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유학생으로, 소련 망명자로, 훌륭한 영화촬영가로, 그리고 제2세대 고려인 한글문학 작가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다 가신 양원식 선생님이 올해로 탄생 90주년을 맞았다. 특유의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이런저런 말씀을 해주시며 지금도 우리 곁에 계실 것만 같은데 선생님 가신지도 어언 16년이 흘렀다. 유수 같은 세월 속에 선생님이 일생을 바쳐 헌신하고 이룩하신 일들도 함께 묻혀가는 것만 같아 안타깝기가 그지없다.
우리는 선배들이 쌓아 올린 수고와 헌신과 피땀의 기반 위에서 살아간다. 우리도 거기에 진실과 정의와 아름다움을 수놓아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있으며, 그러면 후배들은 그 위에 자기들만의 새로운 가치를 쌓아 올릴 것이다. 이렇게 세대를 이어가며 우리의 이야기가 쌓이고 다채로운 개인의 직물이 짜이면서 역사가 만들어진다. 선배들이 걸어간 길은 바탕이 되고 배경이 되고 때로는 목표가 되기도 한다. 양원식 선생님도 그렇게 당신 특유의 색실로 고려인의 역사에 이야기를 엮어 넣으면서 우리에게 독특하고도 선명한 발자국 두 개를 남겨주셨다. 하나는 정치적 격변 속에서 명운을 건 결단을 하셨던 의로운 결정에서, 또 하나는 중앙아시아에서 사라져가는 모국어와 한글문학을 지키고자 온몸으로 애쓰셨던 열정에서…
양원식 선생님은 1932년 5월 19일 평안도 안주 땅, 앞마당에 청천강이 흐르는 강변 마을에서 태어나셨다. 그리고 시골에서 소학교를 마치고 장차 사회의 청년 일원으로 나아가려던 1950년에 6.25전쟁이 일어나자 인민군으로 징집되어 피로 물든 한반도 산하를 누볐다.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북한의 국비유학생으로 뽑혀 1953년 여름 모스크바 전연맹영화대학교에 입학하는 행운을 거머쥐셨다. 이 대학에 먼저 들어와 있던 최국인, 리경진(리진), 한대용(한진), 허웅배(허진), 정린구 같은 훌륭한 선배들 덕분에 후배 양원식은 입학 동기 김종훈과 함께 우수한 학업성적을 보이며 선진 국가의 학문과 문물을 목마른 아이처럼 배우고 익혔다. 양선생님께는 아마도 이때가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였을 것이다.
그런데 변화무쌍한 인생의 법칙이 원래 그런 것인지, 우리는 누군가에게 행복감이 최고조에 이르는 시기가 오면 그것을 지워버리려는 기운도 함께 일어나는 것을 쉽게 목격하곤 한다. 희망에 가슴이 한껏 부풀어 오르던 유학생 양원식의 앞날에도 이처럼 뜻밖에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모스크바 전연맹영화대학교 북한유학생 집단망명 사건이었다. 영화대학 졸업을 한 해 앞두고 있던 1958년, 유학생 양원식은 정치적 망명을 주도한 허웅배, 리경진, 최국인 같은 선배들의 열정에 감화되어 동기들과 함께 외로운 정치적 망명의 길을 선택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선생님은 고향에 남은 가족과는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처지가 되었고 당신 앞날은 온통 가시밭 천지로 변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선생님은 의로운 길을 선택했다는 신념과 자긍심으로 제2의 인생을 뜻있게 살아갈 용기를 얻었다. 이후 옛소련과 중앙아시아에서 펼쳐진 선생님의 인생은 전반기와 후반기, 즉 영화를 위한 길과 한글문학을 위한 길로 뚜렷이 나뉘어 전개된다.
1958년 망명 이후 1984년까지 양선생님은 유능한 영화촬영가로서의 삶을 사셨다. 당신은 국가가 요구하는 영상을 정부 시책에 잘 부응하여 늘 훌륭히 제작해 납품하셨다. 그러한 열정과 능력은 곧 당국으로부터 인정을 받아 불과 2년 만에 첫 근무지 스탈린그라드에서 고려인이 집거해 사는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하고픈 소망을 이룰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이 일은 장차 선생님이 고려인의 모국어와 한글문학을 지키는 일에 온몸을 바치게 하는 출발점이 되었으니 선생님의 카자흐스탄 알마티 이주는 고려인 공동체에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한편 선생님은 영화제작에 헌신하던 시절인 1974년에 고려극장의 공연 영상을 제작해 남기심으로써 고려인의 역사와 문화 보존에 첫 공헌을 하셨다. 비록 짧은 영상이지만 이 영상 덕분에 우리는 고려인 민족문화예술의 보고인 고려극장의 무대와 연극공연 모습 등을 선명히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양원식 선생님이 전적으로 모국어와 한글문학의 보존에 뛰어든 두 번째 인생은 1984년 4월 레닌기치사 문화예술부장으로 들어가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선생님은 별도로 문학을 공부한 적은 없지만 늘 작가가 되고 싶은 소망으로 1970년대부터 신문에 간간이 시와 단편을 발표해오면서 꿈을 향해 한발 한발 나아가고 계셨다. 무엇보다도 1959~1962년의 이른 시기에 등단하여 극작가와 소설가로 맹활약하던 한진이나 탁월한 시와 평론으로 고려인 문학계의 큰 주목을 받던 리진 같은 망명동료 선배들에게서 선생님은 늘 신선한 자극을 받아오고 있었다. 점차 영화계의 일을 줄여나가고 대신 꾸준히 시, 수필, 단편을 써서 모국어 신문사 문예페이지에 올리는 일을 늘려가셨다. 자연스럽게 제2세대 고려인 한글문학 작가군에 ‘양원식’이라는 이름이 굳게 자리 잡았다. 그리고 1990년 2월 28일 레닌기치에 발표한 단편 〈녹색 거주증〉은 양원식 선생님을 개성 있는 한글문학 작가로 뚜렷이 자리매김해 준 대표작이 되었다.
이와 나란히 선생님은 기자이자 작가로서 재소고려인 한글문학의 시조 포석 조명희에 매료되어 그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독자들에게 알리고 조명하는 데 누구보다도 큰 열정을 쏟으셨다. 그리고 1988년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나보이 역사박물관에 조명희 기념실이 만들어지자 선생님은 바로 이듬해 조명희에 바치는 헌시를 써서 기증했다. 지금도 그 박물관에 가면 우리는 조명희 흉상 옆에 놓여있는 양원식 선생님의 그 우렁찬 헌시를 볼 수 있다.
선생님은 1991년 말부터는 고려일보 부사장을 역임하셨다. 그리고 모국어 기자의 부족과 구독자의 급격한 감소로 신문사가 존폐의 위기에 내몰리던 1994년에 사장이라는 중책을 맡아 이 신문사가 고려인협회의 관할로 넘어가던 2000년 3월까지 모국어 신문이 폐간되지 않도록 온몸으로 지켜내셨다. 내년이면 창간 100주년을 맞이할 고려일보가 지금까지 존재하게 된 데에는 시련의 1990년대를 부사장과 사장의 자격으로 모국어 신문을 끝까지 지켜낸 양선생님의 공로가 으뜸을 차지할 것이다.
선생님 말년에는 평생의 숙원이던 본인 명의의 작품집을 내셨다. 2001년에 첫 시집 『카자흐스탄의 산꽃』을 출간하고 어린아이처럼 기뻐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선생님은 내친김에 소설집 출판도 서두르셨다. 그리하여 마지막 몇 년간은 전업 작가처럼 온통 작품 창작과 정리에 몰두하셨다. 참으로 애석하게도 그 소설집은 유고집으로 나오고 말았지만…… 선생님은 소설집 정리작업을 거의 끝내고 출간을 진행하던 도중 뜻밖의 죽음을 맞이하셨고 돌아가신 이듬해에 배관수 전 한국대사관 영사의 노력으로 유고집 『칠월의 소나기』가 출간되었다.
양원식 선생님이 일생을 수고하며 짜놓으신 삶의 직물을 보며 우리 후세대들이 감사드릴 일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을 깨닫는다. 선생님은 고려인들에게서 모국어 신문이 사라지는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막겠다는 일념으로 모국어 신문사가 가장 큰 어려움에 처해 있던 1990년대 전부를 신문사 부사장과 사장으로, 나중에는 고문으로 불철주야 기사를 쓰고 번역을 하고 문학작품을 써냄으로써 고려일보 지면을 부끄럽지 않게 채웠으며, 2006년에 뜻밖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하실 때까지 중앙아시아에서 한글문학이 사라지지 않도록 쉼 없이 작품을 쓰셨다. 이것만으로도 선생님은 후배들에게 의롭고 아름다운 삶의 모범을 보여주셨다.
양원식 선생님이 수고하며 짜놓은 삶의 직물 위에서 우리는 많든 적든 어떤 형태로든 나름의 휴식을 취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잊지 않고 우리가 그런 선배 세대를 기억하는 것이다. 선배들이 남겨놓은 자취가 후배 세대에게도 잊히지 않고 잘 전승된다면 우리의 삶과 문화는 더욱 풍성하고 다채로워질 것이다. 마치 봄날에 천지사방이 꽃으로 가득히 덮이듯이… 부디 양원식 선생님의 선한 뜻이 계속하여 우리에게 이어지기를…
김병학(월곡고려인문화관장, 전 고려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