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말에 카자흐스탄의 수도 누르-술탄에서 진행된 카자흐스탄민족회 회의에서 한 한국학자 추영민의 선명한 발언은 모든 카자흐스탄인들의 기억에 남았다. 특히 자기의 <코싀 코르뻬스>를 찾으려는데 대한 그의 말은 회의 참가자들의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이 농담인지 혹은 농담이 아니였든지 그리고 카자흐스탄에서의 생활, 학업과 사업에 대해, 기타 많은 것에 대해 추영민 박사가 <고려일보> 기자 안 시아에게 준 인터뷰에서 이야기 하였다.
-그것이 물론 농담이였지요, 엄숙한 분위기를 좀 풀고 카자흐 남자들의 훌륭한 품성을 또 한번 강조하기 위해서 한 말입니다 – 추박사가 웃으면서 말한다 – 실지에 있어서 미래의 남편의 민족성이 저에게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민족마다가 다방면적이고 흥미가 있으니까 말입니다. 서로 의견이 맞고 성격이 맞는 것이 중요합니다. 민족성이 이것을 판정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문화와 전통을 받아들이는 것이 문제로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면에서도 모든 것이 사람에게 달렸습니다 – 새것을 받아들이기에 어느 정도 준비가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일정한 나라에서 살려고 하는 소원에 대해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외관보다 내용이 중요하다>는 격언이 있지 않습니까.
-박사님이 유모가 풍부한 외에 그날 회의에 참가한 사람들은 카자흐어 능력의 수준이 높다는 것을 지적했습니다. 실지에 있어 액센트도 없이 발음을 옳게 했다고 합니다. 언제부터 카자흐어를 배우십니까?
-서울대 중앙아시아언어과에서 카자흐어를 배웠습니다. 그후 교환학생으로 알마티에 와서 학업을 계속했습니다. 일년동안 카자흐어로 소통하는 사람들과 지내면서 저의 카자흐어 실력이 훨씬 늘었습니다. 일년동안 공부한후에 귀국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서 마음이 다시 카자흐스탄으로 끌렸습니다. 저의 전공이 카자흐어 연구와 연관되었기에 카자흐스탄에서 살면서 공부하며 일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때부터 이미 3년이 지나 학업을 거의 끝내고 있습니다. 진행한 사업에 관한 박사학위를 곧 통과시키고 귀국할 것입니다. 카자흐스탄민족회 회의에서 한 저의 발언을 어떻게 보면 제가 한 사업에 종지부를 찍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타국에서 오랫동안 거주하는 임의의 외국인에게 있어서 적응하기가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오랫동안 향수에 잠겼던가요?
-지금은 인터넷이 있어서 부모, 친척들과 통화를 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물론 첫 시기에 가족들이 매우 그리웠지요, 제가 혼자 왔기에 처음에 누르-술탄에 면목있는 사람들이라고는 없었습니다. 그 시기에 카자흐스탄고려인협회 대표들이 저를 많이 받들어 주었습니다. 특히 어른들이 말입니다. 나는 그 분들을 <나의 고려인 어머님>이라고 애정을 담아 부릅니다. 이미 오랜 기간 그 분들과 주일마다 만납니다. 비공식적 분위기에서 모국어도 배우고 맛있는 점심식사와 저녁식사를 하는 것은 저한테는 가족이 받들어주는 것과 같았습니다. 나는 그 분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 친척이 곁에 없어 내가 외로움을 느낄 때면 그 분들이 저를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 분들의 지지가 없었더라면 내가 학업을 성과적으로 끝내지 못했을 것이라고 지금 생각하면서 고려인 어머님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하는 바입니다.
-카자흐스탄에서 거주하는 동포들과 교제하는 외에 또 무엇이 사업에서 박사님을 고무시켰던가요?
-<고려일보>신문이 제가 전공하는 자료를 연구함에서 실천적 도움을 주었습니다. 나는 신문을 읽으면서 카자흐스탄의 고려인들과 카자흐스탄에 거주하는 기타 민족들의 생활, 카자흐스탄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자기의 뿌리를 잊지 말아야 한다
-박사님은 카자흐스탄에 오래 계시면서 고려인들과 한국인들간에 어떤 차이를 보셨습니까?
-한 혈족이지만 카자흐스탄의 고려인들과 한국인들 사이에는 사고방식에, 세계를 감수함에서 일부 차이가 있습니다. 물론 오랜 기간 주위환경이 이에 영향을 주었다고 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에게는보존된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공동의 문화, 근면성, 농업에 대한 애착심입니다. 그러니 그 어떤 심중한 차이는 없습니다. 물론 식문화, 요리, 언어에 변동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쓰시는 박사논문에 대해 좀 이야기해 주십시오…
-고려인들과 한국인들의 협동동작을 최대한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이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과거의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협조의 가능한 여러가지 분야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카자흐스탄민족회에서 고려인 소수민족의 역할에 대한 테마가 특히 흥미있으며 귀국에서 관대성이란 개념 자체가 관심을 이끕니다. 한국인들이 97%를 이루는 우리 나라에서 조화롭고 관대적인 민족간 정책을 수립함에서 카자흐스탄의 경험이 아주 중요합니다. 카자흐스탄인들은 한 나라에서 여러 민족이 조화를 이루어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을 확증하는 좋은 실례로 됩니다. 나는 이 테마를 연구하면서 카자흐스탄민족회의 행사들에 참가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과 카자흐스탄민족회 회의에서 초대 대통령인 누르술탄 나사르바예브 옐바싀 앞에서 발언할 것을 저에게 제의했습니다.
-그런 중요한 행사에 어떻게 준비했는가가 궁금한데요…
-저 외에도 또 몇 명이 발언 준비를 했습니다. 우리는 3일동안 특별 수업과 상담을 다녔습니다. 준비된 텍스트의 내용을 읽을 때 발음을 제대로 하도록 교사들과 수업도 했습니다. 그런데 저의 결혼에 대한 농담이 무엇보다도 모인 사람들의 마음에 든 것 같습니다.
나의 <고려인 어머니들>
-박사님의 논문테마 발전을 카자흐스탄의 많은 기자들이 주시할것 같은데요?
-내가 이미 몇번 카자흐스탄의 TV 방송에 인터뷰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러운 것은 편집에 좀 실망했습니다. 저의 말의 일부를 콘텍스에서 빼여 버리고 일정한 사실은 지나치게 과장했더라구요. 결과 인터뷰가 완전히 달라지고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 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솔직히 말해서 인터뷰를 하려는 생각이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문제는 언어장벽입니다. 내가 영어와 카자흐어는 완벽하게 소유하고 러시아어는 배우는 중입니다. 나는 카자흐스탄에서 사업하는 동안 바로 귀신문에 러시아어로 번역된 저의 인터뷰를 싣고 싶었습니다. 저의 논문의 아이디어와 테마를 모든 고려인들이 이해하도록 말입니다.
-일을 많이 하시는걸로 알고 있는데 휴식은 언제 취합니까?
-주로 앉아서 일을 하니 자유로운 시간에 많이 움직이려고 노력합니다. 저전거를 타고 이심강변을 달리기도 하고 수영장과 피트녜스도 다닙니다. 그리고 <고려인 어머니들>과 만날 때면 맛있는 요리를 장만해 먹고는 교제하기도 합니다. 영화구경을 좋아하지는 이 곳에서는 다니지 않습니다.
-왜 그러지요?
-원인은 간단합니다. 러시아어로 빨리 말하면 제가 이해하지 못하고요 카자흐어로 된 자막은 빨리 바뀌거던요 (웃는다). 그래서 집에서 영화를 자주 봅니다.
-수업이 곧 끝나가는데 그동안 큰 사업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러운 것이 있습니까?
-나는 역사로부터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강 게오르기와 김 게르만 작가들이 저를 도와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교수님들의 사업을 계속하면서 그것을 현대의 궤도에 올려세울 후계자들이 차세대에 없는 것이 유감입니다. 고려인 디아스포라의 역사가 살아야 하며 그것이 다음 세대에 전달되어야 합니다. <고려일보>에 대해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역사를 보존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보기에는 연약한 이 아가씨에게는 무진장한 열의, 지향과 근면성이 숨어있다. <고려일보>신문과 협력하는 것은 추영민에게 있어서 협동화 발전과 그가 세운 목적 달성에서 새로운 걸음으로 될 것이다. 영민은 박사논문을 통과시킨 후에 교육학에 몸담으면서 카자흐스탄과 한국간의 관계발전에 계속 협력하려고 한다.
안 시아
누르-술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