근거로 되었다. 특별 츨장에 파견된 대륙의 고려인들은 사할린의 생산, 교육, 문화, 내무부와 기타 모든 분야에서 지도적 직위를 차지했다. 사할린에 온 소련고려인들의 권한은 그들의 지도하에 일한 사할린 한인들의 권한보다 훨씬 높았다. 바로 그 시기에 <큰땅베기>라는 말이 나왔는데 사할린의 한인들은 고려인들을 멸시적으로 이렇게 불렀다. 사할린의 한인들 중에는 1970년도 말까지 <무국적>한인들이 몫이 비교적 컸다. 그들을 보통 <베게스니끼>라고 부르기도 했다.
1985년에 31.664명의 사할린 한인들중 20.522명이 소련공민증을 가지고 있었고 11.259명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민들이였고 9.883명이 무국적으로 남아있었다. 러시아 통계국의 자료에 의하면 섬에서 항인수가 26,4천명이였고 그들중에서 러시아 무국적을 가진 한인들이 거의 없었다.
로동활동. 러시아 원동으로 이주한 한인들은 지방 자연-기후 조건에 적응하여 그들이 습관돤 농업을 계속했다. 그러나 필요한 경우에 그리고 가능성이 나타나면 다른 일도 하였다. 고려인들이 강제이주후에 농업을 계속 하였는데 그런데 조건이 달랐다. 그들은 꼴호스에서 일했다.카자흐스탄과 중아시아에서 소련 고려인들은 그들이 훌륭한 농사군이라는 확증하였다. 그들은 우선 벼, 야채, 수박참외 그리고 목화, 옥수수, 케나프와 같은 기술작물 재배에서 기록적 수확을 거두었다. 농촌에서 도시에로의 집약적 이주와 관련하여 1960년대에 소련고려인들 사이에서 농산업자들의 몫이 현저히 줄었다. 1970-1980년대에 도시에서 사는 대륙고려인들이 생산, 후생봉사, 교육, 과학, 문화 기타 여러 분야에서 일했다. 소련시대의 최근 몇십년간에 육체적 로동을 하는 고려인들의 비중이 줄고 정신적 로동을 하는 고려인들의 수는 증가되었다. 고등지식을 소유하고 전공한 분야에서 근무하는 적지 않은 고려인-시민들이 1960-90년대에 이상에 지적한 고본지로 일했다는 덕을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소련이 붕괴될 무렵에 대륙의 고려인들이 사회활동의 모든 분야에서 높은 지표와 결과를 달성하여 모범적 <민족그루빠로> 되었다.
일본의 카라후토 현으로의 한인들의 대중적 이주는 일제 군수공업 종합체의 탄광, 제조소와 공장에서의 로동과 직접 연관되었다. 다시 말해서 대륙의 동포들과 달리 처음부터 공장과 제조소, 채광업 및 건설장에서 일하였다. 그런데 그들은 주로 지식정도가 낮고 땅이 없는 농민 출신들이었다. 때문에 굶주리던 어려운 시기가 닥쳐오자 사할린의 고려인들이 농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섬에서 식량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소베트 정권은 사할린 한인들이 섬에서 농사를 짓고 터밭에서 자래운 농작물을 시장에서 파는 것을 허가했다.
이와 같이 대륙의 고려인들이나 사할린 한인들에게 있어서 전통적인 농업이 물질적 부, 근면한 한인들의 긍정적 이미지 형성의 기본능 이루었고 소련 붕괴 이후 시장경제에 들어가는 과정을 수월하게 한 경험과 숙련을 주었다.
인종문화 과정. 모국의 각이한 지리상 지역에서 출신한 원인으로 대륙의 고려인들과 사할린 한인들 사이에는 처음부터 생활문화에서 차이가 있었다는 것을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일제 식민주의 정권의 동화정책, 자연기후 조건, 주위에 러시아인들이 다수인것, 한반도와 거리가 가까운것, 소련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간 친선적 관계와 같은 요인이 남부 사할린에서 한인들의 인종문화 발전에 본질적 영향을 준 것이다. 분리되고 집합된 거주지역은 인종내부 관계의 집약성을 미리 결정한 것이 물론이다.
(계속)
김 게르만 – 역사학박사, 교수, 카자흐국립대 한국학센터 소장,
일본 교토대학교 동남아시아 연구센터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