뻬뜨로빠블롭스크에서는 모든 것이 손바닥 같이 빤히 보인다. 그리 크지 않은 도시라서 관광객들에게는 한 눈에 안겨온다. 고려인들이 이 곳에 비교적 적게 살고 있다. 때문에 카자흐스탄고려인협회 젊은 지역분회장 한 알렉세이가 실지에 있어 가정마다 잘 알고 있다. 전화를 하여 인원이 적은 사회단체의 사업에 대해 알아보려고 만나자고 했다. 우리는 일거 양득을 얻으려고 했다 – 담화를 하는과정에 음산한 가을 날에 공화국 경절에 준비하노라고 바삐 보내는 분회 회원들과도 면목을 익히기로 했다. 친선회관에서 우리의 담화가 시작되었다. 알렉세이 예브게니예비치는 아주 활기있고 사교성이 많은 분이였다. 그는 뻬뜨로빠블롭스크의 다른 민족문화 중앙들과 친절하게 지내며 서로 도와주면서 일하고 있다. 진 따마라 알마티-뻬뜨로빠블롭스크-알마티 실지에 있어 그랬었다. 우리가 카자흐스탄폴스카협회 분회 부위원장 왈렌찌나 꼬레녜바의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우리에게말했다:
-반갑습니다, 어서 들어 오세요! 알렉세이는 저의 친구입니다. 알렉세이는 동정심이 많아 모두가 그를 존경합니다. 스폰서 원조를 해 주어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계속 하고 싶습니다. 우리에게는 출장을 다닐 돈도 없으니까요. 알렉세이가 도와주어서 내가 회의에 다녀왔거던요. 어려움이 있으면 항상 알렉세이를 찾아갑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화목하게 지냅니다. 저도 다른 소수민족문화 기관의 도움을 받을 때가 있고요 – 알렉세이가 변명하듯이 말한다.
우리는 몇몇 소수문화단체 열성자들과 잠간 담화를 한 후에 오늘 작은 고려인 소수문화단체가 어떻게 지내는가고 회장더러 물어보았다. 분회에는기본조직자와열성자가2-3명이고 원로들이 몇명이 된다. 건강이 허락하면 원로들이 어떤 위임을 실행하면서 도와준다고 한다.
-알렉세이, 그렇게 적은 힘으로 어떻게 뻬뜨로빠블롭스크에서만 아니라 공화국의 각이한 수준에서 진행되는 행사에서 고려인 문화를 대표합니까? 귀 분회의 열성자들이 얼마전에 K-Pop 콩쿨에서도 공연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요, 그런즉 힘이 있다는 말입니까?
- 우리는 모든 사업을 조직적으로 합니다. 김 제냐와 한국에서 온 선교사 박순희가 나를 적극적으로 도와주는데요 박순희는 이미 20여년을 빼뜨로빠블롭스크 시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 분은 잠간 이 곳에 왔다가 일생을 여기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지금 60고개를 넘었는데 카자흐스탄국적도 받았습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선교사에게서 한글을 배운 학생들 중에는 한국대학에서 공부하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자기가 하는 일에 모든 심혈을 다 쏟아붓고 있습니다. 3년동안에 러시아어도 배워서 우리에게는 아주 귀중한 전문가입니다. 글을 가르치면서 돈을 절대 받지 않거던요. 박순희 선교사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할 수 있습니다.
행사에 대해 말한다면 우리에게는 젊은 고려인들이 부족했습니다. 바로 그 때 모국어를 배우고 민족의 문화에 관심이 있는 젊은이들이 우리에게로 왔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그저 등장하는 행사에는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문화에 진심으로 관심이 있으며 그런 지식이 관중에 필요한 행사들에 참가했습니다. 원로들을 축하하거나 도와주는 행사에는 내가 직접 참가합니다. 이 모든 행사는 카자흐스탄고려인협회와의 밀접한 연계하에 진행됩니다.
코스타나이에서 진행된 콩쿨에 참가한 것이 뜻밖이였습니다. 제냐가 콩쿨에 참가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누가 참가할건데?>라고 물었습니다. 알고본즉 도라마와 K-Pop 애호가가 단합하여 (근 17명) 온-라인의 조건에서 춤을 연습한다는 것입니다. 보시다싶이 모든것이 다 조직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속에서 울려나야 합니다.
-당신이 어떻게 이런 특이한 소수민족 단체의 지도자로 되었습니까?
-저에게는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90년대에 문화중앙이 있었는데 그것을 저의 삼촌 심 펠릭스 알렉세예비치가 지도했습니다. 고려인 운동이 발생할 그 무렵에 우리 친척들이 다 삼촌의 집이나 다른 집에 모여서 노래도 부르고 화투도 놀았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삼촌이 단체를 만들어 그 단체가 자기의 중요한사명을 수행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중요한 사명이란 카자흐스탄에서 민족문화 발전에 협력하는 것입니다. 다음 우리 아버지가 이 단체를 지도했습니다.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떠나셨습니다. 때문에 나는 고려인 단체가 형성된 첫날부터 그 속에 있었습니다. 시내 광장에서 모든 민족들과 함께 명절을 쇠였으며 서로 민족요리를 나누어 먹어보았으며 호기심을 품고 민족음악을 듣고 춤을 구경하였습니다. 다음 우리 청년단체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가했습니다. 때문에 내가 회장으로 되였을 때 마치 자기 가정으로 들어간듯 협회에서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가정에 대해 좀 이야기해 주세요…안해는 전공이 무엇이고 자식들이 몇입니까?
-안해는 고려인이 아니고 추와스인입니다. 순전한 추와스 여자가 아니고 혼혈 (폴스카, 유태)입니다. 최근에 레스토랑 비즈니스를 하면서 실무 여성동맹에 적극적으로 참가하고 있습니다. 자식들 말입니까? 나는 농담으로 아들은 카자흐인이고 딸애는 따따르인이라고 합니다. 아직 다 어립니다. 아들애는 성격이 쾌활하고 직선적인데 스포츠를 좋아합니다. 스포츠 경기에 참가하여 표창도 이미 받았습니다. 딸애는 어리지만 판단력이 있고 웃기도 잘합니다.
-또 다른 사업방향이 있다고 했었지요?
-그것이 사업방향이 아니라 우리 주의 고려인들의 생활만 주시하는 것이 아니라 명예에 관계되는 문제입니다. 나는 우리 주내 고려인들이 어떻게 사는것만 주시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 경우가 나타날 때에는 그에 간섭합니다.
-그런 경우가 많은가요?
-다행하게도 없습니다. 혹시 있다해도 그 사람자체의 잘못은 없을 때도 있지요. 그런 경우에는 법률가를 찾아서 도와주도록 합니다.
-모두에게 이 질문을 하는데요 당신은 모국어를 아시나요?
-많은 고려인들과 마찬가지로 저에게도 러시아어가 모국어로 되여 있습니다. 자식들은 모국어를 꼭 배우도록 할 것입니다. 문화에 대해 말한다면 우리는 카자흐스탄의 임의의 문화를 멀리하지 않고 다받아들입니다 – 마슬레니짜, 설날, 하누끼, 빠스하, 등 모든 민족의 명절을 같이 쇱니다. 언어에 대한 나의 태도는 실천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 때 스페인에서 살 때 스페인어로 말했습니다. 그들의 언어가 어렵지 않습니다. 영어는 학교에서부터 성적이 좋았습니다. 내가 공부했던 뻬뜨로빠블롭스크 제 17호 학교를 필한 아이들은 영어를 자유롭게 했습니다. 카자흐어? 카자흐스탄에 살기 때문에 물론 알고 있지요. 내가 한 2년을 아스타나에서 일했는데 그 때나와 카자흐 말만 했습니다. 후에 카자흐어가 나에게 길을 열어주고 많은 생활상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모국어에 대해 말한다면 한번 한국에 갔었는데 알아들을 수 있었고 내가 뭘 원하는가 설명할 수도 있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러니 초보적 지식이 쓸모가 있었거던요. 민족문화에 대해 말한다면 내가 절대 문화와 멀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하는 일과 교제가 이에 도움을 줍니다. 그리고 나의 뿌리에 대해 항상 기억하고 있는것도 도움이 되지요…
이와 같은 좋은 이야기로 우리가 대화가 끝났다. 그래서 나는 그 단체에 사람들이 얼마가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의 품성이 어떤가가 중요하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