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스베키스탄에서는 금년에 이름있는 <뽈릿옷젤> (현재 <두스틀리크, 타스켄트주) 회장 황만금의 탄생 100주년을 성대히 기념할 것이다. 우스베키스탄 공훈배우 신 갈리나 가수가 지도하는 조직위원회는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기쁘고 뜻깊은 이 날을 맞이할 준비사업을 적극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황만금이란 이름이 모든 고려인들의 기억에 영원히 남아있을 것은 물론이다. 왜냐 하면 황만금의 생활의 역사가 구 소련의 고려인 디라스포라의 역사일뿐만 아니라 우선 다민족 우스베키스탄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황만금은 우스베키스탄의 경제발전에 일생을 이바지했다. 뽈릿옷젤> 꼴호스의 역사는 1925년부터 시작된다. 소련의 고려인들이 이 꼴호스를 연해주에서 조직하였다. 경리는 벼를 재배하였다. 이것은 <일심>이란 명칭을 가진 그리 크지 않은 농업아르쩰리였다. 아르쩰리는 1937년에 전 집단과 함께 우스베키스탄으로 강제이주되었다. 후에 이 꼴호스가 <옥쨔브리>, 다음에는 <뽈릿옷젤>로 개칭되었다.
강제이주후 16년이 지나 즉 1953년에 32세의 황만금이 꼴호스를 지도하였다. 그 당시 그는 타스켄트 부근의 벡쩨미르 부락에서 살았다. 황만금은 벡쩨미르에서 <뽈릿옷젤>까지 날마다 걸어다녔다. 꼴호스가 얼마나 가난했던지 회장에게는 공용 차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불과 몇 년이 지나 꼴호스의 성과에 대한 소식이 온 나라에 퍼졌다. 이미 1957년에 황만금에게 사회주의 노동영웅이란 고상한 칭호가 수여되었다. 그때 그의 나이가 아직 36세도 되지 않았었다. 이 경리에서 재배하는 께나프, 옥수수 그리고 좀 지나서는 목화의 높은 수확에 대해, 축산업, 문화 건설에서 성과에 대해 온 나라에 알려지고 나라의 고위급 지도자들이 <뽈릿옷젤>의 성과에 관심을 돌리기 시작하자 우스베키스탄에 새 세대의 리더가 나타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새로운 사고방식을 가졌으며 전례없던 방대한 범위로 사고하는 지도자가 생겼다는 말이다. 이미 60년대초에 이르러 황만금은 공화국의 가장 우수한 지도자들의 대열에 속하였다. 2014년에 우스베키스탄에서 <황만금: 올림프스와 골고다를 걸쳐>라는 책이 발행되었다. 기자들인 김 브루트 (<레닌기치> - <고려일보> 주재기자)와 김 미하일이 그 책을 썼다. 책을 고생하면서 오랜 기간 썼다. 저자들은 수백건의 서류와 편지, 출판물에 게재된 자료들을 둘춰보았고 고문서와 도서관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황만금과 직접 만나서 담화도 하고 회장과 같이 일하고 살던 수십명의 사람들과도 만났다. 그 당시에 이름을 떨치던 국가 및 사회 활동가들, 농업 전문가들, 꼴호스원들, 작가들과 배우들, 기자들과 친척들이 과거에 있던 사건의 목격자들로 되었다. 김 브루트 저자는 책의 창작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 황만금 회장은 고려인 꼴호스 회장의 제 2세에 속했습니다. 이 세대가 사고방식과 활동 범위로 보아 보다 유식하고 보다 현대적이였습니다. 황만금의 이름을 중심으로 하고 온 나라에 알려진 꼴호스 회장의 직책에서 그의 사업, 이른바 <목화사건> 시기의 비극과 연관된 적지 않은 전설, 소문, 허구가 떠돌았습니다. 그것은 이를테면 첫 손에서 받은 정확한 정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은 쏘련시대가 저물어가는 시기에 우스베키스탄 공화국의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페이지로 되었습니다. 지난 세기의 70년대말과 80년대 초에 쏘련체계는 경제적, 정치적 분야를 비롯하여 불가역적인 위기에 휩싸였습니다. 사람들의 사회적 의식에도 큰 변동이 생겼습니다. 공산주의의 위대한 사상은 기껏해서 비웃음을 불러일으킬 뿐이였습니다. 나라가 전체적인 결핍의 시대에로 굴러들어 갔습니다…위기의 <장본인들>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왜서인자 결국 우스베키스탄에서 찾아냈습니다. 이렇게 비참한 <목화사건>이 생긴 것입니다. 이 사건에 대해 우스베키스탄인들이 비교적 잘 알고 있습니다. 그에 대한 책도 있고 영화도 있습니다. 그런데 지적하고 싶은 것은 <목화사건>의 시기에 즉 1984년부터 시작하여 1988년 상반년 말까지 검찰소와 내무부 심리그루빠가 2만 5천여 명의 우스베키스탄 주민들에게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이 맷돌에 황만금도 몰려들어 갔습니다. 그는 1985년 12월 12일에 체포되어 3년 반동안 국가안전위원회의 감옥에 감금되여 있었습니다…
황만금은 완전히 명예회복을 받고 1989년에 석방되었습니다. 그의 정신적 의지가 꺾긴 것은 물론입니다. 그렇게 심한 육체작 및 정신적 충격을 받은 뒤에 <정신을 차릴>시간이 얼마간 필요했습니다. 그를 받들어 줄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새로운 우스베키스탄 독립국의 수뇌자였던 이슬람 까리모브가 황만금의 명예회복에서 실로 막대한 역할을 놀았습니다. 까리모브는 공화국이 독립을 얻기 전에 <목화사건>으로 피해를 입은 자들의 명예를 완전히 회복하도록 힘썼는데 그중에는 황만금도 있었다. 이슬람 까리모브 대통령이 자기의 첫 한국방문시에 황만금을 비롯한 고려인들을 대표단 성원에 넣은 것이 주목할만한 사실입니다. 방금 석방된 황만금에게 있어서는 그를 대표단 성원에 넣은 사실 자체가 명예회복보다 더 중요하였습니다. <나는 우스베키스탄의 고려인들을 정부대표단에 넣은데 대해 이슬람 압두가니예위츠에게 무한히 감사합니다 – 황만금이 한국에서 돌아온후 고려인 문화센터 협회 회원들과의 상봉에서 말했습니다 – 나는 이 사실을 나 자신의 공로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모든 고려인들의 공로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스베키스탄은 고려인들에게 있어서 실로 조국으로 되었습니다. 그들은 독립국으로 된 우리 나라의 경제 및 문화 발전에 현저한 기여를 하였으며 또 계속 하고 있습니다….>. 1991년에 있은 일이 기억에 떠 오른다. 근거 불충분한 논고로 3년 반동안 갇혀있다가 명예회복후에 석방된 황만금이 <고려일보> 타스켄트 기자주재소에 왔던 일이 기억난다. 그 때 고려문화센터 공화국 조직위원회 회의가 있었다. 그렇게 강력한 정신적 및 육체적 충격을 받은 후에 황만금 자신이 스스로 이 회의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대중에 대한 영향을 강화하려고> 조직위원회가 초대한것 같다. 황만금은 적극성을 보이지 않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내가 보기에는 감옥에서 보낸 년간이 이 대담한 미남의 의지를 어느 정도 꺾었으며 그의 느낌에 영향을 준 것 같았다. 실로 고려인 디아스포라의 기치로 되었으며 이미 살아계실 때 ……기념비를 세운 전설적인 회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