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스베틀라나 부모님들이 쁘리모리예 변강에서 살던 1937년은 오늘에 와서 옛말로 되었다. 그때 그의 부친 김우신과 모친 황 엠마 부부는 쁘리모리예 변강에서 스탈린 정책에 의해 타쉬켄트 쪽으로 강제이주되었다. 무서웠던 그 시기에 고려인들이 구소련 여러 지역으로 강제이주되었는데 카자흐스탄의 우스토베역에 고려인들을 실은 첫 열차가 당도하였다. 열차는 사람들을 허허벌판에 부리워 놓고 어디론가 꼬리를 감추고 말았다. 때는 늦가을이라 곧 눈이 내릴 수도 있었다. 고려인들이 부지런하다는 것은 온 세상이 알고 있다. 때문에 <고려인들을 돌위에 내 버려두어도 살길을 찾는다>는 말이 있다. 고려인들은 바스토베 언덕에 땅굴을 파기 시작했다... 이 기사의 주인공인 스베틀라나의 부모들은 다행히도 따뜻한 곳인 타쉬켄트 주로 실려갔다. 그후 그들은 정착할 곳을 계속 찾아 헤매다가 결국카자흐스탄의 씌르다리야 연안의 김만삼 꼴호즈에 자리를 잡았다. 스베틀라나는 경치 좋은 이 곳에서 1956년에 태여났다.
원래는 3 형제였는데 현재 두 명만 살아있다. 음악에 소질이 있는 스베틀라나는 1972년에 음악학교에 입학했고 다음 음악전문 학교에서 공부를 계속하였다. 1972-1976 년에 음악전문 학교를 우수히 졸업하고 나서 음악 이론을 완전히 소유하고 피아노 교사로 일하면서 강의도 하였다. 스베틀라나의 음악에 대한 소질과 취미는 하루 아침에 나타난 것이 아니다. 스웨따의 부모들은 음악과 노래를 즐겼다. 때문에 스웨틀라나는 어렸을 때부터 한국 고전음악과 노래들을 들으며 자라서 결국 음악에 마음이 끌리기 시작했다. 하여간 음악을 즐기는 가정에서 자라나 보고 들은 것도 많았을 뿐더러 실제 부모님들과 동네사람들이 모여 노래를 부르며 즐기는 걸 보았을 때 특히 스베 틀라나에게는 민족 '리듬'이 마음에 들었다. ' 저의 할아버지께서 생존이실 때 음악을 좋아하셨는데 옛날에는 음악기구도 없어서 염소 가죽으로 손수 북도 만들었답니다' 하며 음악선생님은 어렸을 때 들은 이야기를 독자들과 나누었다. 그러니 음악에 재주 있
는 김 씨 일가의 그 모든 보물의 다부분이 손녀딸 스베틀라나에게로 넘어 온 셈이다.기사의 주인공은 오늘도 직장생활을 하는 연금 수령자인데 음악교사는그 연세에 아직 정정하시고 안정을 모른다. 뿐만 아니라 스베틀라나 이와느브나는 심정이 너그럽고 현재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인간성을 가진 분이다. 한번은 고려주말한글학교에 '사물놀이' 음악 교사를 청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재정이 허락치 않아 골머리를 앓고 있는 중인데 이 때 스베틀라나 교사가 고려주말한글학교 학생들을 무료로 가르치겠다고 자청하여 나섰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그리하여 현재 스베틀라나 이와노브나는 '고려주말한글학교' 에서 토요일마다 재미있게 수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학생들과 친절히 대하여 학생들도 마음
껏 배우려고 애쓰면서 선생님을 따른다. 스베틀라나 이와노브나 교사는 첫째로 창작사업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남의 것을 반복하는 것을 절대로 찬성하지 않고 새로운 것을 탐구하려고 노력하는 스타일이다. 타쉬켄트에 있었을 때 문화 회관에서 있은 그의 창작콘서트가 대환영을 받았고 타쉬켄트 주재 한국대사관 대사님께서도 칭찬을 받았다. 그 후 1998년 팔월부터 시월까지 직업적 기예를 높이기 위해 한국의 초청을 받아 한국 국립극장에서 세계 각국에서 온 음악가들의 참가하에 진행된 세미나에서 효과적인 삼개월을 보내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정성껏 가르쳐주신 교사님들의 덕분에물론음악수강생들은 모두 전문 음악가들이지만 여러 방면에서 더 많이 익
숙해졌다. 여러 가지 음악 연습도 많았지만 특히 스베틀라나 선생님은 가야금에 호기심을 갖고 삼개월간 주력을 하면서 밤낮을 헤아리지 않고 숙소에서나 국립극장에서 적극적으로 연습하면서 배웠다.스베틀라나 이와노브나는 피아노를 전문한 교사다. 한국에서 새로 얻은 이런 음악 실습은 그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 배운 음악 지식을 갖고 고향에 돌아온 스베틀라나 선생님은 속한 시일로 배워온 지식을 실천에 옮기고 싶었다.알마티에는 오늘까지도 가야금 현악연주단은 없었으며 아마 스베틀라나 선생님이 조직한 이 연주단이 처음일 것이다. 아직은 가야금이부족한 이유로 2-3명의 중창뿐이나 지도부에서 이 문제를 속한 시일내로 해결함을 믿고 싶다고 한다. 이제 명절마다 현악연주단 소수가 군
중들을 흥겹게 하며 출연하고 있다. 국제 축제에서 인정해 준세르찌피카트도 있고 이 외에도 예까쩨린부르그와 모스크바 인민경제성과전람회, 계속하여 에스토니야에서도 출연했고 1998년에스베틀라나 선생님은 36명의 학생들을 인솔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 공화국 수도 평양에도 갔다왔다. 스베틀라나 음악 교사는 가끔 집에서 쉬면서도 아주 꼼꼼히 앞으로 할 일을 계획한다. 이분은 쉴새도 없거니와 쉴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 같다. 예들어 '어린귀여운 아이', ' 부채춤'은 우스베키스탄 '나워이' 대극장 무대에서 성대히 출연할 수 있을 정도로 세련된 창작품이다.또 지적하려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스베틀라나 이와노브나 음악교사의딸 류드밀라는 노래를 잘 불러 몇 년 전 한국 KBS 방송의 후원하에 알마티한국교육원 무대에서 연령 별로 있은 국제 노래콩쿨에서 딸 류드밀라와 손녀 졔냐가 부른 '아리랑'은 대
환영을 받았으며 대상을 받았다.타쉬켄트 음악전문학교 졸업생 류드밀라는 성악에 재능이 있는 로 여학생들로 에스트라다 성악그룹을 조직하였다. 역시 음악에 소질이 있는 손녀 제냐는 지금 일반학교 학생인데 앞으로 음악을 전공하겠는지 확실히 말할 수 없다스베틀라나 이와노브나에게 대해서 '자리가 사람을 빛내는 것이 아니라사람이 자리를 빛낸다' 는 말을 적용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또 한가지 보충할 것은 카자흐스탄고려인 정착 80 주년을 맞이하는 해에 그 명절행사에 한국에서 이름떨친 김진석 사진기자가 참가했는데 그 분은 김 스베틀라나 이와노브나가 배워주는 어린이어린이들의 공연을 보고 탄복하였다고 한다. 사진작가는 그날에 있은 학생들의 모든 공연을 사진에 담아 한국에 가지고 가서 한국 TV방송 시청자들에게 보였다고 한다.이처럼 2014년부터 알마티고려민족센터에서 근무하면서 전심을 다해 젊은이들보다 못지 않게 열정을 뽑내며 민족문화 발전에 헌신하는 김 스베틀라나 음악교사에게 카자흐스탄고려인협회가 얼마전에 협회 메달을 수여하였다.
최미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