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태석 ( 러시아 명 변 미하일)은 직업적 등산가도 아니고 등산애호가도 아니다. 그런데 40년전인 어느 날 운명이 그에게 유럽의 높은 산봉으로 오를 기회를 주었을 때 그는 이 기회를 놓칠수없었다. 그리하여 세계에서 엘브루스를 정복한 첫 한국인이 되었다.
<인투리스트>에서 근무하는 통역사-안내원 미하일은 엘브루스를 <공격>하려고 하는 일본관광객 그룹을 타스켄트로부터 깝까스로 안내했다. 게다가 일본인들은 서부의 가장 높은 봉 (해발 5642메터)에 오르기로 했다.
- 우리 그룹에 13명이 있었습니다 – 변 미하일이 회상한다 - 4200메터의 높이에 자리잡은 <쁘리유트 11> 근거지에서 이틀동안 이곳 조건에 적응하는 과정을 겪게 되었습니다. 다음 가장 중요한 간격을 등산할 때 일본인 등산가 일곱명이 대오에서 낙오되었습니다.
내가 등산을 앞두고 의사의 검진을 받았을 때 등산가의 경험이 있는가고 저더러 물어보았습니다. 사할린에서 살 때 산언덕을 달아다녔다고 하니 의사가 웃으면서 <그것은 낮은 산이고 이것은 엘브루스란 말이예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래도 나는 시도해 보기로 했습니다. 여기에는 물론 직업적 책임감도 있었습니다: <혹시 일본인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한담…>. 또한 야심도 있었습니다: <유럽에서 가장 높은 봉에 올라갈 자신이 없단 말인가?>. 이를테면 나 자신을 체험하는 것이였습니다.
눈이 덮인 가파른 산언덕을 오르는 것이 힘들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등산을 하면서
나의 몸무게가 7키로그람 줄었다는것만 말해도 충분할 것입니다.
엘브루스 봉을 정복한 일본인들 (내가 안내했던)에 게 <소련 등산가>휘장을 수여했을 때 소련등산가연맹 오고로드니꼬브 부회장이 저더러 <당신이 엘브루스에 등산한 첫 한인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내게 휘장을 주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저 통역사 – 안내원이였기에 등산가 명단에 오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별로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았지요. 대신 내가 엘브루스를 정복하고 자신을 극복했으니까 말입니다. 내가 엘브루스를 정복한 첫 한인이라는 생각은 아직도 나의 가슴을 따뜻이 덥혀줍니다.
변 미하일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변태석은 1942년에 한국 경상남도 밀양 시에서 탄생했다. 3년후에 석순희가 딸애들 둘 – 순연과 순남 그리고 세살짜리 태석을 데리고 남편 변종수를 찾아 사할린으로 갔다. 남편은 돈벌이를 하려고 사할린으로 갔다. 1905-1945년까지 사할린 섬의 남부가 일제의 강점하에 있었다.
일제는 전쟁시기에 후방에서 한국인들을 널리 이용했다. 1945년 8월까지 남부사할린 ( 카라후토)은 일제의 식민지였다. 일본인들은 주로 한반도의 남부에 사는 7만명의 조선인들을 고용노동자로 남부 사할린으로 이송시켰다. 그러나 돈을 벌기 위해 자발적으로 사할린으로 간 조선인들도 있었다. 사할린 섬에 돈벌이가 더 좋았기 때문이다…그러나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조선인들을 강제적으로 사할린으로 보냈다.
소련군대가 사할린을 해방시킨 후에 고향으로 귀국할 길이 막혀 한인들의 다부분이 사할린에 부득이 남게 되었다. 그들이 디아스포라를 형성했는데 그들은 많은 면으로 보아 대륙의 고려인들과 차이난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테마이니 접어두기로 하자.
변태석은 조선학교에서 7학년을 필한 후에 조선인 다른 동년배들과 달리 고르노사워드스크에 있는 러시아 학교로 넘어갔다. 반에는 조선인이 단 한명뿐이었다. 다음 이르꿋스크 외국어 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졸업장을 받고 집에 돌아와서 학교에서 교사로 일했고 공장에서도 근무했다. 그러나 태석은 비교적 괜찮은 자기의 운명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34세에 블라디보스톡에 있는 극동대학 일어과에 입학하였다.
저에게는 이미 가정이 있었습니다, 안해와 딸 둘 말입니다 – 변 미하일이 이야기 한다 – 저의 꿈이 통역원이였는데 언어와 연관이 없는 학교에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일어를 배우기로 했습니다. 첫째로 구소련에서는 일어가 필요하였고 둘째로는 내가 일어를 좀 알고 있었거던요. 남부 사할린으로부터 일본까지 아주 가까웠으니 라디오로 일본에서 전하는 여러가지 방송과 노래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나는 안해 전동순에게 항상 감사히 생각합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말없이 묵묵히 항상 나를 받들었어요. 안해의 도움으로 내가 공부하여 두번째 고등지식을 소유할 수 있었고 타스켄트로 이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타스켄트에서 내가 자신의 꿈을 실현할 수 있었습니다. <인투리스트>회사에 통역사-안내원으로 취직했습니다. 그 시기만해도 일어 전문가가 드물었습니다. 나는 <인투리스트>에서 일하면서 구소련을 다 돌았습니다. 러시야의 솔로또예 꼴리쪼, 리즈스꼬예 해변, 사마르칸드의 청색 둥근지붕, 세계에서 가장 큰 바이칼호수 (담수)도 구경했습니다. 그 과정에 나의 지식을 더욱 풍부화시키고 에너지를 저에게 불어넣어준 여러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나는 내가 택한 직업에서 실로 만족을 느끼는바 직업을 택할 때 바로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금년 1월 29일은 한국과 1991년 9월에 세계 정치지도에 나타난 새로운 독립국 우스베크공화국 수교 30주년이 되는 날이였다.
두 나라간에 외교관계가 수립된후 타스켄트에 한국대사관이 열렸다. 변태석을 대사관에 초청하였다.
-나는 그 제안을 반갑게 받아들였습니다 – 미하일이 말한다 – 나의 새로운 조국에서 우리 선조들의 조국을 대표하는 대사관에서 일하게 된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꿈이 실현된 것이였습니다.
나는 1992년 7월에 우스베키스탄 대통령 이슬람 까리모브의 첫 한국방문시에 까리모브 대통령을 통역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나는 양국간 무역경제 및 문화 연계 발전에 적은 기여나마 했다고 봅니다. 그 관계는 오늘도 발전확대되고 있습니다. 나는 이슬람 압두가니예비치의 1995년, 1999년 한국방문 때에도 통역을 담당했습니다.
나는 일생동안 내가 원하는 일을 하였으며 처자식, 손군들과 함께 편안한 생활을 누리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김 브루트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