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코스타나이 출신의 저명한 고려인 시인이자 기자인 민 표도르 씨는 "30여 년에 걸친 코스타나이 주 고려인 민족문화연합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 회장이 탄생했다"며 김 울리야나 코스타나이 주 고려인 문화센터 회장에 대한 칼럼을 기고한 바 있다.
오늘날 18개에 이르는 코스타나이 주 민족회의 산하 여러 민족문화연합들의 지도자들 중 유일한 여성 회장이기도 한 김 울리야나 회장. 지난 2018년부터 코스타나이 주 고려인 문화센터에 몸담으며 열정적인 활동을 해온 그녀 덕분에 오늘날 코스타나이 지역민들은 '코스타나이 설날 행사', '4원소 환경보호 페스티벌', '청소년 K팝 페스티벌' 등 다채로운 문화행사들을 체험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그녀가 주도한 환경보호 페스티벌의 일환으로 코스타나이 시 소재의 '카자흐스탄 독립 25주년 기념 공원' 인근 강변도로에는 '친선의 골목'이 조성되었으며, 시 행사 규모로 시작한 K팝 페스티벌은 그 폭발적인 인기에 힘입어 올해에는 코스타나이 뿐만 아니라 타 지역 예술인들이 대거 참여할 예정이다.
본 인터뷰를 시작하며 김 울리야나 회장은 "한국의 신세대 문화가 오늘날 카자흐스탄에서 민족에 관계없이 청년층 사이에서 크나큰 인기를 얻고 있다는 사실이 매우 기쁘고 뿌듯하다"고 말하면서도 "모두가 마치 한 가족처럼 평화롭게 어우러져 살아가는 우리 다민족 국가 카자흐스탄에서 굳이 '민족'이라는 단어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있겠느냐"며 너스레를 떨었다.
"당장에 저부터가 그에 대한 더할 나위 없는 예시잖아요. 저의 친할머님 -베라 이바노브나 여사-께서 코사크 민족 출신이셨거든요. 키도 크고 늘씬한 미녀이셨죠. 바로 그런 할머님의 체형을 제가 그대로 물려받았고요 (웃음). 저를 실물로 접하는 분들은 대개 제 키가 고려인 치고 크다며 놀라곤 하세요."
고려인, 카자흐, 코사크 민족의 피가 흐르는 혼혈인 답게 외모에서도 이국적인 매력이 물씬 풍겨지는 그녀가 다민족 국가 카자흐스탄의 일원이자 '한민족'의 일부로써 살아가며 느끼는 국민정체성과 민족정체성, 그리고 자신의 뿌리에 대해 들려준 이야기들을 독자 여러분께 공개한다.
제 조부모님께서는 본래 크즐오르다에서 사시다가 잠불(현 타라즈)로 이주하셨습니다. 할아버님 -니콜라이 옹- 가족이 남부 카자흐스탄에 이주하게 된 것은 당시 대다수의 고려인들과 마찬가지로 1930년대에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던 소수민족 억압과 강제이주 때문이었죠. 저의 할아버님은 생전 저희에게 자주 이야기해 주셨어요, 그 길고 험난했던 강제이주 과정을 당시 대가족이었던 할아버지네 일가가 모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저희 증조 할아버님께서 선견지명으로 언젠간 다가올 그 날을 대비해 미리 비상식량으로 준비해 두셨던 염장고기 덕분이었다고요. 통 속에 고이 보관해 둔 그 염장고기가 있었기에 어린이, 어른들 할 것 없이 할아버님네 일가는 배고픔과 질병에 시달리지 않을 수 있었다고 해요.
저의 할아버님께서는 평생을 학교에서 러시아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교장직을 수행하셨어요. 조선말을 잘 구사하셨던 할아버님께서는 특히 '고려일보'를 즐겨 읽으셨지요. 신문을 새로 받아 보실 때마다 그 속에 실린 내용을 구석 구석 탐독하곤 하셨답니다.
할아버님에 관한 또 다른 기억을 얘기하자면, 당신께서는 첫 수확한 무를 무척이나 좋아하셨어요. 주로 그것으로 시래기 등을 함께 잘라 버무린 '고려식 샐러드'를 맛있게 만드셨죠. 그 뛰어난 요리 감각을 바로 저희 큰 언니 스베틀라나가 물려받았답니다. 생전 할아버님이 그러셨듯 한식을 무척 좋아하는 우리 언니는 언제나 특별한 정성을 들여 한국음식을 요리하지요. 그래서 우리들은 한민족 명절날에는 보통 언니네 집에 모이곤 합니다.
참고로 저희 언니 또한 저처럼 다문화 가정을 꾸리고 있답니다. 저희 형부는 아제르바이잔 혈통이기에 우리들은 '우라자 바이람', '쿠르반 바이람'과 같은 이슬람 명절날에도 언니네 집에 모여 이러한 날들을 기념하지요.
러시아, 카자흐 민족 명절을 기념하는 가족모임은 주로 제가 담당하고 있어요. 그도 그럴 것이 제 남편은 러시아인, 외할머님은 카자흐인이거든요. 이렇듯 저의 뿌리, 핏줄, 가족관계 등에 대해 타인에게 이야기할 때면 '우리의 삶은 우리가 감히 가늠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참으로 오묘한 운명의 실들로 촘촘히 엮여 있구나' 하고 새삼 생각해보게 되네요. 다만 개인적으로 이것 하나만큼은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 할 수 있어요. 바로 '화평과 화합은 곧 우리의 전부'라는 것이에요.
외할머님이 살아계실 적에 우리들은 나우르즈 명절 때마다 당신께서 손수 차리신 베쉬파르막, 바우르삭, 나우르즈 코제 등의 요리로 가득 찬 풍성한 식탁 앞에 모이곤 했지요. 지금은 제가 그 역할을 넘겨받아 집안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셈이고요. 12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마저 전쟁터에 나가 계시느라 너무도 힘든 시기를 홀로 꿋꿋이 감내할 수 밖에 없었던 할머님께서 생전 우리에게 심어주신 인생의 가치관, 그리고 몸소 본보기가 되어 보여주셨던 지혜를 나침반 삼아 제가 이어받은 임무를 수행해 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할머님은 12세의 나이에 생계를 위해 첼랴빈스크 인근의 탱크 생산 공장에 들어가 노동을 해야만 했어요. 게다가 홀몸도 아니고 돌봐야 하는 남동생까지 딸린 상황이었죠. 늘 배가 고프다며 먹을 것을 달라고 칭얼거리는 동생에게 "곧 전쟁이 끝날 것이고 그때가 되면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빵을 원 없이 배불리 먹을 수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며 달래던 그 작고 가냘픈 소녀의 내면에는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기운이 움트고, 갖은 고난을 견뎌낼 힘이 생길 수 있었을까요? 전 개인적으로 자주 이것에 대해 생각하곤 합니다. 그런 정신적인 힘, 의지를 할머님께서는 그 어린 나이에 이미 지니고 계셨었다는 점이 그저 경이로울 따름이지요.
아무튼 그런 생활이 계속되던 어느 날, 할머님께서는 참다못해 무작정 시내에 있는 어느 군부대를 찾아갔다고 해요. 그리고는 그곳에 있던 군인들에게 "용건이 있으니 장군을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했대요. 물론 "장군"과의 만남은 성사되지 않았지만 어린 소녀의 딱한 사연을 들은 군부대 관계자들은 몇 킬로그램의 밀가루와 나무 신발을 내주었답니다. 이후 남동생은 그 나무 신발을 마치 망아지 발굽에서 나는 것 같은 '쩍쩍' 소리를 내면서 신고 다녔다고 해요. 할머님께서는 생전 우리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실 때마다 즐겁게 웃곤 하셨어요. 참으로 명랑하고 삶을 사랑하는 분이셨지요.
저의 고향은 아르칼륵 시입니다. 그곳에서 유년기를 보냈죠. 제게 있어 아르칼륵은 젊음과 번영의 기운이 넘치는 도시로 영원히 기억될 거예요. 당시 그곳의 사회에서는 한창 많은 것들이 새로 지어지며 발전하는 시기였고, 또 국내 각지에서 여러 젊은 전문가들이 모여들던 때였어요. 이후 90년대 들어 전국적인 혼돈의 시대가 시작되고 저희 가족은 코스타나이로 이주해 왔지요. 이곳에서 저는 제 12번 학교를 졸업하고 코스타나이 주립대 화학생물학과에 진학했습니다. 대학 4학년 때 시집을 가서 1남 1녀를 낳았고요. 전공과 관련된 일에 몸담아 본 적은 없네요. 그쪽 일이 "내가 갈 길이 아니구나" 하고 깨닫는 데에는 언젠가 연구실에서 보낸 2주의 시간 만으로 충분했거든요. 대신 저는 남편과 함께 금속제품 제조 관련 개인사업을 했었습니다. 누군가는 이 같은 업은 '남자들이 하는 일 아니냐'고 할 수도 있지만, 전 학창시절에도 기하학 과목을 무척 좋아했고 평소 도면 그리는 것에도 소질이 있었거든요. 저의 이런 자질이 그 사업을 하던 당시에 큰 도움이 됐지요.
이후 사업을 정리하고 2년간 집에서 쉬던 중에 고려인 민족 문화센터에서 활동을 해보지 않겠냐는 권유를 받게 되었습니다. 물론 저는 이미 당시에도 고려인 문화센터나 카자흐스탄 민족회의, 친선의 집에 대해서 들어본 적은 있었지만, 직접적으로 접한 적은 없었지요. 그래서 고려인 문화센터로부터 처음 제의를 받았을 때 뭐라고 답을 해야 할 지 고민스러웠어요. 하지만 이내 조금 생각해보고는 '한번 도전해 봐야겠다'는 결심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2018년 1월 저는 처음으로 친선의 집 문턱을 밟게 되었지요. 제가 주최에 참여한 첫 번째 행사는 '설날 행사'였어요. 그 행사가 화려하고 성대하게 진행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열정 하나로 단 며칠만에 여러 명이 막대기로 조종하는 큰 용 모양의 탈을 혼자서 제작해 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네요. 무용단이 공연 때 입을 의상과 한복도 직접 재료를 구해서 만들기도 했고요. 걱정과 긴장 가득한 마음으로 임한 준비 과정이었지만 다행히 그만큼 행사도 성공적으로 치뤄졌지요.
제가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한 것도, 처음 한국을 방문해서 첫 한복을 입어본 것도, 그리고 한국에 살고 있는 먼 친척을 찾게 된 것도 다 우리 고려인 민족 문화센터에 몸담으면서 이루어진 일들이랍니다.
한국에서 친족들을 찾게 된 계기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언젠가 어느 행사에서 주카자흐스탄 대한민국 대사님을 접견할 때였어요. 그때 대사님 곁에서 수행 비서 역할을 하시던 분이 한국어로 말씀을 하시는 중에 '안동 김씨'라는 말이 몇 번 반복되는 것을 우연히 듣게 되었죠. 순간 관심이 생기더군요. 그래서 통역사분께 그 비서 분께서 무슨 얘기를 하시는 것인지 알아봐 달라고 부탁드렸지요. 자세한 내용을 알아보니 그 비서 분께서 본인이 안동 김씨라는 거예요. 그 얘기를 들은 저는 너무나 기뻤습니다. 사연인즉, 저희 증조부님께서는 생전 저희 아버지께 단 한번도 과거 원동에서 생활하셨을 때의 이야기들을 해 주신 적이 없었는데, 다만 이 말씀만은 수도 없이 반복하셨다고 해요 - "기억하거라, 우리 집안은 뼈대 있고 유서 깊은 명문가, 안동 김씨란다" 라고요. 나중에 알고 보니 실제로 안동 김씨는 과거 조선시대는 물론 오늘날의 한국에서도 유서 깊고 영향력 있는 성씨더군요. 이 가문에서 많은 장군들이 배출되었고, 또 3명의 왕후가 나올 정도로 왕족과도 밀접한 명문가였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처럼 본인의 뿌리에 대해 안다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인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이후 카자흐스탄 고려인 이주사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갖고 면밀히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우리 코스타나이 지역에 고려인들이 나타난 계기에 대해 조사해 보았는데, 과거 원동 지역의 혁명 운동가이자 고려공산당 창립 핵심인물들 중 한 명이었던 남만춘 선생이 바로 이곳, 코스타나이로 유배되었었다는 사실을 알아냈어요. 그는 1938년 10월 내무인민위원회의 '트로이카'에 의해 총살되었죠. 아직까지는 그저 추정에 불과하지만, 그의 시신이 매장된 곳이 현재 키예프스키 촌에 위치한 고려인 묘지라는 설이 있습니다.
올해 우리는 카자흐스탄 고려인 정주 85주년을 맞아 성대한 행사를 개최할 예정입니다.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오늘날 우리는 과거 고려인 이주사에서 자주 쓰였던 '강제이주'라는 단어를 점차 배제해가고 있는 중입니다. 우리들은 이 풍요와 환대의 땅에서 이미 오랜 세월을 살아오고 있으며, 그 과정을 거치는 동안 이곳은 우리의 고국이 되었잖아요. 이제 우리는 이 나라의 일부가 되어 이곳의 발전에도 당당히 기여하고 있으며, 이 땅위에서 저명한 의사, 스포츠맨, 예술인, 사회 공헌가들로 당당히 활동하고 있는 자랑스러운 한민족을 대표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 대목에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분이 있는데, 바로 현 'BK-Stroy'사의 대표이자 전 코스타나이 주 고려인 민족 문화센터 회장이신 김 이고리 로마노비치입니다. 김 대표님께서는 우리 고려인 문화센터와 코스타나이 주 민족회의 뿐만 아니라 지역사회 전체를 위해서도 크나큰 공헌을 하신 분이시죠. 아직까지도 많은 이들이 지난 2016년 김 대표님께서 수 많은 입양아들을 양육하고 있는 툴레게노프 가(家)를 위해 2층짜리 주택을 지어주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을 겁니다. 평소 자신이 하는 선행들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은 꺼리시지만, 늘 불우이웃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반드시 도움의 손길을 내미시는 분이죠. 무엇보다 마지막 순간까지 주저하던 저로 하여금 오늘날 우리 고려인 문화센터의 지도자 역할을 짊어지고 갈 수 있도록 확신을 심어준 존재 또한 바로 이분이시고요. 고려인 문화센터 회장직은 내려놓으셨지만, 여전히 우리가 추진하고 있는 여러가지 업무와 사업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고 계세요. 그렇게 그 분의 도움을 통해 탄생한 프로젝트가 '유늬이 스타트업(Юный StartUp)'이라는 사업이에요. 본 프로젝트는 사회 취약계층에 속한 어린이들과 다자녀 가정 등을 지원하는 취지의 사업으로, 이전에 '나쉬 코스타나이'에서도 매우 상세하게 보도한 바 있지요. 솔직히 말해서 이 사업의 결과물에 대해 완전히 만족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제는 그 장단점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되었어요.
우리 문화센터는 젊은 세대 뿐만 아니라 노년층을 위한 사업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명절 때마다 어르신들을 찾아 뵙고 가을철에는 꼭 추석 행사를 마련하여 모시고 있지요.
인생이 참 얄궂은 것이, 사람은 나이를 한참 먹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의 뿌리, 그리고 가문과 민족의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더군요. 이미 주변에는 그것에 대해 이야기 해 줄 이들이 떠나고 없을 때 말이예요.
그래도 한가지만큼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카자흐스탄 민족회의가 주도하는 업무와 활동에 몸담으며 개인적으로 많은 가능성과 방향성을 발견할 수 있었고, 또한 그동안은 알지 못했던 '내 핏줄'의 새로운 면들과도 조우할 수 있었다는 것을요.
카자흐스탄 민족 화합의 날에 즈음하여 우리 모두에게 평화와 화합, 그리고 선(善)을 기원합니다!
인터뷰 진행 및 정리: 줄피야 나비예바/나쉬 코스타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