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존재로 되여 있다. 때문에 사람에게 있어서 직업선택이 중요한 것은 두말할것 없다. 예로부터 부모들은 자식이 좋은 대학을 졸업하여 좋은 직장을 다니기를 원했다. 이는 자녀들이 사회에서 더 나은 사회적 지위를 차지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직업선택은 모든 사람들이 신중히 고려하는 문제이다. 그런데 때로는 우연히 ( 여러가지 사정으로)직업을 택하게 되어 그것이 일생의 직업으로 되는 경우도 있다...오늘 우리는 고려극장 주년일 전야에 그렇게 선택한 직업이 사랑하는 직업으로 되어 주역을 놀면서 관람자들의 공인을 받고 있는 배우, 카자흐스탄 공훈 문화활동가 최 로만 빠블로비치 배우에 대해 이야기 하려고 한다.
최 로만은 타스켄트 주 양기율 구역 즈다노브명칭 꼴호스에서 태여 나서 자랐다. 아버지가 나팔수였기에 어떻게 보면 로만이 음악의 세계와 어릴 때부터 인연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원래 로만이 사관학교에 입학하기를 희망했는데 입학조건에 맞지 않아 서류를 접수시키지 못했다. 그런데 이때 마침 고려인 배우들을 양성하기 위해 타스켄트 극장예술 대학에 조선과를 연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래서 로만이 시도해 보기로 했다.
-입학시험을 어떻게 치르었나요?
- 크릘로브의 우화 <늑대와 새끼양>을 낭송하고 기타를 좀 탈줄 알았으니 기타를 타면서 노래도 불렀지요…
-보통 부모들은 자식들이 배우의 직업을 택하는 것을 그리 받들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아버지가 나무라지 않던가요?
-아버지는 자신이 대학에서 공부를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아버지에게는 내가 고등지식을 소유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로만 빠블로비치는 극장대학에서 공부하는 기간에 알렉산드르 빠스꼬브 교수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한다. 그는 대학에서 배우들의 연기능력을 가르쳤다. 그리고 빠스꼬브는 15년동안 고려극장에서 근무하면서 연극을 상연할 때마다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어 관람자들을 감탄하게 했다.
최 로만은 대학을 필한 후에 조정구의 초청을 받아 국립고려극장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로만 빠블로비치, 어느 연극에서 첫 역을 놀았습니까?
-<류보위 야로와야>연극에서 꼬스낀 부관의 역을 놀았습니다.
빠스꼬브연출가가 나가고 새로 온 맹동욱 연출가는 로만을 전망성 있는 배우로 보지 않았다. 아마 연출가마다가 제각기 배우를 보는 각도가 있기에 그렇게 보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존심이 상한 로만은 역시 이 극장의 상급 무대장치 담당자로 자리를 옮겼다. 얼마 후에 로만은 무대장치 직장장으로 전임되었다. 그는 이 분야를 맡아 일하면서 극장에는 중요하지 않는 분야가 없으며 이 직장의 책임이 얼마나 큰가를 이해하게 되었다. 로만이 이 직장에서 5년동안 근무하는 기간에 상연시에 한번도 사고가 없었다.
-맹동욱 연출가는 재능이 있는 분입니다. 그가 그렇게 말했다고 해서 그 분에게 불만을 품은 것도 아닙니다. 사람마다 자기의 의견을 표현할 수 있으니까요…그저 내가 그 의견에 동의할 수 없으니 직장을 바꾼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결과를 보고 판단해야 하겠지요? 내가 제 자랑을 하는 것이 아니지만 무대로 되돌아온 후에 많은 주역을 놀아서 관람자들의 좋은 반응을 받았으며 또 받고 있습니다.
최 로만이 극장 새 지도부의 설득을 받아 연극배우로 다시 등장하면서 희곡 <기억> ( 극작가 손 라브렌찌, 공저자 리 스따니슬라브, 연출가 리 올레그)에서 첫 주역을 놀았다. 주인공 빠웰의 역을 논 로만은 그동안 발휘하지 못한 예술적 기예를 완전히 들어내어 관람자들의 큰 호평을 받았다.
그후 최 로만은 여러가지 연극에서 주역을 놀았다 -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 <농촌의 심심풀이>, <나무를 흔들지 말라>, <젊어서 죽지마라>, <여배우>, <카라코스>, <양반전>, <따르쮸흐>, <시대를 초월하는 홍범도 장군> 및 기타 연극에서 주역을 노는 과정에 연기능력을 남김없이 들어냈다.
-백 안또니나와 종종 역을 함께 노는데 파트너로서 이 배우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습니까?
-안또니나 뻬뜨로브나는 경험이 많은 훌륭한 배우입니다. 그 녀와 역을 놀때면 나는 항상 마음이 편안합니다. 그것은 안또니나를 언제나 믿을 수 있으니까요. 연극을 노는 과정에 기대하지 않던 뜻밖의 일이 일어나는 때가 있습니다. 안또니나 뻬뜨로브나는 임의의 그런 상황에서 나올 수 있는 출로를 즉시 찾아내거던요…
-고려극장도 어려운 시기를 겪었을 때가 있었지요?
-물론이지요, 모두가 난관에 부닥친 1990년대에 고려극장도 예외가 아니였지요. 그 때 극장장 니 류보위 아브구스또브나의 능숙한 조직자적 실력에 의해 극장이 계속 활동하였다고 봅니다. 극장장은 한국의 길이 열리자 마자 새로운 가능성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1990년 5월에 국립서울극장과 자매결연을 맺어 고려극장 배우들이 해마다 한국에 가서 연수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극장은 1991년에 서울에서 있은 제 2회 국제축제에 참가하여 연성용의 희곡 <지옥의 종소리>와 한진의 희곡 <나무를 흔들지 말라>를 공연하여 연극부문 1등상을 받았습니다.
-순회공연도 많이 다녔을 테지요?
-예, 구 소련의 대도시들 그리고 지어는 먼 사할린 섬까지도 갔었습니다.
-제가 사할린 태생이니 관심이 있는데요 사할린에 대한 인상이 어떻었습니까?
-우리가 주 소재지 유즈노-사할린스크는 물론 홈스크, 뽀로나이스크, 아니와, 꼬르사꼬브 기타 도시들에서 공연했는데요 우선 사할린의 아름다운 경치에 감탄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극심한 기후의 지역에서 살며 일하는 사람들이 모두 다 영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그 동안에 싱싱한 물고와 해물도 많이 먹었습니다…
-부인과 자식들에 대해서 몇마디 부탁합니다.
-저의 안해 굴나라는 응용수학을 전공했습니다. 경리들을 양성하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자식은 아들이 하나입니다. 한마디 말하고져 하는 것은 나는 그 애가 카자흐어를 배우도록 노력했습니다. 유치원도 카자흐어로 교육하는 유치원을 택했고요…그래서 아들은 동력대학도 카자흐어로 필하고 아스타나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저의 안해가 카자흐여인이라 해서 그런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의 언어를 배우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최근에 고려극장에 젊은 배우들이 보충되는데요 그들에게 어떤 충고를 주고 싶습니까?
-배우가 되려면 악착스럽게 배우고 노력해야 합니다. 뒷켠에 창을 들고 서서 대화도 하지 않고 몇달씩 우두커니 서 있는 그런 배우를 내가 념두에 두는 것이 아닙니다. 일생을 예술에 이바지하려고 굳게 결심한 그런 배우들 말입니다. 그리고 모국어를 열심히 배우라는 충고를 주고 싶습니다. 무대에서는 대화가 중요하니까요, 발음도 확실히 울려야 하지요. 우리 배우세대는 주로 리함덕 선생님에게서 언어를 배웠습니다.
-로만 빠블로비치, 만일 지금까지 살아 온 생을 다시 살게 된다면 무엇을 바꿀 생각이 있나요?
-아닙니다, 그대로 반복할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배우의 직업을 꿈꾸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나는 우연히 선택한 이 직업을 사랑하게 되었고 지금은 다른 직업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꿈꾸지 않았던 직업이 일생의 직업으로 되었지만 조금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당시 타스켄트 극장대학에 조선과를 열려고 많이 수고하신 조정구선생님과 기타 분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려극장> 창립 9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하고요 앞으로도 로만 빠블비치가 노는 흥미있는 주인공을 무대에서 많이 보기를 기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