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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5장 · 아버지의 자리, 아들의 도시 (수원 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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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5장 · 아버지의 자리, 아들의 도시 (수원 화성)
      제5장 · 아버지의 자리, 아들의 도시 (수원 화성)
      29.08.2026
      도시를 세우는 이유는 여러 가지입니다. 지키려고 세우고, 다스리려고 세우고, 장사하려고 세웁니다. 그런데 그리움으로 세운 도시는 드뭅니다. 서울에서 남쪽으로 한 시간, 수원이 바로 그런 곳입니다. 앞 장의 서울이 글자로 세운 도시였다면, 이번에 걸을 수원 화성(華城)은 한 아들의 마음이 돌과 물과 길로 번역된 도시입니다. 조선이 처음부터 끝까지 계획해서 세운 보기 드문 계획도시이기도 합니다.

      따지고 보면 알마티도 계획에서 태어난 도시입니다. 베르니 요새에서 시작해 바둑판처럼 길을 낸 그 내력을 아는 분이라면, 임금의 설계도에서 태어난 수원이 낯설지만은 않으실 것입니다. 게다가 이 성곽은 박물관이 아니라 지금도 도심을 감싸 안은 채, 그 안에 시장이 서고 사람이 사는 살아 있는 울타리입니다.

      뒤주의 기억, 꽃산의 길지
      이야기는 한 임금의 어린 날에서 시작합니다. 1762년 여름, 영조는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었고, 세자는 여드레 만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때 열한 살이던 세손이 훗날의 정조입니다. 1776년 왕위에 오른 그가 즉위한 바로 그날, 빈전(殯殿) 문밖에서 대신들을 만나 처음 꺼낸 말이 『정조실록』 첫머리에 남아 있습니다.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이 한마디의 무게를 헤아리려면 한 가지를 더 알아야 합니다. 할아버지 영조는 세손을 큰아버지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시켜, 죄인의 아들이라는 굴레를 법적으로 끊어 낸 뒤에야 왕위에 올렸습니다. 그러니 즉위 첫날의 저 선언은, 법이 끊어 둔 핏줄을 마음으로 다시 잇겠다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즉위 13년째인 1789년 가을, 사도세자의 매부 박명원이 상소를 올립니다. 배봉산 묘소가 좁고 초라하니 옮겨 모시자는 청이었고, 정조는 기다렸다는 듯 받아들여 아버지의 묘를 수원 화산(花山)으로 옮깁니다. 화산은 이름난 땅이었습니다. 130여년 전 효종의 능 자리를 논할 때, 풍수에 밝았던 윤선도가 으뜸으로 꼽았으나 끝내 쓰이지 못한 곳입니다. 정조는 그 미뤄졌던 길지를 아버지께 드렸고, 새 묘역에 현륭원(顯隆園)이라는 이름을 올렸습니다. 드러내고 높인다는 두 글자에, 감추어졌던 아버지를 다시 세상에 세우려는 마음이 그대로 적혔습니다.

      여기서 옛사람들의 이치 하나를 짚고 가야 합니다. 산 사람의 집터를 보는 양택과 달리, 무덤 자리를 보는 풍수를 음택이라 합니다. 그 바탕에는 동기감응, 곧 같은 기운은 서로 울린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조상의 유골이 좋은 땅의 기운을 받으면 그 울림이 핏줄을 타고 후손에게 닿는다는 생각입니다. 오늘의 눈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논리이지만, 이 믿음은 조선 사회를 실제로 움직였습니다. 조선 후기 고을 송사의 큰 몫이 묏자리 다툼, 곧 산송이었다는 사실이 그 힘을 보여 줍니다. 정조의 천장에도 효심과 풍수와 정치가 한 몸으로 얽혀 있었습니다. 비명에 간 아버지를 가장 좋은 자리에 모시는 일은, 아들의 도리이자 임금의 정당성을 다시 세우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다만 화산 기슭에는 이미 수원의 관아와 민가가 들어서 있었습니다. 묘를 모시려면 고을 하나가 통째로 옮겨야 했습니다. 정조는 집 보상과 이사 비용을 후하게 쳐 주어 주민들을 북쪽 팔달산 아래 새 터로 옮겼고, 그 새 고을이 오늘의 수원 시가지가 되었습니다. 무덤 하나가 도시 하나를 낳은 셈입니다.

      옮겨 모신 뒤의 정성도 한결같았습니다. 정조는 묘역 둘레에 소나무를 심고 가꾸는 일을 챙겼는데, 솔잎을 갉아 먹는 송충이를 보고 임금이 직접 깨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올 만큼 그 마음은 백성들 사이에서도 회자되었습니다. 참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 아버지의 산이 마지막으로 보이는 고개에서는 어가가 번번이 더디어졌습니다. 사람들은 그 고개를 더딜 지(遲) 자 두 개를 나란히 하여 지지대(遲遲臺)라 불렀고, 그 이름은 지금도 수원 북쪽 고개에 남아 있습니다. 그리움에도 지명이 생긴 셈입니다.

      10년의 예정, 3년 만에 완성
      새 고을에는 새 성이 필요했습니다. 1794년 정월에 첫 돌을 놓은 화성 공사는 당초 십 년을 내다보았으나, 세 해가 채 되기 전인 1796년 가을에 끝났습니다. 비결은 채찍이 아니라 설계였습니다.

      공사는 일흔을 넘긴 노재상 채제공이 총괄로서 지휘하고, 서른 살을 갓 넘긴 정약용이 설계로 맡았습니다.. 정약용은 왕명으로 성 쌓는 법을 연구해 「성설」을 지어 올렸고, 짐을 나르는 수레 유형거도 고안했습니다. 정조가 내려 준 서양 기술서 『기기도설』을 읽고 그는 거중기를 만들어 냈습니다. 도르래 여럿을 엮어 작은 힘으로 무거운 돌을 들어 올리는 기계입니다. 훗날 정약용은 스스로 쓴 묘지명에, 임금이 “거중기 덕에 돈 사만 냥을 아꼈다”고 말했다고 적었습니다. 돌은 가까운 숙지산 자락에서 떠 오고, 성벽에는 돌과 함께 구운 벽돌을 올렸습니다. 박지원과 박제가가 청나라에 다녀와 벽돌과 수레를 쓰자고 외치던 시절이었으니, 책 속의 주장이 처음으로 성에 제대로 적용된 셈입니다.

      사람을 쓰는 법도 달랐습니다. 백성을 부역으로 끌어내는 대신 품삯을 주고 일꾼을 모았고, 공사가 끝난 뒤 펴낸 『화성성역의궤』에는 일한 사람들의 이름과 일한 날수와 받은 삯까지 낱낱이 적혔습니다. 벽돌 몇 장, 못 몇 근까지 셈해 활자로 찍어 낸 이 책 덕분에, 전쟁으로 허물어졌던 성곽을 후대가 설계도대로 되살릴 수 있었습니다. 1997년 화성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된 데에는 이 기록의 힘이 컸습니다. 의궤는 2007년 세계기록유산에도 따로 올랐으니, 성과 그 성의 장부가 나란히 세계의 목록에 든 드문 짝입니다.

      공사 중에 흉년이 들자 정조는 일을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놀고 있는 공사 자금으로 만석거라는 저수지를 파고 둔전을 일구어, 일꾼들이 굶지 않고 들이 마르지 않게 했습니다. 그 들에서 거둔 곡식은 뒷날 성을 지키고 손보는 비용이 되었으니, 성은 사람을 지키는 울타리이면서 사람을 먹이는 살림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북문이 정문인 까닭
      화성에 가시면 한 가지 의아한 점을 만납니다. 보통 성의 정문은 남문인데, 화성의 정문은 북쪽의 장안문입니다. 까닭은 단순합니다. 임금이 북쪽, 서울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서울 숭례문에 견주어도 밀리지 않는 이 큰 문은, 말하자면 아버지를 뵈러 오는 아들을 맞이하는 문이었습니다. 이름에도 결이 있습니다. 북문은 오래 평안하라는 장안문(長安門), 남문은 사방으로 통하라는 팔달문(八達門), 지키는 성이면서 열린 도시이고자 했던 두 마음이 남북의 문 이름에 나뉘어 걸렸습니다.

      정조는 이 곳을 자주 찾았습니다. 1795년에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여드레에 걸친 큰 행차에 나섰습니다. 그해는 혜경궁과, 뒤주에서 세상을 뜬 사도세자가 나란히 회갑을 맞는 해였습니다. 한강에는 배 수십 척을 잇대어 배다리를 놓았고, 이 또한 정약용의 설계였습니다. 육천에 가까운 사람과 말 천여 필이 강을 건넜습니다. 그 행렬은 『원행을묘정리의궤』의 그림으로 고스란히 남아 오늘 우리가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행렬이 닿은 곳은 화성행궁, 평소에는 고을 관아로 쓰이다 임금이 오면 궁이 되는 집입니다. 그 봉수당 마당에 혜경궁의 회갑상이 차려졌습니다. 잔치는 어머니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화성의 노인들을 불러 양로연을 베풀고, 행궁 정문 신풍루 앞에서는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었으며, 특별 과거를 열어 이 고장의 선비들을 뽑았으니, 한 집안의 회갑이 한 도시의 잔치가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회갑을 아버지의 묘 곁에서 치른 이 행차는, 화성이라는 도시의 쓰임을 한눈에 드러냅니다.

      이름 또한 허투루 짓지 않았습니다. 『정조실록』에는 정조가 새 고을의 이름을 화성이라 정하며 현륭원이 자리한 화산(花山)의 화(花)와 화성의 화(華)가 서로 통한다고 밝힌 대목이 보입니다. 꽃산 아래 빛나는 성. 정조는 이 성을 군사 요새로만 두지 않고 상인을 모으고 농지를 넓혀, 새 정치를 펼칠 자신의 도시로 키우고자 했습니다. 아들이 장성하면 왕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화성에 물러나 머물려 했다고 보는 연구자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1800년 여름 정조가 마흔아홉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그 구상은 시간 속에 멈추어 섰습니다. 그는 죽어서야 이 도시 곁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융릉과 나란한 건릉에 묻혔습니다. 살아서 못 머문 땅에 누워서 머물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곁에 눕는 일이, 그가 받은 마지막 효의 형식이었습니다. 화성은 그래서 완성된 성이면서, 끝내 다 실현되지 못한 계획이기도 합니다. 덧붙이면 정조는 오늘 한국 드라마가 가장 사랑하는 임금이기도 합니다. 이미 유명한 드라마 <이산>에서부터 근래 세계의 안방까지 적신 〈옷소매 붉은 끝동〉의 그 임금으로, 화면으로 그를 먼저 만난 한류 팬에게 화성 답사는 주인공의 도시를 걷는 길이 됩니다.



      성벽 위에서 읽는 법
      수원에 가시거든 팔달산 꼭대기 서장대에 먼저 오르시기 바랍니다. 누각에는 정조가 친히 쓴 화성장대(華城將臺) 현판이 걸려 있고, 발아래로는 성벽이 도시를 한 바퀴 감아 도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1795년 행차 때 그는 이 자리에서 밤 군사훈련을 지휘하며 자신이 세운 성의 등불들을 내려다보았습니다. 서울의 성벽이 네 산의 능선을 탔다면, 화성은 산과 들판을 함께 끌어안습니다. 군사의 성이자 백성의 생활 터전이라는 두 얼굴이 그 선에 담겨 있습니다. 내려와 수원천을 따라 걸으면 일곱 칸 무지개 수문 위에 누각을 얹은 화홍문이 나오고, 그 곁 바위 언덕에는 방화수류정이 날아갈 듯 앉아 있습니다. 성 밖 용연 연못에 누각의 그림자가 내려앉는 저녁이면, 적을 살피는 망루에 이만한 아름다움을 들인 성이 또 있을까 싶어집니다. 속을 비워 층층이 쌓아 올린 망루 공심돈도 놓치지 마십시오. 우리나라 성에는 처음 있는 것이라고 정조가 자랑했다고 전하는 시설입니다. 창룡문 안쪽 너른 마당은 병사들을 조련하던 연무대인데, 지금은 활쏘기 체험장이 되어 누구나 시위를 당겨볼 수 있습니다. 가을이면 수원화성문화제가 그 옛 행차를 거리에 그대로 재현하니, 의궤의 그림이 한 해에 한 번씩 살아 움직입니다. 정조 자신이 이름난 명궁이어서, 쉰 발에 마흔아홉을 맞히고 마지막 한 발은 일부러 비워 두었다는 기록이 전합니다. 가득 참을 경계한 임금의 활이었습니다.

      그리고 수원 하면 왕갈비가 유명합니다.. 정조가 화성을 쌓으며 백성의 살림을 일으키려 소 기르기를 장려했고, 그 우시장이 키운 갈비 골목이 오늘의 수원갈비로 이어졌다는 내력이 전합니다.

      사주명리에서 보자면, 운(運)이라는 글자는 본디 ’옮긴다’는 뜻입니다. 타고난 명(命)은 바꿀 수 없어도 운은 흐르고 옮겨 가는 것이라는 게 명리의 오랜 생각입니다. 정조는 아버지의 자리를 옮기고 고을을 옮기고 길을 옮겨, 나라의 운까지 옮겨 보려 했던 임금이었습니다. 절기가 하늘의 운행이라면 운은 사람살이의 운행이라, 그 운이 1800년에 멈춘 자리에서 옮긴다는 일의 무게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자리를 옮긴다는 일의 무게라면, 연해주에 조상의 묘를 두고 떠나 낯선 초원에 새 묘역을 일구어야 했던 고려인들만큼 깊이 아는 이들도 드물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저는 늘 마음에 둡니다. 아버지의 자리 하나를 옮기는 데 나라의 정성을 다한 임금의 이야기가, 고향의 산소를 멀리 두고 사는 독자에게는 남의 이야기로만 읽히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초원의 묘비에 한글과 키릴 글자가 나란히 새겨진 사연을, 화성의 성벽은 알아들으리라 믿습니다.

      서울이 다섯 글자로 세운 도시라면, 수원은 효(孝) 한 글자가 평면도가 된 도시입니다. 그리고 화성은 두 번 지어진 성입니다. 한 번은 돌로, 한 번은 기록으로. 돌은 전쟁에 무너졌지만 기록이 남아 성을 다시 세웠습니다. 그리움이 성을 쌓게 했고, 기록이 성을 살려 냈으니, 돌보다 오래가는 것이 무엇인지 화성의 성벽은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장안문 앞에 서는 날, 그 돌들이 먼저 말을 걸어올 것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알아 두면 좋은 말들
      • 음택(陰宅)·양택(陽宅): 무덤 자리와 집터. 풍수가 땅을 보는 두 갈래.
      • 동기감응(同氣感應): 같은 기운은 서로 울린다는 옛 믿음. 음택 풍수의 바탕.
      • 천장(遷葬): 무덤을 옮겨 모시는 일.
      • 의궤(儀軌): 나라의 큰 행사를 글과 그림으로 남긴 기록책.
      • 행궁(行宮): 임금이 도성 밖에 나들이할 때 머물던 궁.
      • 길지(吉地): 풍수에서 좋다고 꼽는 땅.
      • 어가(御駕): 임금이 타는 수레, 또는 임금의 행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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