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누구에게 있어서는 언어를 배우는 것이 취미이고 다른 사람에게 한해서는 일생에 필요한 일이다. 언어를 잘 소유한 사람을 볼 때면 그 언어를 소유하는데 알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었겠는가하는 생각이 스스로 난다. 미나라 세리꿀로바는 한번 사랑하게 된 과목에 일생을 이바지하는 사람이다. 중앙아시아에서 한국대 총장이며 한국학 교사 중앙아 협회 회장인 미나라 아나르베꼬브나는 창작적 개성에 특유한 모든 긍정적 품성외에 재미있는 대화자이기도 하다.
- 미나라 아나르베꼬브나, 당신의 한국어 연구 스토리가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 소련이 붕괴된 후에 청소한 독립국들에는 외국어를 소유한 민족인재들이 부족한 것이 문제거리로 되었습니다. 독립국들이 외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그 곳에 자기 대표부 ( 대사관, 영사관 )를 열기 시작했습니다. 소련에서는 주로 모스크바와 상-페테르부르그 대학들에서 공화국들을 위한 전문가들을 양성했습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런 전문가들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니 자지방에서 자체 인재들을 양성할 절박한 필요성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1991년에 동양학부가 열려 거기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중학교에서 공부할 때부터 다른 민족들의 문화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때문에 한국어 학부가 열렸다는 것을 알게 되자 직업선택이 문제로 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아버지가 한국어를 배우라고 주장했습니다. 그것은 내가 장래에 외교관이 되여 외무성에서 일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한국이 경제적 분야에서 급속도로 발전하는 나라 즉 <아시아의 호랑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이미 그 때부터 한국어 소유의 전망을 보섰던 것입니다.
- 현재 한국어를 훌륭히 소유하셨는데 대학에 입학하였을 때 어떻게 언어를 배우기 시작했는가 기억이 나세요?
- 대학에서 공부할 때 언어 소유에 몽땅 몰두하여 언어연구와 연관된 수업은 하나도 빼놓지 않았으며 시간이 가는줄도 모르고 밤늦게까지 도서관에 앉아있었습니다. 언어를 배우기가 어렵지 않았습니다. 첫 해에 서울에서 온 혜련이란 아가씨가 우리를 가르쳤는데 학생들은 그 녀를 아주 좋아했습니다. 무슨 바람이 불어 1991년에 그 아가씨가 키르기스스탄에 오게 되였는지 모르겠지만 우리의 운이 아주 좋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수년이 지난 후에 나는 그 녀가 방언이 하나도 섞이지 않은 순전한 표준어로 말했고 유식한 전문가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일생을 한국의 수도에서 살았기 때문에 우리는 수업의 첫 날부터 서울에서 온 유식한 젊은 교사의 말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후에 언어 수준이나 교수방법이 보다 약한 다른 교사들이 우리를 가르쳤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영향을 주지 않았습니다. 왜냐 하면 좋은 토대가 이미 축성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 한국어가 지난 해에 비하여 어느 정도 인기가 더 높아졌다고 봅니까?
- 한국어의 인기가 상시적으로 높아가고 있는데 그것이 좋은 일입니다. 우리는 한국에 대학생들을 많이 공부하러 보냅니다 – 그 애들이 대학원 석사과정, 학사과정을 통과하도록 말입니다. 나는 우리 대학생들이 한국에 가서 저와 같은 지식경험을 얻기를 원했습니다. 게다가 서울에서 지내는것만 해도 일생의 추억입니다. 나는 서울을 매우 좋아합니다. 서울을 나의 도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서울에서8년을 살았는데 실지에 있어 젊은 생을 서울에서 보낸 셈이지요. 나는 모든 대학생들에게 이것을 기원합니다.
-당신에게는 한국정치가들의 방문시에 통역경험이 많은데요…공식적 인사들과의 사업이 마음에 듭니까 아니면 과학 또는 교사 활동이 마음에 듭니까?
- 나는 대학 2학년 때부터 통역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술어를 잘 몰라 직관적으로, 짐작하여 통역했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겐 그것이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내가 경험을 계속 쌓았으니까요. 소련이 붕괴된 이후 첫 년간에 한국인들이 거의 들어오지 않습니다. 통역으로 일할 가능성이 없었기에 임의의 통역을 했고 때로는 돈을 받지 않고도 통역을 했습니다. 내가 한국인들과 같은 언어로 대화하고 그들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찼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 나는 희망했듯이 키르키시야공화국 외무부에서 직업적 출세를 시작했습니다. 1996년에 내가 한국어를 아는 외무부의 유일한 직원이였습니다. 1996년에 아스카르 아까예브 통령의 첫 한국 공식방문이 있었습니다. 나는 외무부와 대통령 행정부 사이에 뛰여다니며 일했습니다. 고위급 수준에서 상봉이 많았으니 일거리가 태산같았습니다. 이렇게 나는 회담진행에서 통역원의 중요한 경험을 축적했습니다. 일년 후에 나는 한국정부로부터 KGSP장학금을 받고 공부할 수 있는 첫 장학생으로 되었습니다. 나는 한국에서 공부하면서 대통령 행정부, 정부 요원들과 장관들, 대의원들의 공식적 또는 비공식적 방문을 통역하면서 키르키스스탄 영사관을 도와드렸습니다. 나는 공식적 회견이 있을 때마다 한국과 키르키스스탄간 쌍방관계의 미래가 나의 통역의 질에 달렸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통역으로 한국의여러곳을 다녔고 수많은 중요한 회견에 참가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 모든 것은 한국인들의 생각과 국가체계를 더 잘 이해하도록 나에게 지식과 연계를 준 귀중한 경험으로 되었습니다. 한국인들의 사고방식을 알고 있는 나는 콘텍스트와 상황에 따라 어떻게 더 낫게 통역해야 하는 가를 알았습니다. 이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이 활동에 의해 통역이 나에게 중요하고 흥미있는 일로 되었습니다. 과학적 사업에 대해 말한다면 이것이 또 하나의 나의 열망과 사랑으로 되었습니다. 게다가 생활의 그 어떤 단계에서 멈추고 자기의 지식을 자기 학생들에게 넘겨주어야 합니다. 만일 자신을 직업의 전문가로 간주한다면 경험을 나눌 의무가 있으며 자기의 모범으로 젊은이들을 새로운 탐구와 발명에로 고무시캬야 하며 그들에게 방향을 잡아주고 추진시켜야 하는바 바로 그들에게 과학의 미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원인으로 내가 최근 10년은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 키르키스스탄대통령 메달 ( 기념 은메달), 한글과 한국어 발전에 한 기여에 대한 한국대통령 메달을 비롯하여 당신에게는 고상한 표칭이 많으며 당신은 딸라스 주 명예공민입니다. 그 외에도 표창이 많은데 그중에서 가장 소중한 표창이 어떤 것입니까?
- 표창 마다가 소중한데요 짚어야 한다면 한국대통령의 메달과 영예표창장입니다. 한국인들이 지식과 교육을 얼마나 높이 평가하는가를 보고 감탄했습니다. 조선에서는 옛날부터 고시를 하고는 자기의 사회적 권한을 높이거나 변경시킬 수 있었으며 지식을 모두가 항상 높이 평가했습니다. 바로 지식과 교육에 대한 숭배가 한국을 오늘의 대한민국으로 만든 것입니다. 나는 이 표창을 받기 위해 대학 일학년 부터 열심히 노력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 하면 다른 국가의 대통령에게 자기 사업을 이렇게 인정받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 한국학 교사협회가 어떤 사업을 하는지 궁금한데요…
- 중앙아시아고려인들에 대한 책을 펴낸 역사학 준박사 백태현 교수가 한국학과 한국어 교사협회를 창설했는데요 그 분이 쓴 책이 영어와 일어로 번역되었습니다. CIS나라 고려인 디아스포라의 생활을 연구하는 대학생들과 대학원생들이 오늘도 이 책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백교수는 중앙아시아에서 25년동안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많은 학사과정생과 석사과정생을 양성했습니다. 한국어의 인기가 자라남에 따라 한국어 대학, 학부와 강좌가 많아졌으며 따라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교사들의 수도 늘어 났습니다. 교수의 질을 높이며 한국 또는 다른 나라 동료들과 경험을 나누며 젊은 교사들의 자격수준을 높이고 지역별 컨퍼렌서와 기타 행사를 진행하기 위해 학자들의 노력을 단합할 필요성이 생겼습니다.한국학 교사협회가 이 모든 사업을 조직합니다. 내가 협회를 맡기전에 박 넬리 세르게예브나가 오랜 기간 협회 회장으로 활동했습니다. 나는 지난해부터 협회를 지도합니다. 이것은 큰 영광인 동시에 책임성도 큽니다. 저에게 베풀어준 신임에 보답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 협회 회장직의 사업에서 성과를 기원합니다. 더군다나 우리 전문가들의 수준이 협회의 사업에 달렸기 때문입니다. 인터뷰에 시간을 내여 주셔서 감사합다!
강 올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