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븰라이 한 명칭 카자흐국제관계 및 세계언어대 ( 창설되였을 때의 명칭은 외국어대) 는 1941년에 창설되었다. 대학에는 인문학, 외국어, 국제관계 분야에 필요한 실력있는 전문가들을 양성하기 위한 모든 조건이 조성되어 있다. 경제성능이 있는 이런 인재들을 졸업시키는 것이 상기 대학의 활동의 기본 목적이다. 이 과업을 성과적으로 수행하는 대학은 그 동안 국제적 공인을 받았으며 고상한 표창도 받았다. 예를 들어 젊은 세대의 지적 발전에 기여를 한데 대해 <소크라테스>표창, 켐브리지과학협회의 명예칭호 <교육의 리더>, 과학에 한 기여에 대해 국제표창 <로모노소브>훈장 등 기타 여러가지 표창을 받았다.
이 대학에서 이미 10여년을 한국에서 온 장호종 객원교수가 근무하고 있다. 우리는 대학 교무실에서 장교수를 만나 인터뷰를 하였다.
-장교수님, 수고많으십니다. 전공이 무엇이였으며 해외 객원교수로 오게 되신 사연을 좀 알아보았으면 합니다.
-예, 저는 서울에서 태여났는데 아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필했습니다. 한국국제교류재단의 해외객원교수 공개모집 광고를 보고 노보시비르스크를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러시어어를 몰랐으면 교육을 시키기가 좀 어려웠을 텐데요? 영어로 시간을 치르셨나요?
-저도 그래서 걱정스러웠습니다. 그런데 대학에 와 보니 학생들이 한글을 어느 정도 소유했더라구요, 특히 3, 4, 5학년생들 말입니다. 물론 선생님이나 교재가 부족해서 어려움이 있기는 했지요. 복사기, 컴퓨터, 프린터 같은 것이 부족했습니다. 그 시기에 러시아의 경기가 좋지 않아서 그랬었다고 생각합니다.
-교수님이 보기에는 CIS나라 대학생들과 한국 대학생들의 차이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한국에서는 학생들이 대학에서 공부면서 대학졸업후 취직문제에 대해 미리 신중하게 생각하는데 현지 학생들은 이미 4학년인데도 졸업후 어디에 취직하며 무슨 일을 할것인가를 모르고 있더라구요…
-고려인들에 대해 언제부터 알고계십니까?
-한국에서 어느 정도 알기는 했지만 노보시비르스크에 와서 고려인 선생님들에게서 강제이주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었습니다. 강제이주가 고려인들의 큰 비극이였다고 봅니다.
-노보시비르스에서 일했을 때와 알마티에서 일하는 때를 비교해 본다면?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일을 시작할 때가 물론 힘들었지요. 언어장애로 적응하기가 힘들었지만 전반적으로 본다면 노보시비르스크는 모든 것이 너무 러시아화되여 있고 또 춥기도 하구요. 알마티는 기후도 온화하고 고려인들도 많이 살고 있으며 또 카자흐인들도 동양인들과 외모가 비슷해서 타국에 와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분위기 자체가 온정을 주는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카자흐스탄의 큰 대학마다에서 한국교수들이 근무하고 있는데 한국어를 전공하는 학생수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한국교수들의 기여가 크다고 생각하는데요…
-여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우선 중앙아시아를 휩싼 <한류>의 바람이 첫째 원인이라고 간주합니다. 왜냐하면 한류로 인해 한국을 바라보는 입장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는 역경속에서도 모국어와 풍습, 전통을 보존해온 고려인들의 공로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봅니다. 고려인들에 의해 이미 토대가 닦아져 있었으니까요…
실지에 있어 한국어를 배우기를 원하는 학생수가 해마다 늘어나는 것을 저도 직접 확인하고 있습니다. 내가 알마티에 왔을 때만 해도 한국학과에서 한국어를 전공하려는 학생이 70명이였다면 현재는 380명이나 됩니다.
-김 울리야나 교수의 말에 의하면 중아시아 한국학교수협의회가 창설된데는 장호종 교수가 많이 협력하셨다고 하던데요…협의회의 목적은?
-중아시아나라에서 근무하는 한국학과 교수들이 서로 교류를 하면서 한국학에 관계되는 학술회의나 기타 행사를 함께 진행하는 것이 저의 소원이였습니다. 올해 6월에 타스켄트 동방대에서 학술회의가 진행되었고 다음 해에는 다른 도시에서 진행될 것입니다.
-교수님이 문학을 전공하였으니 러시아고전 작가들의 작품도 읽었을 텐데요 어떤 작가들의 작품에 관심을 돌렸습니까?
-푸스킨의 시,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작가들의 창작품을 알고 있습니다.
-교수님이 가르친 학생들이 졸업한 후에 주로 어느 분야에서 근무하는지요? 그리고 유학을 가는 학생들은 어떤 대학에서 공부합니까?
-은행, 비즈니스, 교육계에서 근무하는데 어떤 때에는 취직하기 위해 추천서가 필요하면 우리 대학을 찾아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유학을 가는 학생들이 마음대로 대학을 선택하기가 곤난합니다. 왜냐 하면 보통 초대하는 재단이나 기타 기관은 유학생이 공부할 대학을 짚어주기 때문입니다.
-교수님, 마지막 질문인데요 지금까지 생활하여 오시면서 추억에 가장 깊은 흔적을 남긴 감동적인 일이 있었다면?
-내가 노보시비르스크 대학에서 한글을 가르치기 시작했을 때 열심히 배우려고 애쓰던 학생들의 모습이 좋았구요, 호기심에 찬 그 애들의 빛나는 눈동자를 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장호종 교수의 동료인 한국학 센터 소장 김 울리야나교수께 장교수에게 대해 몇마디 말해줄 것을 부탁했다.
-장호종 교수는 아주 겸손하고 인간성이 많은 분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학과의 이익을 앞세웁니다. 우리 학과가 최근에 그란트를 딴 것도 장교수님의 공로입니다. 그래서 그 분이 우리 젊은 교수들 사이에서 스스로 리더로 되었습니다. 학생들과 대화를 할 때 목소리를 높이는 것을 한번도 듣지 못했습니다 – 울리야나 안드레예브나가 말했다.
장호종 교수님께 장래 계획에 대해 물어보니 앞으로 5년 또는 기껏해서 10년쯤 일하고는 자유시간을 가지겠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취직문제가 적절한데 젊은 교수들에게 자리를 내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고 말한다. 장교수님의 이 말씀에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대한 배려를 느낄 수 있었다.
남경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