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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과 한 공간에 사는 도시
시내 남쪽 대릉원 일대에 큰 능만 스무 기가 넘게 모여 있습니다. 능과 능 사이로 산책로가 나 있고, 담 너머 골목에는 요즘 젊은이들이 줄을 서는 찻집과 사진관이 들어섰습니다. 사람들은 이 골목을 황남동의 이름을 따 황리단길이라 부릅니다. 능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는 풍경, 누군가에게는 신기하게 들리겠지만, 이 도시 사람들에게는 천 년 넘게 이어진 일상입니다. 노동동의 봉황대는 봉분 위에 아름드리 고목이 자라 아예 동산이 되었고, 쪽샘 동네에서는 지금도 발굴이 이어져 산 자의 골목 아래서 죽은 자의 골목이 해마다 새로 드러납니다. 멀리 갈 것 없이, 시내의 한 초등학교는 운동장 곁에 능을 이웃으로 두고 있습니다. 제주에서 우리는 무덤마다 산담을 둘러 산 자의 밭과 죽은 자의 집을 하나의 이치로 묶는 법을 읽었습니다.
이 언덕들이 보물 창고로 남은 데는 까닭이 있습니다. 신라 사람들은 나무 덧널에 주검과 보물을 모시고 그 위에 사람 머리만 한 강돌을 산더미로 쌓은 뒤 흙을 덮었습니다. 적석목곽분이라 부르는 이 방식은 도굴꾼이 굴을 뚫을 수 없는 구조여서, 천오백 년 동안 황금이 고스란히 남았습니다. 1973년의 발굴에는 일화가 있습니다. 가장 큰 황남대총을 열기에 앞서 연습 삼아 곁의 작은 무덤부터 열었는데, 그 작은 무덤에서 금관과 함께 하늘을 나는 흰 말 그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천마총이라는 이름이 거기서 났고, 그 그림이 그려진 바탕이 자작나무 껍질이었습니다. 자작나무 숲의 땅에서 이 글을 읽는 독자시라면, 이 대목에서 잠시 멈추셔도 좋겠습니다. 곁의 황남대총에서는 더 뜻깊은 사실이 나왔습니다. 부부를 모신 쌍분 가운데 금관이 나온 쪽은 부인의 무덤이었습니다. 그 옛날 이 나라에서 여성의 지위에 대해 이 무덤이 증언한 셈인데, 첫 여왕의 등장이 우연이 아니었음을 여기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초원에서 온 손님들
신라 금관은 여섯 점이 전합니다. 한자 출(出) 자를 거듭 세운 듯한 나뭇가지 장식과 사슴뿔 장식을 세운 그 생김을 두고, 학자들은 오래전부터 북방 초원의 미술을 떠올려 왔습니다. 나무와 사슴은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 초원 사람들이 하늘과 땅을 잇는다고 여기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돌무지를 쌓아 올린 무덤 방식 또한 초원의 봉분 쿠르간과 닮았다고 보는 학설이 있습니다. 단정할 일은 아니지만, 닮음이 우연만은 아니리라는 단서들이 무덤 속에서 잇달아 나왔습니다. 학문은 신중하라 가르치지만, 단서는 상상하라 부추깁니다.
경주 계림로 장식보검(사진출처:국립경주박물관)
가장 또렷한 단서는 칼 한 자루입니다. 1973년 경주 계림로의 무덤에서 나온 황금 보검, 금 알갱이를 촘촘히 붙이고 붉은 석류석을 박아 꾸민 이 칼은 신라의 솜씨가 아니라 중앙아시아 계통의 물건으로 밝혀졌는데, 놀랍게도 같은 꼴의 검 장식이 카자흐스탄 보로보예에서 출토된 바 있습니다. 중앙아시아의 초원과 경주가, 천오백 년 전 초원길로 이어져 있었다는 물증입니다. 알마티 가까운 이식의 쿠르간에서 발견된 황금 갑옷의 젊은 전사, 독립광장 기둥 꼭대기에 서 있는 바로 그 황금인간, 가 나온 사연을 아는 독자라면, 경주의 금관들이 아주 낯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황남대총에서는 지중해 언저리에서 만든 새 머리 모양 유리병과 유리잔까지 나왔으니, 서라벌은 초원길과 바닷길이 끝나는 동쪽 종점의 도시였습니다. 길은 물건만 나르지 않습니다. 무덤 짓는 기술과 왕관의 꿈까지 실어 날랐을 것입니다. 고려인의 이주가 발생하기 아득히 전에도, 초원의 길은 두 땅 사이를 오가고 있었습니다. 돌에 새겨진 증인도 있습니다. 시내 동남쪽 괘릉, 원성왕의 능으로 전하는 무덤, 앞에는 곱슬한 수염에 깊은 눈, 우뚝한 코의 무인석이 칼을 짚고 섰는데, 누가 보아도 서역 사람의 얼굴입니다. 천 년 전 서라벌 거리를 먼 나라 사람들이 실제로 걸어 다녔음을 돌이 증언합니다. 동해에서 왔다는 처용의 탈이 짙은 눈썹과 큰 코를 지닌 까닭도 같은 맥락에서 읽는 학자들이 있습니다.향기 없는 모란, 별을 보는 대
632년, 신라는 동아시아 역사에서 보기 드문 선택을 합니다. 임금 자리를 이을 성골 남자가 없자 덕만 공주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첫 여왕 선덕입니다. 같은 시대 당나라의 측천무후보다도 한 세대 앞선 즉위였습니다. 한국의 안방에는 드라마 〈선덕여왕〉으로 새겨진 이름이기도 하니, 사극으로 한국사를 배운 한류 팬이라면 덕만 공주의 실제 무대를 걷게 되는 도시입니다. 신라는 뒤에도 두 여왕을 더 세웠으니, 이 도시는 동아시아에서 여왕을 가장 여럿 둔 옛 서울이기도 합니다. 『삼국유사』는 그녀의 밝은 눈을 보여 주는 이야기들을 전합니다. 공주 시절 당나라에서 모란 그림과 씨앗이 오자, 그림에 나비가 없으니 이 꽃은 향기가 없으리라 했고 심어 보니 과연 그러했다는 이야기가 그 하나입니다. 겨울 못가에 개구리 떼가 우는 것을 보고 서쪽 골짜기의 적병 매복을 짚어 내 격퇴했다는 이야기가 또 하나입니다. 설화는 설화로 읽되, 사람들이 이 임금에게 어떤 눈을 기대했는지는 잘 보여 줍니다.
여왕은 즉위하던 무렵 분황사를 세웠습니다. 돌을 벽돌처럼 다듬어 쌓은 그 탑이 지금도 세 층을 지키고 섰습니다. 뒷날 원효가 머물며 글을 쓴 절이기도 합니다. 여왕의 눈은 하늘로도 향했습니다. 선덕여왕 당시 쌓았다고 전하는 첨성대가 시내 들판에 서 있습니다. 병 모양으로 돌을 쌓아 올린 이 대는 동아시아에 남은 가장 오래된 천문 시설로 꼽히는데, 쌓인 돌의 수가 한 해의 날수와 비슷하다는 풀이까지 있을 만큼, 정확한 쓰임새와 숫자의 뜻을 두고는 오늘도 학설이 분분합니다. 밤이면 불을 밝혀, 천사백 년 묵은 돌탑이 별 보던 제 일을 기억하는 듯 별처럼 섭니다. 다만 하늘의 때를 살피는 일이 나라 다스림의 한가운데 있었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이 여행이 절기 읽기에서 비롯한 까닭과 같은 자리입니다.
하지만 여왕의 시대는 위기의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백제의 공세가 거세지자 선덕은 황룡사에 아홉 층 나무 탑을 세웠습니다. 층마다 이웃 아홉 나라를 누른다는 염원을 담은 호국의 탑으로, 백제의 장인 아비지를 모셔다 지었으니 적국의 손을 빌려 적을 막은 셈입니다. 황룡사에는 본디 신라가 나라의 보배로 꼽던 세 가지 가운데 둘, 거대한 금동 부처 장육존상과 이 구층탑, 이 있었습니다. 높이가 팔십 미터에 이르렀으리라 추정되는 탑은 육백 년을 서 있다가 몽골 침입 때 불상과 함께 불탔고, 지금은 너른 절터에 주춧돌만 남았습니다.
젊은 김유신과 김춘추가 이 여왕의 시절에서 자랐고, 삼국의 통일은 그 다음 세대의 일이 됩니다. 여왕은 제 죽음도 내다보았다고 『삼국유사』는 전합니다. 자신을 도리천에 묻으라 하니 신하들이 그곳이 어디냐 물었고, 낭산 마루라 답했습니다. 수십 년 뒤 그 능 아래에 사천왕사가 들어서자 사람들이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불교의 하늘에서 도리천은 사천왕 하늘 바로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언의 성취로 꾸며진 설화이지만, 한 임금의 무덤 자리가 우주의 지도 위에 놓였다는 발상만은 이 도시답습니다.
주춧돌 위에서 읽는 법
경주에 가시거든 해 질 무렵 대릉원 돌담길을 걸어 보시기 바랍니다. 능선과 능선이 맞물리는 부드러운 윤곽 너머로 노을이 내리면, 죽음이 이렇게 온화한 풍경일 수 있다는 데 놀라게 됩니다. 천마총은 내부가 공개되어 무덤의 속을 눈으로 볼 수 있고, 계림 숲은 신라 김씨의 시조가 금궤짝에서 나왔다는 설화의 무대, 닭 울던 숲이라 하여 계림이고, 신라의 또 다른 나라 이름이 되기도 했습니다. 첨성대와 그 숲을 지나 월지에 이르면 옛 왕궁 연못의 야경이 물 위에 뜨고, 월성 곁에는 복원된 월정교가 물에 제 모습을 비추고 섰습니다. 이 연못 바닥에서는 그릇과 배와 건축 부재 수만 점이 건져졌는데, 그 가운데 열네 면에 벌칙을 새긴 술자리 주사위 주령구도 있었습니다. 천 년 전의 유쾌한 술자리의 분위기가 그대로 현재와 만나게 된 셈입니다. 황룡사 터에는 일부러라도 들르시기를 권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너른 들에 주춧돌만 바둑판처럼 놓였는데, 그 빈자리가 어떤 복원보다 크게 말합니다. 남쪽 들머리의 포석정도 잠깐 추천할 만 만합니다. 전복 모양 돌물길에 잔을 띄우던 곡수의 자리이자, 신라 마지막 임금이 변을 당했다고 전해지는 곳이니, 천 년의 끝자락이 그 작은 물길에 고여 있습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했지요, 허기는 팥소를 얇은 피로 감싼 경주의 명물 황남빵으로 달래십시오. 대를 이어 담그는 교동법주 한 잔은 천년 고도의 가양주입니다.
박물관에서는 금관과 계림로 보검을 꼭 찾아보시고, 보검 앞에서는 고향 생각이 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뜰의 성덕대왕신종, 이른바 에밀레종의 깊은 울림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종에 얽힌 아이의 전설은 뒷날 덧붙은 이야기로 보는 견해가 많지만, 소리만은 천이백 년 전 그대로입니다. 종의 몸에는 천 자가 넘는 글이 새겨져, 소리로 중생을 깨우겠다는 발원까지 글자로 남았습니다. 날도 좋고 기운도 남아있다면 이제는 걸음을 남산으로 향하셔도 좋습니다. 골짜기마다 바위에 새긴 부처와 탑이 흩어져 있어 산 하나가 통째로 절집이라 불리는 곳입니다. 하루를 더 내실 수 있다면 토함산의 불국사와 석굴암입니다. 『삼국유사』는 재상 김대성이 현생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굴암을 지었다고 전합니다. 마주 선 두 탑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화려의 극을 달린 다보탑과 단정의 극을 지킨 석가탑, 그 석가탑 속에서는 1966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로 꼽히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나왔습니다. 팔만대장경보다 오백 년 앞선 인쇄의 첫 새벽이 탑 안에 잠들어 있었습니다. 다보탑은 옛 십 원짜리 동전의 얼굴이기도 하니, 백 원의 이순신에 이어 한국의 지폐 기행이 한 번 더 이어지는 셈입니다.
경주 불국사[경주시 제공]
사주명리의 원리는 음양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옛 동양은 죽음을 삶의 반대가 아니라 밤이 낮의 짝이듯, 삶의 짝으로 읽었습니다. 경주는 음양이라는 질서를 책이 아니라 도시로 살아 보인 곳입니다. 음의 언덕과 양의 골목이 담 없이 한 마당에 살고, 그래서 이 도시에서는 옛날이 박물관 유리장 너머가 아니라 골목 어귀에 있습니다. 음과 양을 이웃으로 둔 도시는, 과거와 현재도 이웃으로 삼습니다.죽은 자를 내쫓지 않은 도시는 시간도 내쫓지 않습니다. 경주가 오늘 가장 사랑받는 옛 도시가 된 비결이 거기 있을 것입니다. 한국의 학생들이 대를 이어 수학여행으로 이 도시를 찾는 까닭이기도 합니다. 어른이 되어 다시 와 보면, 같은 능이 다르게 말을 겁니다. 어릴 적엔 거대한 크기로만 보이던 언덕이, 나이 들어서는 고요한 시간으로 보이는 까닭입니다. 여러분이 능 사이 골목에서 아침을 맞는 날, 천오백 년이 이웃처럼 인사를 건네 올 것입니다. 어쩌면 초원길 저쪽 끝에서 온 먼 친척의 인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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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 메모
● 가는 길: 서울에서 KTX로 두 시간, 경주역에서 시내(대릉원 일대)까지 버스 삼십 분 안팎.
● 이틀 동선: 첫날 대릉원·천마총 → 황리단길 → 첨성대·계림·월성 → 국립경주박물관 (금관·계림로 보검·성덕대왕신종) → 저녁에 동궁과 월지 야경. 이튿날 토함산, 시내에서 10·11번 버스로 불국사, 이어 석굴암, 돌아오는 길에 황룡사 터.
● 철과 시간: 능 곁 골목은 이른 아침, 월지는 불 켜진 밤이 으뜸. 벚꽃철(4월 초)에는 보문호 일대가 장관입니다.
● 맛과 쉼: 황남빵 한 봉지가 경주 길참의 정석입니다.
● 알아 둘 것: 첨성대·계림 일대 들판은 무료로 거닐 수 있습니다. 박물관의 보검 앞에서는 아마도 고향 생각이 나실 것입니다.
알아 두면 좋은 말들
●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 나무 덧널 위에 돌무지를 쌓고 흙을 덮은 신라 무덤.
● 쿠르간: 초원 지대의 큰 봉분.
● 성골(聖骨): 신라 최고 신분. 임금은 본디 이 신분에서만 났습니다.
● 심초석(心礎石): 탑의 중심 기둥을 받치던 주춧돌.
● 삼국유사(三國遺事): 고려의 승려 일연이 엮은 옛 이야기 모음. 정사가 빠뜨린 설화의 곳간.
● 도굴(盜掘): 무덤을 몰래 파 보물을 훔치는 일.
● 호국(護國): 나라를 지킴. 황룡사 구층탑이 그 염원의 탑이었습니다.
● 발굴(發掘): 학자들이 옛터를 파서 조사하는 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