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초에 알마티 시에서 대한민국 대표 공영미디어인 KBS 의 라디오 한민족 방송이 <2022 KBS한민족 체험수가 제 24회 KBS 의 한민족 체험수기 공모>를 진행했다.
성인 대상 1명과 우수상 9명, 청소년 부문 대상 1명 및 우수상 3명, 장려상 6명,지도교원상 2명등 총 22명이 이번에 수상했다.
이번에 시상된 창작인들 중에는 자랑스러운 고려인 한국문학 번역작가 리 그리고리도 있었다.
우리는 번역작가 리 그리고리 니꼴라예비치와 만나 잠간 이야기할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리 니꼴라예비치, 번역작가의 활동과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까? 이 직업이 당신의 꿈이였던가요?
-저의 전공은 작가의 사업과 거리가 아주 멀었습니다. 나는 노보시비르스크 전기기술 대학을 필하고 라디오인지니어의 직업을 전공했습니다. 나의 청소년 시절은 우스베키스탄에서 흘러갔습니다. 어버지는 타스켄트 주 스웨르들로브 명칭 꼴호스 엠떼에쓰에서 인지니어로 일했습니다.
리 그리고리의 선조들도 어느 한 때 살길을 찾아 1905년에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에 넘어와 연해주에 자리를 잡았다. 1937년도강제이주로 하여 그리고리의 부모들도 우스베키스탄으로 오게 되었다.
아버지는그리고리가 기술분야를 택할 것을 원하였다. 그 때에 이르러 문학에 대한 아들의 취미를 보기는 했지만 원래 작가들의 생활이 가난하다는 의견을 아버지의 의식속에서 영 없애지 못했다. 그리고리는 일곱살까지 방언을 쓰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는 고려인들의 전통이나 풍습에 주목을 돌렸지만 명전을 쓰는 것조차 몰랐다. 그런데 고려인들의 전통이나 풍습을 어느 정도 알려주고 싶은 생각은 그를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학교를 졸업할 무렵부터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하였다.
마침 모스크바에서 사는 친척을 방문할 일이 있었다. 그리고리는 모스크바에 가져가서 고려인들의 전통에 대한 책을 보여주기로 했다. 이름있는 교수들과 철학가들이 그리고리의 책에 주목을 돌렸다.
-젊은이, 당신의 언어가 재미있는데요! 그 책을 발행하십시오. 부수가 즉시 사라질 것이예요…
그리고리는 돈을 꿔서 책을 발행하였다. 책을 팔고보니 이윤도 남았다. 그래서 그리고리는 문학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사업에 고무된 그리고리는 고려인 백과사전을 만들어 보려는 생각이 왔다. 물론 이것이 쉬운 일이 아니였다. 1145페지중 페이지 마다를 검열하고 자료를 정확화해야 했다. 할 일이 많았지만 백과사전발행에 참가하는 사람들 다수가 무료로 일했다.
이 때 마침 리그리고리 니꼴라예비치는 한국의 유명한 번역가 김승우 교수를 만났다. 그는 모스크바종합대학 박 미하일 교수더러 문학번역을 잘 하는 분을 소개해 달라고 했다. 미하일 니꼴라예비치는 그 분을 그리고리에게로 보냈다.
김승우 교수는 그리고리와 헤여지면서 말했다:
-당신은 아주 근면한 분입니다 - 그런데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 당신이 아주 재능이 있는 젊은입니다. 만일 한글을 배우면 큰 성과를 달성할 수 있습니다. 3개월 후에 내가 우리 대학에로 초청장을 보내겠습니다. 공부하러 오십시오…
-제 나이가 몇살인지 아세요? 나는 가정도 있고 자식들도 있습니다…
-부인하고 의논하고 생각해 보세요…교수가 이렇게 말하고 한국으로 갔다.
그리고리의 부인은 물론 거절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다시 비즈니스에 몸담고 있는데 3개월 후에 편지가 왔다.
-나는 그 때 있었던 이야기를 다 잊고 한국으로 가지 않겠다는 안해의 거절에도 습관되였습니다. 그런데 실제적 서류가 왔습니다. 한국의 가장 위신있는 대학에서 5년간 그란트를 주면서 무료로 공부시킨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사전을 들고 그 편지를 번역하면서 제 눈으로 믿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꿈에서 날아들어 온 편지였습니다!
오랜 설득끝에 안해가 동의했다. 안해가 남편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런 현명한 결정을 택했던 것이다. 그리고 또 안해는 남편이 달리 행동하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남편이 자기의 목적을 달성한다는 것도 안해가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리고리는 그가 가족들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것도 항상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일년동안 영어공부를 하면서 한글도 배웠습니다. 학업시간은긴장했습니다. 때로는 하루에 24시간이 아니라 훨씬 더 많은것 같았습니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습니다. 대신 그 일년이 나로 하여금 자유롭게 한국말을 하게 했고 한국어의 미묘한 부분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했습니다.
2009년에 리 그리고리는 첫 한국시집을 러시아어로 번역했다. 번역에 대한 그란트도 받았다. 안해가 한국에 와서 취직도 했다. 물론 계속 한국에 남아 일할 수 있었지만 안해가 집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그리하여 그리고리네 가정은 우스베키스탄으로 돌아왔다.우스베키스탄에서 그는 자기가 사랑하는 직업 즉 문학작품만 번역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작픔도 쓰기 시작했다. 그 작품들 중에는 한글로 쓴 시도 있었다.
-한국의 의사들이 나의 생명을 구원했습니다 – 그리고리가 이야기한다- 보통 맹장염이였는데 내가 인차 의사를 찾아가지 않고 질질 끌다보니 결국 패혈증에 걸려 정신을 잃었습니다. 나를 수술한 외과는 4시간만 더 놓쳤으면 생명을 구원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사건이 있은 후에 그리고리 니꼴라예비치는 일단 하나님이 그를 이 땅에 남겨둔 것은 아직도 할 사명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이미 구상했던 3부작 (개편, 사회주의, 고려인들)책을 끝내기로 했다. 이 작품은 개성의 변화를 겪을 운명을 지니게 된 그리고리 자신과 그의 동시대인들에 대한 것이였다.
리 그리고리 니꼴라예비치의 자식들에 대해 알고 싶었다.
-딸애는 재정분야에서 일하고 아들은 목사입니다. 신학교를 필하고 길을 잘못들어선 자들이 옳은 길에 들어서도록 돕고 있습니다. 손군이 넷입니다.
그리고리는 우리와의 담화시에 좋아하는 우스게 소리를 이야기 하였다. 그중 하나를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바이다.
-교수더러 몇가지 언어를 아는가고 물어보았다고 한다. 187가지 언어를 안다고 교수가 태연스럽게 대답하였다. <어떻게 그럴수가 있나요?! – 대학생들이 놀라면서 말했다. <더 많이 알 수 있는데 구글이 그 이상 모른단 말입니다 – 교수가 하소연했다…
리 그리고리 니꼴라예비치는 이와 같이 재미있는 이야기와 여러가지 생각을 우리에게 남기고 공항으로 떠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