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에 아름다운 섹스폰 소리가 결혼식에 참가한 손님들의 주목을 이끌었다. 손님들은 음악이 들려오는 쪽으로 일시에 시선을 돌렸다. 섹스폰 연주자는 다름 아닌 이 날 결혼을 하는 신부의 할아버지였다. <아니, 할아버지가 언제 저렇게 연습을 하여 나의 결혼식에 연주를 하다니…> - 손녀는 할아버지의 이런 선물이 고마워 당장 달려가서 할아버지를 포옹하고 싶었다…유병철은 <모래언덕의 먼 길>영화에서 처음 울렸던 유명한 작곡가 라이몬드 빠울스의 음악을 연주했다. 연주가 끝나자 박수소리와 함께 질문이 쏟아져 나왔다 – 언제 음악을 배웠고 그런 재능이 있으면 왜 감춰두는가 하는 것이였다…어쨌든 그 결혼식 날 모인 사람들은 마음을 사로잡는 아름다운 음악을 감상했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40년동안 악기를 손에 들지 않았습니다. 누가 언젠가 두고 간 낡은 섹스폰의 먼지를 닦고 있는 것을 본 딸애가 <곧 손녀의 결혼식인데 한 곡 놀아주세요, 아버지>라고 부탁하는 것이였습니다. 물론 경사에 음악을 노는 것은 좋은데 40여년이 지난 후에 내가 놀수 있겠는가 의심이 갔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굳게 먹고 혼자서 열심히 연습을 했습니다. 그러니 집안 식구들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한해서 저의 공연이 뜻밖이였지요 – 이 기사의 주인공인 유병철 선생이 이야기 한다.
지난해 가을에 노인대학 10주년 기념 공연시에 우리는 그의 섹스폰 연주를 들은적이 있었다.
유병철의 아버지 유학근은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후에 살 길을 찾아 러시아 원동으로 넘어왔다. 37년도 강제이주로 하여 가족은 카자흐스탄의 딸듸꾸르간 주 까라불라크로 오게 되었다. 그 때 아버지의 나이가 26세였으니 강제이주의 사연을 잘 기억하고 있었겠지만 별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기차를 오래동안 타고 오면서 먹을 것이 없어 남이 버린 감자껍질을 삶아먹었다고 한 어머니의 이야기를 한번 들은적이 있었다.
병철의 아버지는 이발사와 사진사의 일을 겸했다. 그 당시에 이것을 좋은 직업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아버지는 더 살기 좋은 곳을 찾아 항상 탐구의 길에 있었다. 먼 사할린에 조선인들이 많이 산다는 소문을 듣고 아버지가 사할린으로 <정탐>을 떠났다. 두달 후에 집에 돌아 온 아버지는 사할린으로 이사를 간다고 하였다. 식구들은 아버지를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우리는 처음에 기차를 타고 오래 동안 갔으며 다음 <마네론>선박을 갈아타고 <여행>을 계속했습니다. 목적지는 사할린 섬의 홈스크 항구도시였습니다. 우리는 홈스크와 녜웰스크 사이에 있는 <사웨띄 일리차>부락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거기에 어로 아르쩰리가 있었습니다. 그 때부터 사할린은 나의 생활에서 특별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아름다운 자연, 넘실거리는 푸른 파도위에 나르는 흰 갈매기 떼들… 저에게는 사할린이 천국과 같았습니다. 사할린은 오늘도 나의 가슴속의 한쪽 구석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나의 감정이 너무 풍부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어떤 때는 사할린을 생각하면 가슴이 죄이는것 같고 곧 눈물이 쏟아질것만 같습니다…
병철선생의 이야기를 듣는 나는 충분히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나역시 사할린에서 태여나 아동시절과 유년시절을 사할린에서 보냈으며 사할린은 나의 심장속에 영원히 남았기 때문이다…
유병철은 1966-1968년에 군대복무를 가게 되었다. 그는 기후조건이 아주 극심한 추코트까에서 복무했다. 그가 군대복무를 끝낼 무렵에 부모들은 다시 카자흐스탄으로 되돌아가서 제스카스간에서 살고 있었다. 그러나 병철은 정든 사할린으로 돌아오기로 했다. 그는 일을 무서워하는 성격이 아니다. 그 동안에 도사아프에서 운전기사의 직업을 배운 그는 송전선 건설장에서도 일했다. 그런데 그의 꿈은 푸른 바다였다. 그러나 세이네르 어선에 쉽게 태우는 것이 아니였다. 일정한 과정을 겪어야 하였다. 병철은 몇개월동안 재청소원으로 일했다. 결국 어선을 타고 몇번 바다로 나갔었다. 그의 형 블라지미르는 뜨랄함대 관리국에서 기계사로 일했기에 여러 나라로 항행하였다. 형은 병철에게 차비를 주면서 카자흐스탄에 가서 대학에 입학하라는 충고를 주었다. 그가 사할린에서 살 때 선박수리공장내 직업기술학교를 졸업했지만 그의 꿈은 물론 대학이였다. 그런데 그당시 입학할 수 있는 교육기관은 알마아타 음악전문학교였다. 병철에게는 음악에 대한 경험이 이미 있었다. 직업기술학교에서 공부할 때 소인예술단에서 돔브라를 놀았다. 그는 음악전문학교에서 파고트 (목제의 저음악기)악기를 배우면서 동시에 섹스폰도 배웠다. 음악전문학교를 필한 후에 음악대학에 입학하려고 했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그래서 카스구 법학부에 서류를 접수시켰다. 법학부를 필한 병철은 내무서에서 처음에는 구역담당 경찰로, 다음 예심원으로, 재정경찰서에서 예심판사로, 부서장으로 일하면서 소령의 군칭을 받았다.
유병철은 내무서에서 40여년을 근무하고 1977년에 은퇴하였다. 그가 40여년을 악기를 손에 쥐지 않았다고 한 것이 바로 경찰서에서 일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운명은 항상 그를 미의 세계와 접촉하게 하였다.
-하루는 안해가 손녀의 방을 청소하면서 그 애가 쓰던 붓, 그림물감을 버리려고 했습니다. 나는 버리지 말라고 하면서 그것을 비닐봉지에 넣어 보관하였습니다. 호기심이 많은 나는 아마 언젠가는 그림을 그려보려는 생각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렇게 그림을 차차 그려보기 시작했습니다-유병철 선생이 이야기 한다.
배우고 또 배운다는 말은 유선생에게 관계되는 것이다. 알마티에 노인대학을 열었을 때 제 7기 학생으로 입학하여 모국의 역사, 민족의 전통과 풍습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한국을 다녀 온 그는 기적같은 발전에 감탄했고 같은 혈육으로서 큰 긍지감을 느꼈다고 한다.
유병철 선생은 착한 안해 갈리나와 자식 둘을 키워 사회의 떳떳한 인원으로 교양하였다. 아들은 비행중대장이고 딸은 경제사이다. 유선생은 최근에 노인대학 예술단의 공연에 적극적으로 참가하고 있다.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주고 자신이 직접 그린 그림을 선사함으로서 그들을 미의 세계에로 이끌어들어가고 있다.
남경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