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위에서 날개를 펼친 학
1592년 여름,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석 달이 못 된 바다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일본 수군의 주력이 거제도와 통영 사이 좁은 물목 견내량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지금 거제대교가 걸려 있는 그 물길로, 폭이 좁은 데는 삼사백 미터에 지나지 않는 바다의 고갯마루입니다. 이순신은 그 좁은 물에서 싸우지 않았습니다. 판옥선 몇 척으로 적을 꾀어 한산도 앞 너른 바다로 끌어낸 뒤, 기다리던 함대가 학이 날개를 펴듯 둥글게 에워쌌습니다. 본디 뭍에서 쓰던 진법을 바다 위에 옮겨 펼친 학익진입니다. 날개의 맨 앞에서는 등에 쇠못 돋친 거북선이 돌격해 적진을 휘저었습니다. 한 달 앞서 사천 바다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낸 배가, 여기서 제 이름에 걸맞은 활약을 했습니다. 적의 눈에는 장님 배라 불릴 만큼 낯선 물건이었다고 전합니다. 갇힌 것은 끌려 나온 쪽이었고, 적선 수십 척이 그 날개 안에서 부서졌습니다. 적장은 몸만 빼 무인도에 숨어 미역으로 연명했다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한산대첩, 이 승리로 조선 수군이 남해의 제해권을 쥐었고, 바닷길로 군량과 병력을 올려 보내려던 일본의 계획은 거기서 무산되었습니다. 이 전투가 임진왜란의 분수령으로 꼽히는 까닭입니다.
눈여겨볼 것은 진법보다 그 앞의 판단입니다. 좁은 물목은 큰 함대가 힘을 쓰지 못하는 자리이니 적을 넓은 곳으로 끌어낸다, 다섯 해 뒤 명량에서 그는 정반대로 했습니다. 조정이 수군을 없애려 하자 그는 장계에 적었습니다.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있나이다. 그 배에 한 척을 더한 열세 척으로, 이번에는 물살 사나운 좁은 울돌목으로 적의 대함대를 끌어들여 막아 냈습니다. 같은 사람이 정반대 전술을 쓴 까닭은 하나, 답이 사람이 아니라 지형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이 줄곧 읽어 온 것이 옛사람들의 땅 읽기라면, 이순신은 그 이치를 바다에서 읽은 사람입니다. 물의 넓고 좁음, 물살의 방향과 때, 바다에도 지리가 있고, 그는 그것을 누구보다 깊이 읽었습니다.
승전 이듬해 그는 삼도의 수군을 통틀어 거느리는 첫 통제사가 되었고, 본영을 한산도에 두었습니다. 막사 이름은 운주당, 장막 안에서 꾀를 낸다는 뜻입니다. 앞서 도산의 제자 류성룡이 『징비록』에 적어 두기를, 이순신은 이 집을 밤낮 열어 두고 졸병이라도 군사 일을 말하려는 자는 들어와 말하게 했다고 합니다. 사령부가 토론방이었던 셈입니다. 달 밝은 밤이면 그는 망루에 올랐습니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선가 들려오는 피리 소리, 널리 사랑받는 이 시조가 그 망루의 밤에서 나왔다고 전합니다. 시조에 담긴 시름의 속내는 일기가 보여 줍니다.
『난중일기』의 한산도 시절을 읽으면 큰 장군보다 한 인간이 보입니다. 그는 멀리 계신 어머니의 안부에 잠을 설치고, 군사들을 먹이려고 둔전을 일구고 소금을 굽고 청어를 잡아 군량과 바꾸었습니다. 나라가 보내 주지 못하는 살림을 바다에서 길어 올린 것입니다. 싸움의 절반은 먹이는 일이었고, 그는 그 절반에도 명장이었습니다. 진중에서 무과를 열어 바닷가의 젊은이들을 뽑아 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모함으로 그가 끌려간 사이 함대는 칠천량에서 무너졌고, 한산의 본영도 불탔습니다. 백의종군 길에 어머니의 부고를 받은 날, 일기에는 하늘이 캄캄하다는 말이 남았습니다. 그리고 전쟁의 마지막 바다 노량에서, 그는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싸움이 급하니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 그 새벽의 마지막 말로 전해 오는 한마디입니다.
전쟁의 끝을 바라며
전쟁이 끝나고 여섯 해 뒤인 1604년, 통제영은 한산도 건너 두룡포에 뭍의 자리를 잡았습니다. 포구가 깊고 물길의 요충이라 골랐다는 그 내력은 통제사 이경준을 기린 두룡포기사비에 새겨져 세병관 곁에 서 있습니다. 도시 통영의 탄생입니다. 이듬해 그 한가운데 세워진 정청이 지금도 남아 있는 세병관(洗兵館)입니다. 기둥 쉰 개가 떠받치는 너른 마루, 조선의 관아 건물 가운데 가장 큰 축에 들어 국보가 된 집입니다. 임금을 상징하는 패를 모시고 멀리서 예를 올리던 객사이기도 했으니 군문의 가장 높은 마당이었던 셈인데, 정작 새겨 둘 것은 이름입니다. 은하수를 끌어다 갑옷과 병기를 씻어 길이 쓰지 않게 하리라, 당나라 시인 두보의 시에서 따온 만하세병(挽河洗兵)의 준말입니다. 군대의 심장에 무기를 씻어 거두겠다는 이름을 건 것이니, 전쟁을 치른 사람들이 바란 것은 전쟁의 끝이었습니다.
통제영은 그로부터 이백구십 년을 이 자리에 있었고, 이순신에서 비롯한 통제사의 자리를 이백 명이 넘는 장수가 이어 거쳤습니다. 한 도시의 첫 주민이 군인과 장인이었던 셈인데, 그 살림 이야기는 잠시 뒤에 잇겠습니다. 삼도의 수군을 호령하던 군문이었지만, 이 군문이 도시에 남긴 가장 뜻밖의 유산은 따로 있습니다.
열두 공방이 기른 손
큰 군영은 큰 살림입니다. 통제영은 군선과 군복과 군기를 스스로 만들어 써야 했고, 그래서 담장 안에 공방 열두 곳을 두었습니다. 갓을 짓고 부채를 매고 소반을 짜고 자개를 입히고 쇠 장석을 두드리는 장인들이 대를 이어 그 안에서 일했습니다. 전복 껍데기 안쪽의 무지갯빛을 오려 옻칠에 박아 넣는 나전은 재료부터가 이 바다의 것이었습니다. 통제영이 문을 닫은 뒤에도 손은 남았습니다. 통영갓은 말총을 결어 짓는 갓의 으뜸으로 꼽혀 갓 하면 통영이라는 말이 통했을 정도입니다. 통영갓, 통영소반, 통영 나전칠기, 물건 이름 앞에 고을 이름이 붙어 전국에 팔리는 것은 솜씨가 보증이 된다는 뜻이니, 열두 공방 삼백 년이 기른 손끝이 그 보증이었습니다. 그 손은 끊기지 않아, 오늘도 통영에는 나전과 소목과 누비의 장인들이 공방을 잇고 있습니다. 손끝만이 아니라 몸짓도 남았습니다. 통제영 제사에서 추던 칼춤 승전무와 저잣거리의 탈놀음 통영오광대가 나란히 나라의 무형유산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이십세기, 이 항구는 손끝의 도시를 넘어 예술가의 산지가 됩니다. 통영에서 자란 윤이상은 유럽 현대음악의 한복판에서 동아시아의 소리를 세계의 언어로 만든 작곡가가 되었고, 통영에서 난 박경리는 『토지』라는 큰 강 같은 소설을 남겼습니다. 고향 항구의 골목과 사람들을 그린 『김약국의 딸들』 또한 이 바닥이 무대입니다. 꽃을 노래한 김춘수가 이 골목에서 자랐고, 깃발의 시인 유치환은 항구의 우체국 창가에서 연시를 부쳤습니다. 그 사연이 지금도 중앙우체국 앞에 시비로 서 있습니다. 화가 전혁림은 이 바다의 코발트빛을 평생 화폭에 옮겼습니다. 피란 시절의 이중섭이 머물며 소를 그린 곳도 통영입니다. 나전칠기 기술원에서 후진을 가르치며 이 항구의 빛을 화폭에 담던 시절이었습니다. 한 바다가 한 세대의 예술가를 이렇게 길러 낸 까닭을 사람들은 흔히 통제영 삼백 년이 기른 장인의 공기와 항구의 트인 기질로 설명합니다만, 끝내 다 설명되지 않는 나머지가 있다면 그것이 예술일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칼을 만들던 전쟁의 도시가 노래와 그림의 예술 도시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통영 윤이상공원
통영에 가시거든 먼저 미륵산에 오르시기 바랍니다. 케이블카를 타면 산정 가까이 이를 수 있는데, 거기 서면 한산도와 견내량과 다도해가 지도처럼 발아래 펼쳐집니다. 학이 날개를 펴던 바다를 한눈에 읽는 자리입니다. 내려와서는 세병관 마루에 앉아 보십시오. 신을 벗고 오르는 그 너른 마루에 바닷바람이 지나가는데, 이 집 이름이 무엇을 씻겠다는 약속이었는지 떠올리면 바람의 결이 달라집니다. 멀지 않은 충렬사는 이순신을 모신 사당으로, 명나라 황제가 보내온 여덟 가지 의장 팔사품이 그곳에 전하고, 사당 앞 동백나무가 봄이면 붉게 핍니다. 이른 아침이라면 서호시장에서 따끈한 국 한 그릇, 뱃사람들의 새벽 국밥 시락국이 이 시장의 명물입니다. 한끼로 하루를 열고, 항구 강구안을 한 바퀴 돌고, 벽화 언덕 동피랑에 오르십시오. 동쪽 벼랑이라는 뜻의 이 산동네는 철거될 처지였다가 벽화 공모로 살아남은 마을이니, 붓이 골목 하나를 구한 셈입니다. 하루를 더 낼 수 있다면 사량도나 욕지도로 배를 타 보시기를, 한려수도의 속살은 결국 섬에서 보입니다. 미륵도와 뭍 사이 좁은 물목 판데목에는 1932년에 뚫린 해저터널이 지금도 걸어서 지날 수 있게 남아 있습니다. 왜군이 갇혀 팠다는 전승과 식민지의 토목이 맞물린, 사연 많은 곳입니다. 뱃길 반 시간이면 한산도에 닿습니다. 선착장에서 솔숲 바닷길을 잠시 걸으면 제승당, 운주당 터에 다시 세운 집과 그 망루입니다.
끼니로는 충무김밥입니다. 통영의 옛 이름 충무를 단 김밥, 쉬지 말라고 밥과 반찬을 따로 담아 낸 뱃사람의 도시락이 명물이 되었습니다. 갓 구운 꿀빵 한 봉지와 겨울 굴이 그 뒤를 잇습니다.
미륵도의 양지 언덕에는 박경리가 잠들어 있습니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만년의 시집 제목 같은 자리입니다. 그리고 바닷가 음악당 곁,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또 한 사람이 누워 있습니다. 윤이상입니다. 그가 자란 도천동에는 기념관과 작은 공원이 들어서 생가 터를 지킵니다. 젊어 떠난 그는 분단의 시대에 휘말려 끝내 살아서는 고향에 돌아오지 못했고, 베를린에서 눈을 감은 지 스물세 해 만인 2018년에야 유해로 돌아와 이 자리에 묻혔습니다. 묘비에는 처염상정(處染常淨), 진흙에 살아도 늘 맑다는 연꽃의 말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 앞에 서면, 돌아간다는 일이 누군가에게는 평생의 숙제라는 것을 새삼 생각하게 됩니다. 고향을 떠나 본 이들에게는 긴 설명이 필요 없는 이야기일 테지요. 살아서 돌아간 사람과 유해로 돌아간 사람과 끝내 돌아가지 못한 사람을, 흩어져 산 공동체들은 다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그의 음악은 사람보다 먼저 고향에 돌아와, 해마다 봄이면 이 항구의 음악제에서 울립니다. 케이팝과 케이드라마가 길을 닦기 반세기 전, 한국의 소리를 세계 무대에 먼저 올린 이름이 윤이상이었으니, 한류의 족보에는 이 항구의 페이지가 따로 있습니다. 알마티의 고려극장이 아흔 해 넘게 무대를 지켜 온 것처럼, 예술은 돌아가지 못하는 이들의 또 다른 귀향인지도 모릅니다.
통영은 약속을 지킨 도시입니다. 무기를 씻겠다던 관청의 이름을, 사백 년에 걸쳐 칼 대신 붓과 활과 끌과 악기를 드는 것으로 지켰습니다. 무기와 갑옵을 씻어 낸 자리에 문화와 예술이 스며들었습니다. 칼이 녹슬도록 두는 것이 아니라, 칼 쥐던 손에 다른 연장을 드는 방식의 평화였습니다. 통영이라는 이름의 군영은 지도에서 지워졌지만, 통영이라는 이름이 붙은 솜씨와 가락은 지금도 물건과 무대마다 살아 있습니다. 여러분이 세병관 마루에 앉는 날, 그 너른 마루가 무엇을 씻은 자리인지 바닷바람이 먼저 일러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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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 메모
• 가는 길: 서울남부터미널에서 고속버스로 네 시간 남짓, 터미널에서 강구안 항구까지 시내버스.
• 하루 동선: 세병관·통제영 12공방 → 충렬사 → 항구 건너 동피랑 → 여객선터미널에서 한산도 제승당 (뱃길 반 시간, 솔숲길 십오 분) → 미륵산 케이블카 → 통영국제음악당(윤이상 묘소) ·박경리기념관.
• 철과 시간: 케이블카는 맑은 날을 고르시고, 한산도는 막배 시간을 먼저 확인하시기를. 봄의 통영국제음악제가 윤이상의 달입니다.
• 맛과 쉼: 서호시장 시락국으로 아침을, 충무김밥과 꿀빵으로 길참을.
• 알아 둘 것: 세병관 마루는 신을 벗고 오릅니다. 케이블카는 바람이 세면 운행을 멈추니 일정에 여유를 두시기를.
알아 두면 좋은 말들
• 통제영(統制營): 경상·전라·충청 삼도 수군을 거느리던 조선 수군 총사령부.
• 학익진(鶴翼陣): 학이 날개를 편 모양으로 적을 에워싸는 진법.
• 물목: 물길이 좁아지는 길목. 바다의 고갯마루.
• 수루(戍樓): 적을 살피려 세운 망루.
• 한려수도(閑麗水道): 한산도에서 여수에 이르는 물길. 두 땅의 이름을 한 자씩 땄습니다.
• 장계(狀啓): 지방의 신하가 임금께 올리던 보고 문서.
• 객사(客舍): 임금의 상징을 모시고 사신을 맞던 고을의 으뜸 관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