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로 인해 두 갈래로 나뉘어 침체기에 들어선 고려극장을 재정립시켜 전성기를 마련한 고 조정구 고려극장장 탄생 100주년을 맞아 기념 행사가 17일 국립아카데미 고려극장에서 개최되었다.
이날 기념식에는 고인의 가족들인 아들 왈레리와 딸 갈리나, 니 류보피 고려극장장과 원로 배우들과 고인을 추모하는 동포 등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고인의 생애와 업적을 후배 고려극장단원들이 마련한 “추억의 앨범”이라는 공연으로 마련되었다. 이날 공연은 조정구 극장장으로 임명받는 순간 그를 사진사가 기념 촬영하는 모습을 첫 장면으로 생전의 고인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무대 배경으로 연극을 시작하였다. 옛 고려극장 배우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과 흑백 동영상으로 무대를 꾸미고 그 당시 무대의상과 공연을 현직 배우들이 재현하는 시간으로 구성하였다. 당시 조정구 극장과 함께 활동했던 아리랑 가무단의 무용수 김림마 인민배우, 재즈 무지션 한 야콥, 가수 리 웨니아민 , 연극배우 백 안또니나, 가수 김조야 등 원로 고려극장 단원들은 후배 단원들이 마련한 공연을 보며 추억에 잠겼다.
조정구 전 극장장은 1919년 연해주 하산지구에서 출생했다. 그는 26세가 되던 해에 당으로부터 고려극장장으로 임명 받고 고려극장의 재정립에 나섰다. 1946년부터 조정구 극장장 시대가 열리며 극장의 체계화와 전문화가 이루어졌다. 조정구 극장장은 단원들의 주거 및 생활환경 개선을 위해 많은 애를 썼으며, 소비에트 희곡 및 해외의 우수한 희곡 작품들을 무대에 올렸다. 1955년에는그의 제안으로 오스트로프스키 명칭 타쉬켄트 극장 예술대학에 조선배우과가 개설되었고, 타쉬켄트 조선극장 배우들과 북한파견 노무자들을 중심으로 사할린 조선극장이 운영되기도 했다. ‘홍길동’ ‘장화와 홍련’ 등이 무대에 오른 이 시기에는 정인묵 등 무대예술 전문가가 등장했으며, 만능 연극인 김해운의 활약이 돋보이기도 했다. 중앙아시아 순회공연을 비롯해 오지를 오가는 지방 순회공연을 활발히 펼쳤으나 사할린 조선극장 역시 1959년 7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카자흐스탄 고려극장은 순회공연지역을 확대하며 극장 지위를 상승시켜 나갔다. 1955년 9월 수도 알마틔에서 시작된 순회공연은 카프카스, 모스크바 공연을 거치며 1964년 1월에는 공화국적 지위를 갖는 조선극장으로 인정받게 된다. 또한 1956년 타쉬켄트 극장대학에 조선배우과가 개설돼 1960년에는 첫 졸업생 14명이 입단하며 제2세대 배우들의 시작을 알리며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는 극단 번영의 시기였다. 1960년대 초반, 프로 극작가 한진과 전문연출가 맹동욱이 등장하며 작품의 완성도가 높아졌다. 또 그는 연기 및 음악에 다재 다능한 재원들을 발굴하고 양성하여 1968년 아리랑 가무단을 창설하였다. 아리랑 가무단은 소련 전역에 알려졌고, 1982년에는 극장 역사를 총정리한 김 이오씨프 저 ‘소비에트 고려극장’이 저술되기도 했으며, 1982년 9월에는 극장 창립 50주년을 기념하며 모스크바에서 ‘산부처’ ‘지옥의 종소리’ ‘춘향전’ 등의 연극을 무대에 올렸다.
조정구 극장장의 창의적인 극장운영은 극장 활동에 활기를 불어넣고 1980년대까지 고려극장의 체계적인 극장활동에 원동력이 되었다. 이에 조정구극장장의 공로를 치하하여 카자흐스탄 당국은 그에게 노동공로상, 처녀지 개간상, 카자흐스탄 최고회의의 명예표창등을 주었으며, 1967년에는 카자흐스탄 공훈 예술가 칭호를 수여했다. 한편, 조정구 극장장의 가족들은 고인이 쓰던 의자와 돔부라, 작품을 기록한 책자 등을 고려극장 박물관에 기증하였디.
(이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