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내 또래의 한국 아기들이 한국 동요를 들으며 유모차를 타고 이마트를 돌아다닐 때, 나는 스쳐 지나가는 러시아어를 들으며, 베이커리 섹션에서 갓 구운 삐라쉬끼의 냄새를 맡으며 람스토르에 있었다. 한국에서 태어난 지 6개월만에 아빠의 국제 협력단(KOICA) 발령으로 나는 한국을 떠나 카자흐스탄의 알마티와 아스타나에서 3년의 시간을 보냈다. 그 시간동안 남동생이 태어났고, 난 금방 자라 한국어와 약간의 러시아어를 할 수 있게 되었으며, 내복을 여러 겹 껴입어야 하는 카자흐스탄의 겨울에 익숙해지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내 집은 아스타나라고 생각했고, 나를 귀엽게 맞아주시는 고려인 분들과의 저녁식사가 쭉 이어질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2005년 난 복무를 마치고 돌아가는 아빠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카자흐스탄은 내 기억 속에서 점점 흐릿해져 갔다. 아스타나에서 친해진 분들과 간간히 연락을 하긴 하였으나 어느 순간부터 내가 살았던 곳이 어땠는지, 그곳의 사람들은 어떠했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항상 카자흐스탄은 내 마음속에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수업시간에 나에 대한 소개를 할 때면 항상 카자흐스탄에서 살다 왔다고 이야기하고, 간간히 카자흐스탄 뉴스를 찾아보기도 하고, 스포츠 경기에서 카작 팀을 응원하고 있었으니까.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더 생각하게 되면서 점점 카자흐스탄에 대해 더 알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아니, 그냥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지금의 나를 형성한 한국과 카자흐, 두 가지 문화권 사이의 연결고리를 만들고 싶었고 그래서 2019년 여름, 카자흐스탄을 떠나온 지 14년째 되는 해에 나는 카자흐스탄을 다시 방문하게 되었다. 내가 생각한 한국과 카자흐스탄 사이의 연결고리는 ‘한국어’ 였다. 2년전부터 서울 이태원에 있는 난민봉사단체에서 난민 어린이 교육 프로그램을 직접 만들고 운영하면서 계속 어린이들에게 한국어와 한글을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에 그 경험을 토대로 한국어교실을 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현지 어린이들과 함께 한국어를 배우며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을 나누면서 카자흐스탄과 한국 사이에 작지만 활발한 문화 교류가 일어나기를 바랬다. 감사하게도 알마티 고려문화원에서 주관하는 ‘하계 한국어 교실’을 통해 나는 여름 방학 동안 알마티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게 되었다.
처음 한국어교실 반에 들어갔을 때의 첫 느낌은 기대감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한글을 하나도 모르는 아이들이 많았고, 영어로도 의사소통이 불가능하여 평소에 난민 아이들에게 영어로 한국어를 설명하던 나에게는 큰 어려움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그림이나 게임, 그리고 만들기와 활동으로 한국어를 가르치려고 노력했다. 매일 그날 배울 한국어 단어 낱말 카드와 그 단어들을 이용한 게임을 준비해 갔으며 한국어 자수 주머니 만들기, 김밥 만들기, 주먹밥 만들기 등도 시행했다. 정말 감사하게도 모인 분들의 수업에 대한 열정은 엄청났고 매일 반짝거리는 눈으로 열심히 참여해 주셨으며, 수업 시간은 누가 게임의 승자가 될 것인지에 대한 웃음 넘치는 긴장감과 새로운 활동에 대한 신남으로 가득 찰 수 있었다. 수업을 하는 입장인 나도 너무 재미있었고, 학생들이 한국어 단어에 해당되는 러시아 단어도 알려 주셔서 유익했다. 또한 옆에서 통역을 도와 주신 카자흐스탄 언니들 덕분에도 원활히 수업을 진행할 수 있어 감사했다.수업을 하며 또 하나 느낀 것은 참여한 현지 분들의 열정뿐만이 아니라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애정과 사랑이었다. 수업에 열심히 참여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는데, 케이크를 구워 와 주시기도 하고, 각종 머리띠와 열쇠고리, 예쁜 원피스까지 선물로 주시는 것을 보고 정말 과분한 사랑을 받았다고 느꼈다. 마지막 수업 시간에 그간의 소감과 감사 인사를 나누며, 구글 번역기를 사용해 서툴게 영어로 대화했는데 그동안 좋은 선생님이 되어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듣고 너무 고마웠다. 학생 중에 일부는 추후에 한국을 방문할 계획도 있어, 한국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 연락처도 서로 주고받았다. 짧지만 귀한 경험을 통하여 카자흐스탄 사람들의 정과 인간미 넘치는 삶을 엿볼 수 있었고, 더욱 카자흐스탄이 친근하고 좋은 나라로 다가온 것 같다.
한국어와 한국 문화에 대한 작은 지식을 나눠 주려고 카자흐스탄에 왔지만 오히려 훨씬 더 많은 것들을 받고 돌아가는 것 같다. 하계 한국어 교실을 통해 내 뿌리의 큰 부분인 카자흐 문화권에 대해 다시 확인할 수 있어 나 스스로에 대해서도 더 많이 알게 된 느낌이었고 이들의 넘치는 사랑에 너무 감사했다. 두 문화권 사이 한국어 외에도 나 스스로가 작은 연결고리가 된 것 같아 뿌듯하기도 했다. 2019년 카자흐스탄의 여름은 내 기억 속에 오래오래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