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 8월에 서울에서 진행된 제 8차 세계힌국정치인 포럼에 참가했던 카자흐스탄 대표단이 귀국했다. 대표단 성원에는 카자흐스탄국화 하원의원 김 웨라, 제띄수 주 마슬리하트 대의원 지가이 다미르, Kaz Fos 공장 지도자 신 유리가 있었다. 그들은 포럼사업에 참가만 한 것이 아니다. 포럼참가자들은 국회 하원의원 김 웨라 알렉산드로브나의 보고를 큰 관심을 품고 들었다. 귀국한 후에 우리는 즉시 웨라 알렉산드로브나에게 몇가지 질문을 하였다.
- 세계한국정치인 포럼이 여덟번째 훌륭히 진행된 것이지요? 이런 포럼의 조직 자체 또 그리고 신선한 아침의 나라에서 나무랄데 없이 진행되였을 것입니다
- 내가 이미 두번째 한국을 방문했는데요 한국인들이 손님들이 불편을 느끼지 않도록 문자 그대로 모든 것을 다 소소한것까지 다 예상하는 것을 보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국에서 진행되는 행사조직자들에게 있어서 소소한 것이라고 있을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세미나나 컨퍼렌서에 참가하면서 짧은 시간을 보내는 동시에 많은 유적지들을 보고 흥미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게 일정을 잡아놓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그들의 연락처를 가지고 자신의 연락처를 남겨놓게 됩니다. 한국인들에게 한해서 명함을 나누는 것이 비공개적인 의무로 되여 있습니다. 이것이 좋은 일입니다.
한국 세계정치인 이사회가 포럼 조직자로 나섰다. 이 이사회를 외국동포 지원재단이 융자한다. 금년 포럼은 아주 대표적이였다. 세계의 13개 나라에서 온 70명의 대표들이 포럼사업에 참가하였다. 그중에는미국 캐나다, 압스트랄리아, 뉴질랜드 기타 나라들이 있었다. 대표들 중에는 국회 의원들, 시장들과 장관들, 각이한 정당과 운동 대표들 즉 실지에 있어 세계 방방곡곡에서 대표들이 왔다. <평화를 꿈꾸는 한인들>이 포럼의 기본 구호로 되었다. 기본 보고자들이 있었다. 다음 포럼참가자들은 제각기 자기 나라에서의 사업경험을 나누었고 평화에 협조함에서 외국의 한인정치가들의 역할을 토의하였다. 하원의원들은 테마를 가지고 토의하는 공간에서 자기의 활동에 대해, 정치적 성과에로의 길에서 여러 나라들에서 부닥치게 되는 난관에 대해 이야기하였는바 이것이 특히 여성-정치인들에게 관계된다. 그런데 이런 행사에서 공식적 부분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조직자들은 아주 좋은 사업형태를 선택하였다. 그에 의해 포럼참가자 각자나 포럼 손님과 교제할 가능성이 있었다. 이런 교제는 물론 아주 유익한 것이였다.
- 포럼의 기본 목적이 무엇이였나요?
- 외국 한인정치인 국제 망을 조성하고 한인사회의 정치적 활동을 공고화하는 것이였습니다. 문제가 얼마나 절박하고 긴급한것이였던지 포럼과정에 참가자들이 더 많아졌습니다. 포럼은 온-라인과 오프-라인 형태로 진행되었습니다. 이것은 지구촌의 방방곡곡에서 많은 참가자들을 이끌어 들이며 여러가지 원인이나 사정으로 서울에 오지 못한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볼 수 있게 했습니다.
-아는바와 같이 세계의 여러 지역에 사는 한인들은 제각기 자기의 특별한 사고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제하는 과정에 그 사고력의 차이가 느껴지던가요?
-이와 같은 대표적인 포럼에서 그가 사업하는 분야에서 널리 알려졌거나 동료들 사에에서 인정을 받는 사람들이 모두와 아주 친절하고 솔직히 교제하는 것이 나를 놀라게 했습니다. 그 분들은 아픈 문제점에 대해 그들의 나라에 있는 문제에 대해 로골적으로 말했습니다. 이런 교제는 여러 나라 정치인들에게 한해서 아주 좋은 모범으로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누구의 발언이나 인물 자체가 당신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나요?
-즉시 모든 것을 이야기할 수 없는데요…예를 들어 포럼에서 변 니꼴라스 하원의장이 발언했는데요 그는 17세에 …되었고 19세에는 아마 자국에서만 아니라 세계에서 아르헨티나 대통령의 …되였습니다. 오늘 그의 나이가 26세입니다.
-짧은 기간에 다른 공식적 상봉도 있었겠지요?
-물론이지요! 카자흐스탄의 그리 크지 않은 우리 대표단이 서울 방문의 범위에서 주대한민국 카자흐스탄 대사 바끠트 쥬센바예브의 초대를 받았습니다. 아시다싶이 우리가 금년에 큰 기념일 즉 카자흐스탄과 한국간 외교관계 수립 30주년을 맞이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이미 진행된 행사와 앞으로 진행됭 행사에 대해 이야기 하였고 교육, 보건, 기업활동과 문화 분야에서 한국과 카자흐스탄간 협조 문제들을 토의했습니다.
-당신의 발언도 포럼참가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고 들었는데요…
-아마도 고려인들이 어떻게 카자흐스탄에 오게 된 사연을 잘 모르는 나라들이 아직 있기 때문에 그런것 같애요. 나는 먼 1937년에 원동으로부터 카자흐스탄에 강제이주된 자들의 삼세입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자세한 사연을 알고 싶어했지요. 하긴 나는 주로 고려인들이 어떤 분야에서, 어떻게 성과적으로 일하고 있는가에 대해, 카자흐스탄에 고려인협회가 있고 고려인들에게 극장과 신문사가 있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전통적 문화가 살고 있고 우리가 역사의 페이지 속에서 사라지지 않았으며 자기의 전통을 지키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선조들이 훈시한 대로 일하고 있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주지하는 바와같이 카자흐스탄에서는 고려인들에 대한 이미지가 좋습니다. 고려인들을 근면한 사람들로, 나라에 한해서 고귀한 로작을 쓰는 유식한 학자들로 알고 있습니다.
-정치포럼이 테마를 떠나서 한 가정의 사연을 회상했지요…
-예, 한 순간 테마를 벗어났습니다. 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원동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된 많은 고려인들과 마찬가지로 어떻게 1937년도에 크슬오르다로 강제이주되어 그 곳에서 새 삶을 가꾸기 시작했으며 자식들을 키우면서 새 고장에 적응한데 한데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저의 할아버지 한 위탈리 아파나시예비치는 경제분야의 유식한 전문가였습니다. 그는 빠블로다르 주 통계국에서 상급경제사로 근무하다가 은퇴하였습니다. 지금 할아버지의 나이가 97세입니다. 동포들은 저의 이런 이야기에도 관심을 돌렸습니다. 저의 대의원 활동에 대해 질문을 한 것은 물론입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포럼에 참가하다보니 어느새 귀국할 때가 되였지요, 이해가 되는구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를 구경할 짬이 있었습니다. 포럼참가자들의 여유시간과 소원을 고려하여 관광을 조직했습니다. 한국은 주야간 생활이 계속 들끓으니까요. 포럼이 끝난후에 저녁 늦게 가 볼 곳이 많았습니다. 한국에는 모든 것이 다 재미있으니까요! 지어 작은 레스토랑, 카페도 한식을 장만해서가 아니라 제각기 설립되였던 사연이 있으니까요, 그런 이야기를 듣기가 재미있습니다.
-보통 여성으로서 모국에서 무엇에 가장 크게 감탄했습니까?
-간단히 말한다면 한국에서는 퇴근하고는 누구도 집에 서둘러 가지 않는것 같습니다. 회사 사원들끼리 또는 대학동창생들이 모여서 카페에서 저녁식사를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눕니다. 주위 사람들이 다 친절하고요 도시가 안전합니다. 거리들이 깨끗하고 곳곳에 화초와 푸른 식물들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사람들에게 대한 배려를 말해 줍니다. 예를 들어 도시의 네거리들에는 비와 햋볕을 막아주는 큰 우산들이 있습니다. 식품가게들이 주야간 영업하기에 편리합니다. 새벽 5시까지 영업하는 의류가게도 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길이 막히지 않을 때 조용한 시간에 편안하게 가서 옷을 골라 구매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휴일을 일부러 이 목적에 이용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또 한가지 주목을 이끄는 것은 한국에는 카페, 레스토랑, 빠가 우리 도시에서처럼 일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윗층에 있더라구요…
- 웨라 알렉산드로브나,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10년전에 한국에 다녀온적이 있지요. 이제는 길이 열려서 자주 다닐 테지요, 하여튼 우리가 이것을 기원합니다. 그리고 우리와 연락을 끊지 않을테지요?
- 그럼요, 감사합니다. 나는 정든 우리 신문에 항상 만족을 품고 인터뷰를 합니다.
진 따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