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에 극장의 90번째 계절을 맞이하는 국립공화국 아카데미 고려극장은 역사적 의의를 가진 사건들로 얼마나 많이 충만되었는지 신문지상에 미처 다 반영할 수 없다. 고려극장은 카자흐스탄의 예술의 현대식 성당들과 한 열에 서서 테마나 사상, 작풍으로 보아 전혀 비슷하지 않은 연극들을 무대에 올리고 있다. 이는 올자스 술레이메노브의 창작을 무대화한 음악연극 < 아스 이 야. 처음에는 단어가 있었다>, 철학적 의미를 담은 아바이 작품 <내가 인간이라고 불리운다면>, 태장춘의 <흥부와 놀부>, 한진의 비극 <나무를 흔들지 말라>, 음악연극 <봄의 환상> 그리고 최근에 무대에 올린 일본작가 아베 코보의 <모래의 여자> 등이다. 이 얼마나 다양한 상연 종목인가! 극장내에서는생활이 들끓고 있다 – 집단이 청소한 배우들로 보충되며 세대가 바뀌우고 있다. 그런데 이 시기는 극장에서 근무하는 자들에게만 한해서가 아니라 고려인 문화의 근원지를 사랑하는 우리 관람자들에게도 감동적인 것이다. 얼마전에 주년일을 맞이한 극장장 니 류보위 아브구스또브나 (그는 극장에 25년을 이바지했다)는 자기의 직책을 한달전에 임명된 예술지도원 김 옐레나 윅또로브나에게 넘겨주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류보위 아브구스또브나의 주년일에 대한 오체르크를 쓰자마자 영광스러운 고려극장 집단을 이끌고 나갈 선장의 고상한 사명을 맡은 옐레나 윅또로브나를 축하하게 되었다. 나는 극장행정부와 의논한 후에 운이 좋아 두 극장장과 인터뷰를 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솔직히 말해서 얼마전까지만 해도 극장을 지도한 니 류보위 아브구스또브나와의 담화를 상상하면서 어제까지만 해도 극장의 계획과 자신의 일정표를 꼼꼼히 작성한 엄숙한 지도자의 미소짓는 얼굴을 보게 되리라고 예정치 못했다. 25년간 극장을 지도하는 기간에 쓴 그의 노트가 보존되여 있다. 거기에는 출근 시간 아니 출근이 아니라 행사, 상봉의 시간이 적혀 있는바 극장 자체의 운명만이 아니라 배우 각자, 직원 각자의 성과적 활동이 그 만남에 달렸었다고 말한다.
류보위 아브구스또브나는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자기 사무실에서 나를 받아들였다.
-이제는 내가 극장장이 아니기에 임의의 까다로운 질문을 하실 수 있습니다 – 그 녀가 환한 미소로 말했다.
-내가 보건대는 당신이 답을 주기 어려워 했던 질문이 없었는것 같은데요…그런데 지금 저에게 그런 질문이 있는것 같습니다. 류보위 아브구스또브나, 우리 고려극장의 특점은 배우들이 상연을 앞두고 로비에서 관람자들과 자유롭게 교제를 하면서도 무대에 나오기 직전에는 몹시 감동되는데 있다고 봅니다…
-기자선생은 그런 가까운 교제가 책임성을 더 높인다고 생각해본적이 없습니까? 관람자가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 있다면 자기의 의견을 즉시 말하니까요…
-그런 관람자가 말하기를 지도부에서 최근에 있은 재배치를 본다면 류보위 아브구스또브나가 극장장의 자리를 떠나기전에 <예술지도원>이란 자기 일자리를 만들어 놓았다고 하는데요…
-간부 재배치에 대해 우리 관람자들이 관심을 돌리는 것이 좋은 일입니다. 그런즉 관람자들이 우리 극장의 운명에 무관심하지 않는 것이지요. 새 직책에 대해 말한다면 모든 아카데미 극장의 정원표에 그 직책이 이미 있습니다. 우리 아카데미 극장은 권한이 변경됨에 따라 아무것도 바꾸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이것이 좀 늦어진 결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결정은 해당 기관에서 이미 승인되였는데 활동력 있는 젊은 전문가에게 길을 열어주려는 나의 결정과 때를 같이 했을 따름입니다.
-극장내 전문가에게 말입니까?
-나는 자기 인재들을 키우는 것이 좋은 일이고 또 옳다고 간주합니다. 우리의 생이 영원한 것이 아니니까요. 때문에 극장이란 고상한 이름을 당당히 지켜나갈 수 있으며 극장의 일을 잘 알고 있으며 처음부터 자신을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보인 자들에게 경험과 지식을 넘겨주어야 합니다. 나는 우리의 배우들과 가수들에게도 말합니다: < 당신들의 재능이 그져 사라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제자들을 양성하라는 말입니다>.
-때마침 제자 양성에 대한 말이 나왔으니 당신의 후보자인 옐레나 윅또로브나에게 대해 말할 때가 되었다고 봅니다. 그 역시 많이 감동된것 같은데요, 어제까지만 해도 연극을 연출하고 창작을 책임졌었는데 오늘은 전 집단의 지도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극장은 특별합니다. 우리는 배우 각자를 소중히 여깁니다. 우리가 한편으로는 인력 자원을 아끼기 때문에 배우려고 하는 우리 직원들을 위해 힘도, 수단도 아끼지 않습니다. 우리는 극장을 위해, 문화발전을 위해 결실을 줄 수 있는 일에는 아무것도 아끼지 않습니다. 스폰서도 찾고 시간도 얻어냅니다. 후에 자라나서는 우리 극장을 떠나는 직원들도 있기는 하지만 우리가 어쨌든 자기 정책을 바꾸지 않고 앞을 내다 봅니다. 옐레나는 극장의 <산물>입니다. 그는 극장에서 전문가로 자랐고 배우도록 우리가 도와주었습니다. 그의 가족들도 극장에서 성실하게 근무하고 있습니다. 레나가 직업적 실력을 높임에 따라 책임적인 직책도 맡았습니다. 그는 가수로 우리 극장에 취직했는데 가수의 직업을 사랑했거던요. 다음 배우로 역을 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연극을 연출해 보라고 내가 권했지요, 그러니 제대로 되더란 말입니다. 극장 집단이 레나를 다 좋아합니다. 배우들 사이에서는 <제 사람>이거던요. 이렇게 우리가 귀중한 간부를 얻게 되었습니다. 나는 극장장을 바꿀데 대해 이미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그저 훌적 극장을 떠나서 고려문화 발전과 직접 연관된 극장 일의 많은 <비결>을 모르는 사람이 극장장으로 일하는 것을 보면 나의 가슴이 아팠을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레나와 함께 이미 2년전에 극장장의 일에 대해 말한바 있습니다. 왜 레나를 선택했는가고요? 우선 레나는 극장에 진짜 충실한 사람입니다. 모두가 다 우리 극장에 남아서 근무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례로 혹자는 돈을 더 많이 주는 곳으로 가기도 합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절대 규탄하지 않습니다. 둘째로 레나는 새로운 것을 배우기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계속 자습도 합니다. 셋째는 레나가 아주 예절바른 사람입니다. 항상 그를 믿을 수 있습니다.
-류보위 아브구스또브나, 당신에게는 극장의 들끓는 활동이 그립지 않을까요?
-내가 이제는 극장장이 아니니까요. 그러나 나는 극장을 떠나지 않습니다. 극장이 나의 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의 지식과 경험이 극장에 아직 필요하다는 것을 의심치 않습니다. 내가 맡은 예술지도원에게도 할 일이 많습니다. 그리고 옐레나에게도 첫 시기에 도와주겠다고 안심시켰습니다. 극장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들어갈 기회를 얻는다고 유명한 한 배우가 말한바 있습니다... 극장에 충실한 자는 극장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나이와 가능성에 따라 계속 근무합니다. 그들은 극장의 민족적 유산입니다. 게다가 우리가 그 누구도 그저 놓아주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은퇴한다>는 개념이 없습니다. 사람이 극장에 필요하기에 그가 근무를 계속하는 것이며 우리는 그에 반가워 합니다. 그런 일군은 우리 사람입니다! 우리 극장에 원로회가 있는걸 아시나요? 올레그 사프로노비치가 회장입니다. 우리는 그 분을 소중히 여깁니다. 금년에 그의 80주년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는 인기있는 인물입니다. 구 소련의 나라들에로 출장을 가면 그 곳에서 올레그 사프로노비치가 아직도 <제 사람>입니다. 공로와 재능이 있는 직원들이 많은 우리 극장에서도 올레그 사프로노비치가 살아있는 전설이고 극장의 브렌드입니다. 이런 분들과 헤여질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낭비나 다름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또 한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 원칙을 꼼꼼히 지키는바 많은 현대 집단들은 젊은이들을 취직시키는 과정에 몇 세대가 일하는 것을 무시합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네 세대의 대표들이 우리 극장에서 근무했습니다. 극장에서 근무하는배우의 자식들을 념두에 두지 않는다면 지금은 세 세대가 일하고 있습니다.
이 기본 원칙이 극장에는 내가 오기 전에도 존재했습니다. 극장의 역사를 알고 있으며 우리를 교체할 세대들 앞에서 모든 책임성을 인식하는 나는 25년전에 극장에 와서 그 원칙을 더욱 공고화하고 필요한 수준에 올려세웠습니다.
-당신은 나이에 비해 지혜로운 분입니다.
-말이 났으니 말인데 지금 옐레나 윅또로브나의 나이가 내가 극장장으로 되였을 때의 나이입니다. 우연의 일치일까요?
-창작인들로 이루어진 극장집단을 지도하기란 쉽지 않다는 것을 모두가 다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후임자에게 그 어떤 유익한 충고를 이미 주었습니까?
-나의 사업작풍을 레나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상호관계를 어떻게 세워야 하는가도 레나가 잘 알고 있습니다. 하긴 우리 극장에서는 관계가 이미 오래전부터 수립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극장장 – 연출가 – 예술지도원이 하나의 사슬로 엮어져 있습니다. 옐레나가 행정부분만 배우면 될 것입니다. 그의 열의가 극장장의 임무 실행에 충분하다고 확신합니다. 시야를 넓히는 문제에 대해 말한다면 레나는 지식을 얻는데서 만족감을 느낍니다. 내가 극장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믿음직한 손에 넘겨주니 극장에 대해 걱정하지 않습니다.
-얼마전에 당신과 한 인터뷰에서 …이르러 극장장으로서 지금까지 한 활동에서 모든 만족한 부분을 말했는데요 오늘 현재 극장의 방침에 대한 불변성이 기본 총화라고 봅니까?
-물론이지요, 이미 오래전에 선택한 우리의 방침에 안심합니다. 우리는 2025년까지 계획을 짰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 함께 일할 것입니다. 지도자가 적시기에 자연스럽게 교체된 것을 극장의 성과적 활동의 담보로 보고 있습니다. 집단에 한해서는 그것이 부드러웠고요 예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에게 대해 말한다면 내가 원하던 것을 실천하고 사랑하는 극장과 많은 순간을 보낼 기회를 갖게 된데 대해 운명과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릴 나이라고 봅니다. 시대, 극장 그리고 운명이 만나게 해 준 배우들에게 대한 진실의 책을 쓰려고 오래전부터 꿈꾸었습니다.
극장 가수로부터 극장장에 이르기까지
나는 새 극장장 김 옐레나 윅또로브나를 연극연습중에 만났다. 그는 잠간 시간을 내어 내가 주고 싶은 묵묵한 질문에 즉시 답을 주었다:
-나는 아직도 자신을 류보위 아브구스또브나의 직책에 상상할 수 없습니다 – 옐레나가 말했다 – 우리의 상상에는 류보위 아브구스또브나가 영원한 극장장입니다. 저를 포함한 전 집단이 우리 류보위 아브구스또브나가 가장 중요한 인물이며 그 분이 없이는 모든 일이 침체상태에 있는데에 습관되어서 내가 어떻게 그런 극장장을 대신할 수 있겠는가고 많이 걱정이 됩니다. 류보위 아브구스또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 자신에 대한 태도 즉 모든 면에서 에탈론으로 되여 있습니다. 그는 문제가 나타나날 때가 아니라 발생하기 전에 해결 방도를 구상하면서 앞을 내다보며 소소한 부분까지 다 미리 보고 있는것 같습니다. 이런 선견지명성을 배워야 합니다. 류보위 아브구스또브나가 전략가이기 때문에 일생을 두고 대담하고 강직한 분입니다.
-당신에게는 뜻밖의 건의였나요?
-물론 아닙니다. 우리 극장에서는 그 어떤 직책에 임명할 때에 뜻밖의 일이라고는 없습니다. 류보위 아브구스또브나는 그런 사람을 오래동안 주시하면서 씨앗을 보게 되면 공부를 하러 보냅니다. 어릴 때 콩쿨에서 주목을 이끈 아이를 결국 류보위 아브구스또브나가 극장에 데리고 온 실례가 많습니다. 그는 아직 튼튼히 서 있지는 못하지만 재능이 있는 젊은 배우를 보면 백방으로 키우려고 노력합니다. 이에 있어 그는 < 재능이 없는 것은 스스로 나타나니 재능이 있는 젊은이는 받들어 주어야 한다>고 롱조로 말하군 합니다. 일부에게는 장학금도 지불해 주고 그 어떤 상금도 줄 구멍을 찾아냅니다. 저에게는 류보위 아브구스또브나가 일생을 두고 선배입니다. 나는 극장에 가수로 와서 다음은 배우로 역도 놀았고 그 후에는 자립적으로 연극을 연출해 보라는 건의를 받았습니다.
- 옐레나 윅또로브나, 당신에게 한해서 극장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옐레나를 극장이 키웠다는 말을 자주 들을 때 극장장의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한 첫 주일에 무엇이 기억에 남았습니까?
-깊은 의미를 담아 간단히 말한다면 극장은 저의 인생입니다. 극장에서 일하는 동안에 오르막과 내리막도 있었고 의심과 성과도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내가 자랐고 가정이 있고 가장 가깝고 정다운 사람들이 나와 함께 있습니다. 철이 들기 시작해서부터 고려극장에 대해 항상 꿈꾸었습니다. 이것이 솔직한 말입니다 – TV 방송을 걸쳐 배우들을 본 후에 극장에서 노래를 부르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크슬오르다의 벽지에서 살았는데 네살 때 처음 작은 무대에 올랐습니다. 아버지가 지도하는 협주단과 노래를 불렀어요, 할머니가 손녀들에게 어릴 때부터 조선가요를 배워주었습니다. 그러니 나도 역시 노래를 불렀지요. 노래를 부르는 것이 어떻게 마음에 들었던지 음악학교에서 공부하기를 원했는데 우리 농촌에는 음악학교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2학년생인 내가 집에서 도망쳐 혼자서 ( 어머니가 나를 놓아주지 않았기에) 구역 소재지에 가서 음악학교를 찾았습니다.
다른 악기들에는 모집이 끝났으니 나에게 <바얀>을 권하면서 교사가 < 바얀을 들 수 있어?>라고 물어보더라구요. <무엇이든지 다 들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던 것이 기억에 남았습니다. 집에서는 야단이 났고 음악학교에 보내지 않은 것은 물론입니다. 그러나 꿈은 남았습니다. 내가 15세였을 때 알마티에서 한국가요 콩쿨이 있었습니다. 공연이 끝난 후에 작곡가 한 야꼬브 니꼴라예비치 ( 그 때 그가 고려극장에서 일했다)가 나더러 < 이 곳으로 오라구, 알마아타에 오면 중학도 필하고 노래도 부를 모든 조건이 있어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집에서는 또 나를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끝내 극장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하긴 결혼한 후에…그런데 나의 운명에 또 야꼬브 니꼴라예비치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장래 나의 남편측 사돈들과 함께 타라스에 왔었습니다. 그가 알마티에 돌아온 후에 나를 저명한 가수 라끼 께쏘글루의 콜레지에 데려왔습니다. 이 때부터 창작활동이 시작되었어요 – 모스크바 콩쿨에서 수상자로 되었고 극장에서 역을 놀았습니다.
연극배우로서의 첫 걸음을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올레그 사프로노비치가 연극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에서 하녀의 역을 주었습니다. 나는 절대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올레그 사프로노비치가 우리 집에까지 찾아 와서 < 하다 못해 그 역을 한번 놀아 보라구, 재미있다니까요…>라고 설득시켰어요. 이렇게 올레그 사프로노비치가 나를 무대의 세계에로 이끌어 갔는데 나는 그 세계에 오래 남게 되었습니다. 마이야 센추노브나, 로사 블라지미로브나, 안또니나 뻬뜨로브나, 로만 빠블로비치, 갈리나 니꼴라예브나, 에두아르드 겐나지예비치를 비롯하여 고려극장 직원들이 다 저를 성심껏 도왔습니다. 우리 극장의 분위기가 그렇단 말입니다. 이것도 역시 류보위 아브구스또브나 극장장의 공로입니다. 다른 여러 창작 집단에서 우리 극장과 같은 미기후를 볼 수 없습니다.
2014년이 머리속에 떠 오릅니다. 그 때 류보위 아브구스또브나가 < 알료누스까, 네가 자립적으로 연극을 연출할 수 있냐?> 라고 묻는 것이였어요. 그리고 연출을 해 보라고 첨부했어요. 우리는 최 안나와 함께 <여성에 대한 사랑>을 무대에 올렸습니다. 이 연극이 콩쿨에서 승리했습니다. 그 후 류보위 아브구스또브나가 저를 마기스트라뚜라의 극장연출과로 공부하러 보냈다. 학업을 끝낸 후에 총 연출가 ( 감독)의 직책을 주었고 다음은 극장 예술지도원의 업무를 맡겼습니다. 직책이 높을수록 책임감의 무게도 더 무거워진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내가 걸어온 길이 평탄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도 당면한 과업해결에 당황한 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류보위 아브구스또브나가 <걱정하지 마, 다 잘 될거야, 내가 항상 곁에 있을테니…>라고 거의 날마다 말했다. 다른 편으로는 임의의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어머니가 처음에는 반가워하다가 얼마후에 말하는 것이였습니다: < 어떻게 네가 그걸 해 낼수 있어?! 잘 생각해봐, 책임이 얼마나 큰데…>. 그리고는 물러서기에는 이미 늦었다는 말을 듣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집 걱정은 하지마, 내가 받들어 줄테니…> 내게는 어머니의 이 말씀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그리고 집단의 지지도 중요한 것은 물론입니다! 나는 동료들을 믿습니다. 그것은 내가 각자를 잘 알고 있으며 현재 극장에서 일하는 직원마다가 우연히 극장에 온 것이 아닙니다.
-선배로서 류보위 아브구스또브나가 극장장 사업의 비결을 이미 알려 주나요?
- 강요하지 않고 편안하게 말입니다. 그 분에게 있는 많은 특점이 오직 그 분에게만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개별적 품성입니다 – 인내성, 외교술, 타격을 당당히 받아들일줄 아는 능력…나는 여러가지 상황에서 니극장장의 행동을 보면서 자문합니다: < 넌 그렇게 할 수 있었겠어?>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기 위해 모든 힘을 다 경주하겠습니다. 내가 자신을 근면한 사람으로 간주하는데 로동으로 많은 것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극장장으로 된 후 당신의 생활에서 현저한 변동이 있나요?
-요즘 내가 거의 잠을 이룰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직원들과 함께 보내는 자유로운 모임에 시간이 부족합니다. 남편이 이제는 서로 이야기를 나눌 시간도 없다고 합니다. 가족이 극장에서 함께 일하는데 때로는 오래동안 서로 보지 못한것 같습니다.
-극장의 활동에서 그 어떤 새로운 것이 있는지요?
-지금 극장계절이 한창입니다. 모든 것이 다 계획되어 있는데 우리가 지금 연극상연과 극장 창립 90주년 행사를 적극적으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번 계절에 계획된 것이 다 실천될 것입니다. 다음 계절에는 또 새 아이디어가 나올 것입니다.
-새로운 활동무대에서 성공을 바라며 귀 극장의 배우 세대들간 연계가 더욱 튼튼해질 것을 기원합니다. 그것은 바로 그 연계에 의해 극장이 숨쉬고 있으며 바로 거기에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