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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7장 · 주막의 골방에서 오백 권의 서재로 (다산 정약용의 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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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7장 · 주막의 골방에서 오백 권의 서재로 (다산 정약용의 강진)
      12.09.2026
      강진의 옛 이름은 탐진(耽津)입니다. 탐라, 곧 제주로 가는 나루라는 뜻이니, 이름부터가 제주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추사가 제주 가시 울타리에 갇히기 사십 해쯤 앞서, 바로 그 나루 고을에 또 한 사람의 유배객이 닿았습니다. 바로 수원 화성을 설계하던 서른 살의 정약용, 정조 임금의 총애를 받던 그 젊은 천재가, 마흔 살에는 죄인의 몸으로 남도 끝에 서 있었습니다. 북쪽으로 월출산 바위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서고 앞으로는 강진만 갯벌이 트인, 산과 바다 사이의 고을, 그가 여기서 보낸 열여덟 해가 이번 장의 이야기입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 직계 후손 배우 정해인 (사진출처= sbs뉴스)

      갈림길에서 헤어진 형제

      모든 것은 1800년에서 비롯합니다. 정조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임금의 그늘에서 일하던 사람들에게 시련이 닥쳤습니다. 정조의 행차가 건너던 한강 배다리를 설계한 것도, 화성의 거중기를 고안한 것도 정약용이었습니다. 정조는 그를 아껴 곁에 두고 책을 내리고 시를 나누었으나, 임금의 죽음은 곧 그의 의지처가 무너진 것이었습니다. 이듬해 천주교 신자들을 잡아들이는 신유박해가 일었고, 이에 서학에 깊이 닿아 있던 정씨 형제들도 휩쓸렸습니다. 셋째 형 정약종은 신앙을 버리지 아 처형되었고, 정약용은 봄에 한 차례 경상도 장기로 귀양 갔다가 가을의 새 옥사로 다시 끌려와 문초를 받았으며, 그해 겨울 둘째 형 정약전과 나란히 남쪽으로 길이 정해졌습니다.

      나주 율정점, 갈림길의 주막에서 형제는 마지막 밤을 보냈습니다. 초가 주막 새벽 등잔이 푸르스름 꺼지려 하는데, 일어나 샛별을 바라보니 이별할 일이 참담하더라, 그 밤을 적은 시가 남아 있습니다. 날이 밝자 형은 서쪽 바다 흑산도로, 아우는 남쪽 강진으로 길이 갈렸고, 두 사람은 살아서 다시 만나지 못했습니다. 형은 섬에서 물고기를 들여다보며 『자산어보』라는 바다 생물에 관한 백과사전을 썼고, 동생이 풀려나면 건너오기 쉬우라고 뭍에 가까운 섬으로 거처를 옮겨 기다리다가, 해배 두 해 전에 눈을 감았습니다. 갈림길 하나가 평생의 이별이 된 것입니다. 이 형의 섬살이는 영화 〈자산어보〉로 만들어져, 흑백의 화면이 그 바다와 책의 사연을 한국 밖의 관객에게까지 펼쳐 보였습니다.

      주막의 서재

      강진에 닿은 죄인을 받아 주는 집은 없었습니다. 천주쟁이 대역죄인이라는 소문에 사람들이 문을 닫아걸 때, 동문 밖 주막의 늙은 주모가 골방 하나를 내주었습니다. 정약용은 그 골방에 이름을 붙였습니다. 사의재(四宜齋), 네 가지를 마땅히 하는 방. 생각은 담백하게, 용모는 단정하게, 말은 적게, 행동은 무겁게. 무너지기 가장 쉬운 자리에서 그는 가장 엄격한 문패부터 달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훗날 이 시절을 두고 그는, 벼슬살이에 쫓기던 몸이 비로소 책 읽을 겨를을 얻었다고 적었습니다. 유배를 형벌이 아니라 여유로 고쳐 읽은 셈입니다. 골방을 내준 주모는 끝내 이름이 전하지 않습니다. 역사는 가끔 가장 큰 은인을 무명으로 둡니다. 다만 다산이 뒷날 그 주모의 말 한마디, 부모 은혜는 같지 않다는 항변, 에 무릎을 친 일을 글로 적어, 골방 주인의 슬기만은 책에 올랐습니다. 골방은 곧 서당이 되었습니다. 그는 아이들 가르칠 한자 교재 『아학편』부터 엮었는데, 천자문의 글자 배열이 아이에게 맞지 않다고 보아 눈높이에 맞게 이천 자를 다시 짠 책이었습니다. 유배 첫 해의 저술이 교과서였다는 사실은 이 사람의 결을 잘 드러냅니다. 가르칠 아이가 있는 한 유배지도 교실이라는 믿음이었습니다.

      읍내 아전의 아이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는데, 그 가운데 열다섯 살 황상이 있었습니다. 저는 둔하고, 앞뒤가 막혔고, 답답합니다. 이런 제가 공부할 수 있습니까. 머뭇거리며 묻는 소년에게 스승은 답했습니다. 배우는 사람에게 큰 병은 따로 있다, 외기만 잘하는 것, 글재주만 좋은 것, 깨달음만 빠른 것이다. 둔한 것을 뚫는 데는 방법이 하나뿐이니,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부지런하라. 소년은 이 삼근(三勤)의 가르침을 평생 종이에 적어 품고 살았고, 늙어서까지 시를 지었고, 뒷날 제주의 추사마저 그 시를 아꼈습니다. 가르침을 받은 지 꼭 예순 해 되던 같은 임술년, 백발의 황상은 그날의 문답을 글로 적어 남겼습니다. 주막 골방에서 시작된 가르침이, 섬과 뭍을 그렇게 넘고 돌아 책이 되었습니다.


      정다산유적(초당 및 연지) (사진줄처=국가유산포털)

      차나무 산의 초당

      1808년, 정약용의 거처는 읍내를 벗어나 만덕산 기슭으로 옮겨집니다. 어머니 쪽 집안인 해남 윤씨, 제2장 수원에서 화산을 길지로 꼽았던 윤선도의 그 집안입니다. 산속 정자를 빌린 것인데, 뒷산에 차나무가 많아 산 이름이 다산(茶山)이었습니다. 그는 그 산 이름을 제 호로 삼았습니다. 퇴계가 시내에서, 초당 허엽이 마을에서 호를 얻었듯, 이번에도 땅이 사람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다산의 외증조부가 국보 자화상의 화가 공재 윤두서이니, 뒷날 치마폭에 매화와 새를 그려 낸 그 붓끝에는 외가의 그림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다산초당의 시간은 조선 학문사에서 가장 치열한 10년으로 꼽힙니다. 초당은 혼자의 서재가 아니라 공방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자료를 베끼고 추리면 스승이 얽고 다듬는 분업, 오백 권은 그 열정이 낳은 수확이기도 합니다. 동암과 서암을 짓고 그 분업의 틀 위에서 토론하고 고쳐 쓰며, 그는 경전 연구에서 나라 경영까지 오백 권을 헤아리는 책을 지었습니다. 나라의 틀을 다시 짜자는 『경세유표』, 그리고 고을 수령이 백성을 어찌 돌볼 것인가를 부임에서 물러남까지 낱낱이 적은 『목민심서』가 모두 이 산방에서 나왔습니다. 목민할 마음은 있으나 몸소 행할 수 없는 처지라 마음 심 자를 써서 심서(心書)라 이름했다고 서문에 밝혔으니, 죄인의 자리에서도 다스림의 꿈을 놓지 않은 제목입니다. 비슷한 시기의 글 원목에서 그는 묻습니다. 백성을 위해 목민관이 있는가, 백성이 목민관을 위해 사는가. 물음 하나에 오백 권의 방향이 다 들어 있습니다. 정약용의 답은 물론 전자였습니다. 바위에는 손수 정석(丁石) 두 글자를 쪼아 두었으니, 제 성씨 한 자를 새긴 가장 조촐한 문패였습니다. 마당의 너럭바위 다조는 찻물을 달이던 부뚜막이고 뒤란의 샘 약천은 그 찻물의 출처였으니, 초당의 풍경이 죄다 차로 통합니다. 동암에는 뒷날 추사가 써 보낸 보정산방(寶丁山房), 정약용을 보배로 모신다는 뜻, 현판이 걸려, 두 유배객의 인연이 한 마루에 겹칩니다.

      산 너머에는 벗이 있었습니다. 고개 하나를 넘으면 백련사, 그 절의 젊은 학승 혜장과 그는 차와 『주역』을 두고 밤을 새웠고, 차가 떨어지면 차를 구걸하는 글, 걸명의 글을 지어 보낼 만큼 차에 깊이 들었습니다. 훗날 추사의 벗이 되는 초의도 이 무렵 초당을 드나들며 배웠으니, 조선 후기 차 문화의 물줄기가 이 숲길에서 합수한 셈입니다. 그는 이웃 골짜기 백운동 별서의 경치에 반해 열두 풍경의 시를 짓고 초의에게 그림을 그리게 해 백운첩이라는 시화첩도 남겼습니다. 그 벗 혜장이 마흔을 못 채우고 입적하자 다산은 비명을 지어 손수 벗을 묻었으니, 산길은 그 뒤로 한동안 쓸쓸했을 테지요.

      가장 사무치는 기록은 집으로 보낸 것들입니다. 폐족이 되었으니 너희는 더욱 책을 읽어야 한다고 두 아들, 학연과 학유, 을 다그치는 편지들이 남아 있습니다. 작은아들 학유는 뒷날 한 해 농사일을 달마다 노래한 농가월령가를 지었으니, 그 다그침은 끝내 노래로 열매를 맺었습니다. 닭을 치더라도 책 읽은 사람답게 치라며 빛깔 따라 홰를 나누고 기록하며 기르라 일렀으니, 그 훈계는 살림의 바닥까지 내려갑니다. 그리고 1810년에는 부인 홍씨가 시집올 때 입었던 다홍치마를 빛바랜 채로 보내오자, 그 치마를 잘라 작은 서첩을 만들어 아들들에게 줄 글을 적었습니다. 노을빛 치마라는 뜻의 하피첩입니다. 남은 치마폭에는 매화 가지에 앉은 새 두 마리를 그려 시집가는 딸에게 주었습니다. 강릉에서 사임당의 치마폭 포도를 보았다면, 강진에서는 치마가 또 한 번 화폭이 됩니다. 이번에는 그리움의 화폭입니다.

      숲길에서 읽는 법

      강진에 가시거든 다산초당을 귤동 마을 쪽에서 걸어 오르시기 바랍니다. 좁은 산길에 나무뿌리들이 힘줄처럼 드러나 길을 덮고 있어 뿌리의 길이라 불리는 흙길입니다. 초당 둘레 비탈에는 지금도 야생 차나무가 자라, 다산이라는 호의 뿌리가 아직 잎을 냅니다. 사월이면 그 찻잎 덖는 향이 골짜기에 번집니다. 초당 곁 벼랑 위에는 천일각이라는 정자가 서 있습니다. 형이 있는 흑산 쪽 바다를 그리워하며 바라보았다는 자리에 후대가 세운 집이니, 율정의 이별이 이 벼랑까지 닿아 있습니다. 맑은 날이면 강진만 너머로 섬 그림자들이 줄을 서니, 그 가운데 어느 쪽이 형의 바다였을지 가늠해 보게 됩니다. 초당 마루에 앉아 숨을 고른 뒤에는 반드시 산허리 숲길을 마저 걸어 백련사까지 가시기를, 다산과 혜장이 서로를 찾아 넘나들던 그 길입니다. 이십 분 남짓한 길 끝, 절 둘레의 동백숲은 이른 봄이면 붉은 꽃을 통째로 떨굽니다. 읍내로 돌아오면 사의재가 주막과 함께 복원되어 있어, 골방의 크기를 눈으로 잴 수 있습니다. 읍내에는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시인 김영랑의 생가도 있어, 오월이면 마당 가득 모란이 핍니다. 유배의 고을이 시의 고을로 늙어 간 셈입니다. 그리고 강진은 다산만의 고을이 아닙니다. 고려 오백 년 청자의 큰 몫이 이 고을 바닷가 가마에서 구워졌으니, 사당리 일대의 가마터가 사적으로 남고 곁에 청자박물관이 섰습니다. 비색이라 불린 그 푸른빛과, 흙에 무늬를 파고 다른 흙을 메워 넣는 상감의 기법이 이 갯가에서 익었습니다. 탐진의 바닷길은 책만이 아니라 그릇도 실어 날랐으니, 푸른 그릇과 푸른 글, 이 고을의 두 푸름입니다.

      밥상은 남도 한정식의 진면목입니다. 상다리가 휘는 강진 한정식에, 맑은 개울 새우로 담근 토하젓 한 종지가 밥도둑 노릇을 합니다.

      갈림길에서 헤어져 다시 만나지 못한 형제의 사연에, 공명하는 알마티의 독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화물열차가 갈라놓은 형제와 자매를, 국경이 갈라놓은 부모와 자식을 기억하는 공동체가 지금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산이 강진을 떠나며 한 일이 그래서 더 깊이 읽힙니다. 그는 제자들과 다신계(茶信契)라는 계를 맺었습니다. 흩어진 뒤에도 해마다 차를 만들어 부치고 서로의 안부를 챙기자는 약속, 차 다(茶)에 믿을 신(信), 흩어짐을 이기는 법으로 그가 고른 것은 신의였습니다. 약속은 빈말이 아니어서, 제자와 그 후손들이 마재로 차를 부친 일이 두고두고 이어졌습니다.

      1818년 가을 그는 열여덟 해 만에 풀려나 고향 마재로 돌아갔습니다. 이듬해 옥사를 다루는 『흠흠신서』를 보태 일표이서를 완성했고, 회갑에는 스스로 묘지명을 지어 일생을 정리했습니다. 제2장에서 읽은 거중기 사만 냥의 회고가 바로 그 글에 있습니다. 그리고 1836년 결혼 예순 돌을 맞은 회혼례 날 아침에 식구들이 모인 집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유배의 시간이 그를 가둔 것이 아니라 깊은 연구의 시간으로 만들었다는 것, 강진의 골방과 초당이 남긴 가르침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답사 메모

      ● 가는 길: 서울 센트럴시티에서 강진까지 고속버스 다섯 시간 남짓, 광주에서 갈아타면 한 시간 반.
      ● 하루 동선: 사의재 (주막과 골방) → 차로 귤동 마을 → 다산초당 (뿌리의 길 오르막 십오 분, 정석 바위와 천일각) → 숲길 이십 분 → 백련사 → 다산박물관 → 읍내 영랑생가.
      ● 철과 시간: 백련사 동백은 2~3월이 절정이고, 초당 오르는 숲은 비 온 뒤가 가장 깊습니다.
      ● 맛과 쉼: 강진은 남도 한정식의 고장, 점심 한 상이 답사의 반입니다. 사의재 주막에서는 주모의 국밥상을 재현해 팝니다.
      ● 알아 둘 것: 초당 길은 나무뿌리 계단이라 운동화가 좋습니다. 천일각에서 보이는 바다가 형 약전의 흑산 쪽임을 알고 서면 풍경이 달라집니다.

      알아 두면 좋은 말들

      ● 유배(流配)·해배(解配): 죄인을 먼 곳으로 보내던 형벌과, 그 형이 풀리는 일.
      ● 목민(牧民): 백성을 기른다는 뜻. 고을 수령의 일을 이르던 말.
      ● 다신계(茶信契): 다산이 제자들과 맺은 계. 차와 신의로 묶인 모임.
      ● 살인상생(殺印相生): 명리에서 나를 치는 힘이 나를 기르는 힘으로 바뀌는 짜임.
      ● 자산어보(玆山魚譜): 정약전이 흑산도에서 지은 바다 생물 책.
      ● 폐족(廢族): 죄로 벼슬길이 막힌 집안.
      ● 비명(碑銘): 비석에 새기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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