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옥을 소련강점 시기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역사의 초기에 북조선 지역에서 사업한 <소련고려인들>의 영향으로 보아 허가이 알렉세이 이와노위츠 (호가이)다음의 두번째 고려인으로 당당히 간주할 수 있다.
박창호는 1939년부터 1943년까지 크슬오르다주의 교육체계에서 각이한 직책에서 근무했으며 1941년에 전러공산당에 입당하였다. 2년후에 그는 카자흐스탄공산당 치일리구역 당위원회 선전부 부장으로 전임되었다.
1944년에 박창호의 전기에서 새로운 단계가 시작되었다. 그는 만주 빠르찌산 부대에 파견되었다. 소련특무부는 처음에는 동북 중국에 거주하는 평화로운 한인 주민들 사이에서 사업을 진행하기 위해 그 후에는 그리고 그곳에서 중국인들과 함께 일본강점자들을 반대하여 싸우는 한인무장편대를 돕기 위해 1920년대부터 이런 방법으로 일하기도 하였다. 전투작전에 참가한데 대해 박창옥은 위대한 조국전쟁 제 2급 훈장과 <일본 전승>메달로 표창되었다.
1946년 (다른 자료에 따르면 1945년에)에 박창옥을 북조선에 파견했다. 그 곳에서 그는 방금 창립된 조선로동당에 입당하였으며 당 중앙위원회와 조직 뷰로 위원으로 되었으며 1953년에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정치뷰로) 성원에 들어갔다. 북조선의 고급 당-국가 지도자들중 한 사람으로서 그의 10년간 출세가 이렇게 시작되었다.
1946년부터 1949년까지 박창옥은 북조선의 중앙 당기관지인 <로동신문> (소련<쁘라우다>신문과 유사한) 총주필로 사업했으며 다음 2년간은 선전 및 선동부 부장으로 근무했다. 박창옥은 1951-1953년까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비서로 사업했는데 이것은 해임된 허가이 알렉세이 이와노위츠 (호가이)가 차지했던 직책이였다. 믿을만한 정보를 본다면 재능있는 이 두 지도자들 사이에는 북조선에서 내부정치 사태에 대한 시각이 다르고 각자마다의 자존심으로 하여 상시적으로 충돌이 생기군 하였다. 호가이의 위신과 정치적 영향이 컸기 때문에 간책의 경험이 많은 김일성은 보다 <약한> 박창옥을 비밀리에 도와주면서 자기의 이익을 위해 호가이와 박창옥이가 다투도록 만들었다.
그 시기에 박창옥이가 김일성에게 얼마나 가까워졌던지 김일성은 자기 발언과 논설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쓰는 것을 경험있고 자격수준이 높은 박창옥에게 맡겼다. 김일성이 1950년 여름에 남한을 침습하는 계획강구에 박창옥을 끌어들였다는 정보가 있다. 그의 역할이이와 같은 철저한 대책의 선전적 보장 조직으로만 제한되지 않았을 것이다.
1953년에 호가이가 사망한 후에 <중국야당파>의 비형식 리더인 최창익이 박창옥의 기본 반대자로 되었다. 모두가 잘 알고 있는 <분리시커 놓고 권력을 행사하라>는 원칙을 지침으로 삼는 역시 김일성이 당내부 투쟁에서 그들을 충돌시켰다고 간주할 모든 근거가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소련과 공산주의 중국의 영향을 약화시키기 위해 문자 그대로 마주치게 한다는 것을 거의 노골적으로 적대시하는 <소련고려인들>과 < 조선족들>이 알았던가? 아마 그 순간에 그들이 몰랐을 것이다. 바로 이 사정이 <숙명적인 과오>로 되었다.
1953년에 고위급 당 기관에서 개편이 있은 후에 박창옥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의 직책을 차지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 훈장인 제 1급 국기훈장으로 표창되었다. 이 단계에서 김일성은 박창옥에게 대한 <특별한> 호감을 계속 보여주었다. 박창옥에게 있어서 보기에는 유리한 것 같은 사정이 <소련파벌>에 대한 김일성의 계획과 함께 곧 본질적으로 바뀌였다.
1955년 4월에 박창옥은 그가 맡았던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조직-당 사업부에서 해임되어 내각 부수상과 국가계획위원회 부위원장의 직책에 전임되었다. 그 당시 현실에서 이와 같은 전임은 직책을 그저 현저히 낮추었을 뿐만 아니라 <소련당파>의 립장의 전반적 약화의 지표로 되었다.
이 시기에 이르러 고려인들 다수가 평양주재 소련대사관을 방문하지 않았다. 김일성의 정체에 충성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일까 두려워 하였기 때문이다. 김일성이 그들에게 공민권을 확정하라고 제의했을 때 일부가 소련공민증을 거절하였다. 이 문제에 들어가서 박창옥은 예외를 이룬 소수에 속했는데 곧 그로 하여 보복을 받게 되었다.
1955년 12월에 진행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은 박창옥의 활동을 공개적으로 비판하였다. 아주 <상당한> 동기를 찾아냈다. 그것은 그의 과거의 활동에서 찾아낸 것이다: 북조선의 문화를 잘 지도하지 못했고 집권정체에 정치적으로 충성을 하는 문학가, 과학활동가들의 창작을 무시했다는 것이였다. 이것은 물론 구실이다. 실지 원인은 훨씬 깊었다.
바로 이 시기에 김일성은 북조선의 새로운 주체사상을 기본적으로 공개하였다. 주체사상은 맑스-레닌주의의 <계급적>공리와 본질적으로 모순되었다. 박창옥을 비롯하여 스탈린의 사상으로 교양을 받은 많은 소련고려인들은 이 모든 것을 아주 조심스럽게 받아들였다.
이제는 김일성의 발언을 다른 사람들이 썼다. 그들 다수는 친쏘 기분을 가진 자들이 아니였다. 김일성의 새 보고작성자들중 하나이며 그의 총신인 김창만은 오래전부터 박창옥에게 적의를 품고 있었다. 때문에 북조선 역사의 일부 연구자들은 바로김창만이 <주체>라는 술어를 연구해 냈고 이 학설을 초창기에 강구해 냈다고 쓰고 있다.
얼마지나 박창옥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의 성원에서 내 보내고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의 임무에서 해임시켰다. 이전에 허가이 알렉세이 이와노위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김일성의 부탁에 따라 소련대사관 직원들이 박창옥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얼마전까지만 하여도 박창옥을 <당파 활동과> <반당 정책에서> 오직 긍정적으로만 평가하던 소련대사관 직원들은 아무런 근거가 없이 그를 비난하였다. 비난은 그의 개인 품성도 건드렸다: 마치도 관료주의, 거만성,무례한 언동, 북조선 지도일군들에 대한 모욕적 태도가 그의 사업에서 특징이였다는 것이였다.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는 이 모든 <성격평가서>를 1945년부터 작성한 박창옥의 개인 문서철에 꼼꼼히 모아놓았다.
박창옥은 그의 실무적 품성만이 아니라 도덕적 품성도 이렇게 비판을 받은 후에 얼마전까지만 해도 그의 정치적 반대자였던 최창익 (지금은 그도 박창옥과 비슷한 처지에 있었다)과 함께 나라통치에 대한 김일성과의 투쟁에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북조선의 대내외 정책 실시에서 김일성의 <자립성>에 대한 불만을 더욱더 확실히 나타내는 모스크바와 북경의 도움에 기대를 걸었다.
박창옥은 소련대사관을 찾아갔다. 대사관은 조심스럽게 행동하라는 충고를 주었다. 아마 외교관들중 그 누군가가 (소련고려인들일 수도 있다 – 외무상 남일이였다는 자료가 있다) 김일성에게 박창옥과 최창익의 계획에 대해 전한 모양이였다. 김일성은 그의 반대자들이 그를 <타격>하려고 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진행을 몇주간 연기했다. 결과 그들이 실패하고 말았으며 진행된 <토론> 총화에 따라 박창옥에게 언권도 주지 않았다. 박창옥은 몇 명의 <중국>야당파의 대표들과 함께 직책에서 해임되었다. 그들 사이에서 몇 명을 바로 전원회의에서 중앙위원회 성원에서 내 보내거나 출당시켰다.
얼마지나 진행된 전원회의에 대한 부정적 평가와 함께 정보가 몇가지 수단으로 모스크바에 들어왔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사 웨.이.이와노브에게서, 북경주재 소련대사관에서 그리고 야당파에 동정심을 표하는 소련주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이상조 대사에게서 들어왔다.
모든 것이 모스크바와 북경의 동의가 없이 실시되었기에 엔.에스.흐루쇼브와 마오제둥의 지시에 따라 아나스타스 미꼬얀과 펜데두한을 단장으로 하는 대표단이 박창옥과 그의 동료들을 도와주기 위해 초대가 없이 평양에 왔다. 그들은 야당의 일원을 이전 직책에 복직시킬 것을 요구했다. 이런 날카로운 반응에 놀란 김일성은 특별히 소집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이 <우의적인 충고>를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하였으나 그들이 떠난 후에 이 약속을 거절했다.
같은 해에 진행된 중앙위원회 새 전원회의에서 불만을 품은 자들의 숙청이 계속되었다. 박창옥에게 국가정변 시도에 대한 기소를 들씌우고 직위에 따라 노멘클라뚜라 일군에게 해당되는 모든 특혜를 상실하고 낮은 직책에 임명하였다. 1957년 9월에 박창옥을 체포한 다음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의 성원에서 내 보냈다. 그 때까지는 그의 이름이 성원의 명단에 계속 남아있었다. 박창옥이 마치도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였기에 탄압을 당했다는 것이였다. 아마 박창옥이가 총살을 당했을 가능성이 크다.
모스크바에서는 <전술상> 이유로 자기 공민의 운명에 참견하지 않았다. 김일성 정체는 박창옥과 같이 거주하던 친척들에게는 <인도적 태도를> 발휘하여 소련대사관을 걸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소련에 귀국시켰다.
이해할 수 있는 원인에 의해 북조선의 역사에서 박창옥은 지금까지도 그에 대해 침묵을 지키거나 혹은 아.이.허가이와 함께 순전히 부정적인 인물로 남아있다.
이.엔.셀리와노브 – 역사학 박사,
교수, 꾸르스크국립대 세계사 강좌장,
<20세기 국제관계>과학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