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인문학 산책』이라는 아담한 책이 나왔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고려인마을에 있는 월곡고려인문화관 김병학 관장이 펴냈다. 이 책은 비교적 독립적인 주제를 다룬 6개의 장과 3개의 부록으로 되어 있는데 제1장은 고려인은 누구인가, 제2장은 역사적 격변과 고려인 먹거리 문화의 변천, 제3장은 모국어 신문과 고려인 한글문학, 제4장은 고려인 문화예술의 찬란한 횃불 ‘고려극장’과 공연예술, 제5장은 중세 한국어의 화석 ‘고려말’- 그 특징과 변천사, 제6장은 고려인 구전가요의 이해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는 2022년 가을 고려인의 실상과 현황을 널리 알리고자 월곡고려인문화관 관람객과 주민들을 대상으로 고려인의 역사와 문화예술에 대해 6차례의 인문 강좌를 진행한 바 있는데 그 강의 내용을 한 권의 책으로 정리하여 묶은 것이 바로 이 『고려인 인문학 산책』이다. 김병학 관장은 작년 가을 인문 강좌를 진행하던 당시 참가자들의 반응이 뜨거웠고, 강의가 끝난 다음에 그들이 강의 내용을 책으로 엮어 문화관을 찾는 관람객들에게 널리 알리면 좋겠다고 권유해서 이 책을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이 책에서 특별히 눈길을 끄는 부분은 ‘역사적 분기점을 형성한 고려인의 대표시 감상하기’라는 부록 1장의 내용이다. 저자는 2022년 가을 ‘모국어 신문과 고려인 한글문학’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진행할 때 고려인의 역사를 대표하는 6명의 시인과 작품들도 참가자들에게 소개해 주었는데 이는 그들에게 커다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이에 저자는 고려인의 역사적 사건에 분수령이 된 그 시인들과 작품들을 엄선하여 이 책의 부록에 수록하였다.
부록에 실린 고려인의 대표 시인과 시는 1. 연해주 고려인 한글문학을 선도한 조명희의 시 ‘짓밟힌 고려’, 2. 강제이주 이듬해 필화사건을 일으킨 강태수의 시 ‘밭 갈던 아씨에게’, 3. 북한 한글문학에 새로운 지평을 연 조기천의 시 ‘두만강’, 4. 민족의 뿌리에 대한 당당한 선언을 표현한 김준의 시 ‘나는 조선사람이다’, 5. 제2세대 한글문학을 선도한 리진의 시 ‘구부정 소나무’, 6. 소련 붕괴 직후 새로운 세대가 직면한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탁월하게 표현한 리 스따니슬라브의 시 ‘바다가 뾰족하고 짠 혓바닥을’ 등으로 모두 주옥같은 시들이다.
이 책의 저자 김병학 관장은 1995~1996년, 2000~2003년에 고려일보에서 기자로 일했으며 오랫동안 카자흐스탄에서 고려인 문화 관련 일을 해왔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잘 알려져 있는 친숙한 인물이다. 그는 2016년에 한국으로 돌아가 고려인의 역사와 문화를 알리는 월곡고려인문화관이라는 박물관을 운영하고 있다. 월곡고려인문화관은 고려인의 역사와 문화예술 자료를 전시하고 있는 한국의 유일한 고려인역사박물관이다.
이 책에 리 스따니슬라브 시인의 시는 2편이 실려 있다.
바다가 뾰족하고 짠 혓바닥을
바다가 뾰족하고 짠 혓바닥을
들이민 듯한
러시아 연해주 땅
뽀시예트 구역에
고려인 마을이 있었고
우리 할아버지가 태어난
집이 있었다
놀라워라
겨우 두 세대만
이 중앙아시아초원에서 살아왔을 뿐인데
이보다 더 가까운 고향이
세상에는 없는 듯…
하지만 뽀시예트에서 사셨던
할아버지에 대한 추억에
난 또다시 잠기곤 한다
누군가의 거친 혓바닥 같은
연해주 땅, 한 조각 바다가
나의 상처를 핥는다
조상들의 고향으로
조상들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라
시(詩)를 가지고서.
타향살이
힘들다 터져 나오는
흐느낌이나
울음이 아닌 시로써.
허나
내가 태어나고 자란
이 땅이
어찌 타향이란 말인가?
또 어릴 적부터
어울려 함께 자란
사람들이
어이 타인이란 말인가?
하지만 그래도
여기 카자흐스탄 땅과
이 시구를 채우는
러시아말에
용서를 구해야 하리.
조상들의 고향으로
나 돌아가고 싶어라
오직 시(詩)만 가지고서라도.
머나먼 고국에서
태어나 살아갈
그런 운명 나 받지 못했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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