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 조’씨 후손인 고려인 아버지와 러시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화가 조 옐레나 씨는 30년이 넘는 창작활동 기간 중 20년 가량의 세월을 카자흐 전통문화가 중심 소재인 작품들을 그리는 데 할애해왔다. 본지에서는 이미 지난해 7월 옐레나 씨를 직접 취재하여 진행한 러시아어 인터뷰를 게재한 바 있으며, 이번 호에는 지난 화요일 카자흐스탄 국영 뉴스포털 사이트 BaigeNews가 진행한 그녀와의 인터뷰를 발췌 및 번역하여 싣는다.
1973년 알마티 태생인 조 옐레나 화백은 고골 예술전문대를 졸업한 후 아바이 알마티 국립대에서 미술을 전공했다. 이후 수년간 본교에서 교직생활을 거친 뒤 직업 화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한동안 정물화 및 풍경화를 중심으로 작품활동을 이어가다 고려인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카자흐 전통문화를 주된 소재로 다루기 시작하며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해온 조 화백을 만나 그녀의 직업관과 소명의식, 그리고 카자흐 전통문화에 대한 생각을 들어보았다.
— 옐레나 화백님은 오늘날 주로 카자흐 전통문화를 소재로 하는 회화 창작을 하고 계신데, 이를 활동 초창기부터 바로 시작하셨던 것은 아니지요?
— 네, 그렇습니다. 사실 제가 원래 가장 좋아했던 장르는 꽃들과 자연의 경치를 담은 풍경화였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문득 깨달은 바가 있었죠. 그 자체로는 물론 멋지고 아름다운 소재이지만, 화가로서의 역량을 온전히 표출하는 수단으로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요. 미술 전문가의 관점에서 보자면 저 스스로도 타인이 창작한 그림을 마주하게 될 때, 흥미와 관심을 가지고 유심히 살펴보며 감상하게 되는 그림들은 인물화나 특정한 장르에 기반한 장면을 다룬 작품들이거든요. 저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미술 애호가들의 대다수가 바로 이러한 시선으로 그림을 감상하죠. 그런 그림들에는 숨겨진 의미, 모종의 역동성, 배경설화나 사연 등 보다 고차원적 요소들이 담겨 있으니까요.
특히 배우 스칼렛 요한슨이 주연을 맡았던 영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Girl With A Pearl Earring)>는 제가 화가로서 가진 시선을 바꾸도록 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어요. 극중 주인공은 오늘날 세상에 잘 알려진 동명의 그림인 '진주 귀고리(한국에서 영화명에는 '귀걸이', 그림명에는 '귀고리'라는 단어로 각각 정식 번역되어 있음 -역자 주)를 한 소녀'의 모델이 되는 이로 나오는데, 예술적인 관점에서 너무나 재미있게 본 영화에요. 이 영화의 제작진은 극중 화가를 비롯한 등장인물들의 모습과 그 시대 특유의 분위기, 인테리어 소품 등을 훌륭히 구현해 내었죠. 영화를 다 보고는 '나도 이런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 전까지 즐겨 그리던 꽃 그림이나 정물화 같은 것들은 결국 그림 속에서 온전한 주체라기 보다는 그저 '배경' 정도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 것이죠. 그림에는 그 외에도 주인공, 즉 인물이 있어야 마땅하다고 봐요. 그런데 사람을 그냥 그려놓으면 별 재미가 없죠. 그림 속에 들어가는 인물들의 모습에는 마치 연극처럼 모종의 줄거리가 부여되어야 하고, 그것을 잘 구현해 낼 '감독'의 손길도 필요해요.
제가 왜 카자흐 전통문화를 주요 소재로 다루게 되었냐고요? 저는 카자흐스탄에서 태어났고, 또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죠. 어느새 저의 가족 구성원들 중에도 카자흐인들이 생겼고요. 화가의 삶 속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으며 흥미를 끄는 요소들이 그의 작품 안에 반영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죠. 카자흐 전통은 —저는 한민족의 성씨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늘 제게 있어 가까운 존재였고, 더 나아가 오늘날엔 저의 일부까지 되어버린 것이고요.
— 오늘날 옐레나 씨가 그리는 작품들의 대다수가 카자흐 전통문화를 주제로 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인가요?
— 그렇잖아도 얼마전 제 페이스북 계정에 고려인 팔로워 한 분이 우스갯소리로 저더러 "이제 고려인보다도 카자흐인에 더 가까워졌다"고 댓글을 남기셨더라고요. 지난 2018년 서울에서 열린 재외한인 화가 전시회에 참가한 적이 있는데, 그때 제가 출품한 그림들 중에도 카자흐 전통문화를 주제로 한 작품들이 포함되어 있었죠. 저는 카자흐스탄에 살고 있기에 일상 속에서 그 문화와 전통을 피부로 느끼고 존중하며 영위합니다.
일례로 제가 지금까지 발표한 그림들 중 가장 빛나는 대표작으로 카자흐 전통 놀이인 '콕파르(염소 빼앗기 경기)'를 소재로 한 작품을 자신 있게 꼽을 수 있는데요, 사실 서구인들의 관점에서 봤을 때 이 전통 놀이는 다소 잔인하고 야만스러운 느낌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소지가 있죠. 그런데 저는 개인적으로 5~6년 전 쯤 지인들과 함께 이식쿨 지역으로 휴양을 갔다가 우연찮게 그곳에서 문화행사로 주최한 콕파르 경기를 직접 관람한 적이 있어요. 경기가 벌어지는 현장 바로 앞에서 구경하고 있노라니 그 어찌나 숨막히고 역동성 넘치는 광경인지, 보다 생동감 있는 장면을 사진에 담아내려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와중에 나도 모르게 경기장 안을 휘젓고 다니는 말들의 발굽 아래로 달려들 뻔 했을 정도였답니다. 그만큼 예술인의 관점에서 너무나 흥미롭고 재미있는 광경이었어요. 물론 이 전통놀이에 속된말로 '피비린내' 나는 요소가 아예 없다는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그것마저도 형언하기 어려운 어떤 경이로움으로 승화시키는 매력이 있어요. 자연과의 융합을 통해 발산되는 역동성과 위력, 힘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요.
당시 그 경험이 어찌나 강한 인상을 남겼던지, 이후 저는 콕파르를 주제로 한 작품들을 10점 가량이나 그렸을 정도랍니다. 이렇듯 화가란 모름지기 영화감독과도 같이 현실을 재창조하는 직업이기 때문에 자신의 작품을 통해 대중들에게 메시지를 온전히 전달하기 위해서는 모든 작업과정 속에 사실성과 확실성이 뒷받침되어 있어야 한다고 봐요.
— 전통문화의 요소가 옐레나 씨의 작품들에 깊이를 더하고 있다고 해야겠네요. 그림들을 보고 있으면 그 안에 담긴 것이 단순한 인물들의 묘사가 아니라 역사 그 자체라는 걸 느끼게 되거든요.
— 기술과 실력 면에서 훌륭한 화가가 된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죠. 하지만 그것 외에도 구체적으로 무엇을 그려낼지 정확하게 선택하는 것 또한 중요해요. 그림은 뚜렷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궁극적으로 그것을 보게 될 이에게 긍정적인 감정이 전달될 수 있도록 해야 하죠. 그림의 질적 수준은 어떠한 의식상태에서 어떤 주제를 선택 했느냐에 크게 좌우된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혹자는 홀로도모르 (1930년대 초반 우크라이나에서 300만명의 아사자를 발생시킨 대기근) 같은 역사 속 비극을 그려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저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그러한 주제를 다루냐고 묻고 싶어요. 안 그래도 우리들의 마음은 현실 속에서 부딪히게 되는 이런저런 문제들로 인해 충분히 고통받고 있는데 굳이 그림을 통해서까지 또다른 비극을 재현할 필요가 있을까요?
특히나 이번 달 초에 일어난 사건으로 인해 우리 카자흐스탄 국민들이 공포감을 느끼며 지내는 요즘 같은 상황에서는 부정적인 주제에 집중할 이유가 더더욱 없지요. 이런 때일수록 긍정적인 것들에 초점을 옮겨야 해요. 부정적인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 단순히 뉴스 보는 것을 그만두는 이들도 있지만, 그림을 포함한 예술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마음을 환기시키는 이들도 있죠.
— 인터뷰 중 몇 년 전 서울에서 열린 전시회에 참가한 적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발표하신 그림들 중에 한국을 주제로 한 작품들도 있나요?
— 네, 그 시기에 <한국으로의 여행>이라는 제목의 연재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화가들은 마치 '아큰 (즉흥적인 노래와 연주에 능한 카자흐 전통 시인·소리꾼들을 일컬음)'처럼, 그때그때 주변에 보이는 것들을 작품 속에 담아내잖아요. 한국을 방문한 후 저는 앞서 말한 제목의 연재물을 만드는 데 착수했죠. 그렇게 해서 한국여성, 금불상, 금부채 등을 묘사한 그림들이 탄생했고요. 또 제가 참 좋아하는 카자흐 전통 의식 '투사우 케수(유아의 첫 걸음마 축하 잔치)'와 유아의 밝은 앞날을 기원한다는 점에서 상당히 유사한 한국의 '돌잔치'를 주제로 그린 작품도 있답니다.
인터뷰 말미에 그녀는 자신의 작품세계에 대한 철학을 이야기하며 최근 카자흐스탄에서 일어난 대규모 반정부 시위와 관련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저는 제 그림들 속에 자신만의 세상을 창조해내는 것에 힘쓰고 있어요. 공포, 파괴, 추악함이 배제된, 모든 것이 아름답고 그 자체로 인간에게 긍정적인 감정을 선사할 수 있는 세상이요. 국적, 민족, 피부색, 물질적 부의 상태와 관계 없이 모두가 행복하길 바라요. 그리고 그 행복을 저의 작품을 통해 세상에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고요.
최근 일어난 사태와 관련해 시위 참가자들 중 왜 많은 이들이 곤봉 등의 무기를 들고 거리로 나와 온갖 폭력과 약탈을 일삼았는지 생각해 봤는데, 그들은 그럴 수 밖에 없는 환경에 처해 있던 거에요. 가난과 빈곤함은 사람을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마치 병처럼 이성을 마비시키죠. 품격과 고매함, 아름다움은 먼 나라 이야기일 뿐, 당장 생존에 필요한 일차적인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이 우선순위가 되어버리니까요. 물론 이번에 그들이 자행한 끔찍한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요.
개인적으로 이러한 참상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인류는 예술, 교육, 과학 등 지금까지 스스로 창조해온 것들 속의 가치를 잃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해요. 우리 인류를 파괴하려는 여러가지 외부의 영향력에 이리저리 끌려 다니게 되는 순간, 인간들의 지성 또한 무시무시한 괴물을 창조하기 시작할 겁니다. 저는 궁극적으로 선(善)이 승리하기를 소망해요. '세상을 지켜내는 것은 아름다움'이라는 어느 대문호의 말처럼, 그 아름다움을 저의 작품 속에 녹여내 세상에 전달하고 싶습니다."
고려인 화가 조 옐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