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자의 기록, 『나의 아버지 최재형』”
“시대의 증언이자 항일 독립운동의 서사시, 『나의 아버지 최재형』”
“일본을 뛰어넘어야 할 이유를 온몸으로 말하는 책, 『나의 아버지 최재형』”
“이 책은 살아남은 자의 기록인 동시에 시대의 증언이며 역사의 울음소리이다”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선생의 딸 올가와 아들 발렌틴의 육필 원고가 책으로 나왔다.
독립운동가 최재형의 딸 올가와 아들 발렌틴의 육필 원고를 번역한 ????나의 아버지 최재형????(도서출판 상상)이 최근 출간되었다. 이 책은 최재형의 손자 최 발렌틴이 자신의 고모 올가와 아버지 발렌틴이 쓴 육필 원고를 자신의 모스크바 집에 보관하고 있다가, 도서출판 상상 김재문 대표에게 기증하면서 책으로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최 발렌틴은 최재형의 손자로 이 책의 저자 가운데 한 명인 최 발렌틴의 아들이다. 아들과 아버지의 이름이 동일하다.
이 책은 러시아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이자 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을 지낸 최재형의 항일 독립 투쟁의 여정을 딸과 아들의 시선으로 그려내고 있다. 최재형은 1860년 함경북도 경원에서 노비인 아버지와 기생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9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와 형을 따라 러시아 연해주로 건너갔다. 러시아에서 무역업과 군납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그는 항일 독립운동 조직을 결성하고 독립운동가들을 양성하는 등 조직적으로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교육이 조국 독립의 뿌리임을 인식한 그는 학교와 교회를 세우는 일에도 앞장선 선각자였다.
이 책의 저자인 올가와 발렌틴의 기록에 따르면, 최재형이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을 기획하고 지원했음을 생생히 알 수 있다.
한국의 애국자로서, 최재형은 점령자들인 일본과 싸웠다. 독립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조국의 독립과 민족 해방 운동을 선두에 서서 이끌었다. 나의 아버지 최재형은 1906년, 항일 독립운동 조직을 결성하고 독립운동가를 양성하였다. 당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항일 투쟁 지도자들과 늘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던 아버지 최재형은 일본 우두머리를 죽이면 조국의 독립을 위해 큰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있던 노보키옙스크에 ‘안인사’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도 불렸던 안응칠(안중근)이 살았다. 그는 거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창고 벽에 세 명의 모습을 그려놓고 그들을 향해 총을 쏘는 연습을 했다. 어느 날, 나와 소냐 언니는 마당에서 놀다가 그 광경을 보게 되었다. 결국 안중근은 하얼빈으로 가서 일본군 우두머리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pp. 27-28, 올가의 육필 원고 중에서)
나의 아버지 최재형이 이끄는 유격부대에는 안중근이라는 젊고 결단력 있는 소대장이 있었다. 1907년도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안중근은 최재형과 이범윤 등 반일 유격부대 지도자들과 만나게 되었다. 러•일 전쟁 때 중국에서 러시아로 옮겨온 이범윤은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최재형 등과 함께 활발한 항일 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1909년 항일 의병 유격대 지도자들은,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체프를 만나기 위해 가까운 시일 내에 하얼빈에 도착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중략)
최재형과 이범윤은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기 위한 작전을 수립하고 사격 훈련을 계획하였다. 훈련은 노보키옙스크에서 진행되었다. (pp. 175-176, 발렌틴의 육필 원고 중에서)
이 책 제1부는 최재형의 딸 올가의 육필 원고이다. 올가의 글에는 슬라뱐카 마을에서 아버지 최재형과 지냈던 행복한 유년의 기억이 고스란히 적혀있다. 올가의 글에 나타난 항일 독립운동가 최재형의 마지막 모습은 1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의 가슴을 울린다. 올가는 1920년 4월 5일 새벽 니콜스크-우수리스크의 집(현재 최재형 기념관)에서 아버지 최재형이 일본군에 끌려갔던 기억 때문에 평생 정신적 고통을 겪었고, 최재형의 가족들은 스탈린 시대에는 ‘인민의 적’으로 낙인찍혀 곤혹한 삶을 살아야 했다. “우리 가족 중 유일하게 장례식을 치른 사람이 어머니 엘레나”라는 올가의 말에서 최재형의 가족들이 러시아에서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 수 있다. 올가와 발렌틴은 “너희들은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라는 아버지 최재형의 말씀을 평생 가슴에 묻고 살았다고 한다.
이 책 제2부는 최재형의 아들 발렌틴의 육필 원고이다. 특히 2부에서는 민족 지도자로서의 최재형의 활동상이 잘 드러난다. 다음을 보자.
최재형은 계몽 활동과 사회 활동을 하면서 주민들의 문화 수준 향상에 큰 의미를 두고 있었다. 그는 특히 학교와 교육에 큰 관심을 두었다. 마을마다 교회와 학교가 설립되고, 노보키옙스크에서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아이들이 들어갈 수 있는 6년제 상급 교육 기관도 세웠다. 상급 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학생들은 민족의 지식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졸업생들은 선발 과정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 니콜스크-우수리스크, 블라고베쉔스크, 이르쿠츠크, 톰스크, 카프카즈와 크림 등으로 유학을 보내주었다. (p. 169, 발렌틴의 육필 원고 중에서)
또한, 이 책은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삶이 얼마나 처절했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최재형의 딸 올가는 1937년 10월 1일 이유 없이 체포되어 강제노동형을 선고받고 7년을 복역한 후 석방되었다. 올가와 마찬가지로, 발렌틴도 1938년 8월 31일 이유 없이 체포되어 복역하다가 1940년 석방되었다. 다음에 보이는 최재형의 아들 발렌틴의 고백은 절절하다.
나는 모든 기소 사항을 부인했고, 제58조 제1항에 기록된 조국 반역죄에 해당하는 간첩 행위에 대해 인정하지 않았다. 이 조항에 해당하는 사람의 결말은 총살 하나뿐이었다. 1939년 3월~4월에 세이풀리나 거리에 있던 도시 교도소의 수용실 10호로 옮기게 되었다. 수용실은 15~17㎡ 정도의 크기였고, 나는 거기 있던 사람들 중 10번째 수감자였다. 수시로 같은 방에 30명까지 집어넣기도 했는데, 내가 들어간 뜨거운 여름에는 정말 끔찍한 상황이었다. 내가 그곳에 있는 동안에 거기를 거쳐 간 사람이 백 명 가량이었다. 그들은 주로 카토르가(극동의 강제노동수용소)로 보내졌다. (p. 248, 발렌틴의 육필 원고 중에서)
이 책에는 최재형의 항일 독립운동 활약상뿐만 아니라 자상하고 온유한 아버지 최재형의 모습도 잘 그려져 있다. 또한, 이 책은 당시 연해주 일대 한인 마을의 풍경과 생활상도 생생하게 드러나 있다.
이 책의 저자 최 올가 페트로브나는 1905년 5월 5일 러시아 연해주 얀치헤에서 최재형의 다섯째 딸로 태어났다. 1922년 사법학교를 졸업하고 코르사코프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1934년 모스크바 몰로토프 공과대학을 졸업하고 엔지니어로 일했다. 1937년 10월 1일 이유 없이 체포되어 10년 강제노동형을 선고받고 7년을 복역한 후 1944년 석방되었다. 2001년 세상을 떠났다. 공동저자 최 발렌틴 페트로비치는 1908년 5월 2일 노보키옙스크에서 최재형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928년 농업기술학교를 졸업하고 농업 기사로 일했다. 1938년 8월 31일 이유 없이 체포되어 복역하다가 1940년 석방되었다. 이후 카자흐스탄 농업대학교를 졸업하고 카자흐스탄 농업국 본부장을 역임했다. 15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하고 활발한 저술 활동을 하다가 1995년 세상을 떠났다.
살아남은 자의 기록인 동시에 시대의 증언이며 역사의 울음소리로 평가받는 ????나의 아버지 최재형????의 일독을 권한다.
알-파라비 명칭 카자흐국립대 초빙교수 정덕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