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례로 기자들은 다른 기자들이 이미 여러번 취재한 주인공에 대해 쓰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70 - 80년대에 <레닌기치>신문사에서 부장으로 일하면서 나는 이 여성에 대한 기사를 여러번 읽었다. 그 때부터 언젠가는 이 여성에 대해 직접 글을 쓰려는 생각이 머리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그것은 그 분이 위훈을 떨쳤거나 특별한 공로를 세워서 그런 것이 아니다. 수십년을 살아오는 정든 고장의 일에 가슴아파하고 동향인들을 마음껏 돕는 것은 그 여성의 생활의 철칙으로 되여 있다. 우리의 주인공은 까라딸 구역뿐만 아니라 그 경외에도 널리 알려져 있는 인 왈렌찌나 와씰리예브나이다. 마침 기회가 생겨 우리는 광주 월곡동에서 온 역사탐방단과 한 버스를 타고 우슈토베로 떠났다…
한국에서 오는 대표단이 강제이주 시기 고려인의 첫 정착지인 우슈토베를 가게 되면 꼭 왈렌찌나 와실리예브나를 만난다. 뿐만 아니라 알마티에 상주하면서 살고 있는 한국인들도 인 왈렌찌나 와씰리예브나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이번 탐방단의 우슈토베 방문도 예외가 아니였다. 버스에서 내리자 마자 맵짠 바람이 온 몸에 스며드는것 같았다. 왈렌찌나 와씰리예브나는 약속한대로 우슈토베 역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역사탐방단과 배행하는 김병학 선생 ( 광주 월곡 고려인 문화원 원장 )과 <골든 투어>관광사 진재정 사장도 우리의 주인공을 잘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진재정 사장은 관광단원들을 이곳으로 안내하니 인 왈랜지나 와씰리예브나와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우리 일행은 우선 고려인 박물관을 돌아보기로 했다. 가는 도중에 인 왈렌찌나 와씰리예브나는 지금까지 버스를 타고 오면서 고려인들에 대해 이야기 하던 김병학 선생의 계주봉을 받아 쥐였듯이 우슈토베에 사는 증인으로서 고려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다음 탐방단은 바스토베로 향하고 우리는 왈렌찌나 와씰리예브나의 간청에 따라 그의 댁에 가서 점심식사를 하고 생활의 스토리를 들었다…
인 왈렌찌나는 딸듸꾸르간주 (현재 알마티 주) 쩨껠리 시에서 1944년에 태여났다. 그의 아버지 인성덕은 역사교사였다. 그가 원동사범대학 4학년에서 공부할 때 강제이주의 파도에 휩쓸려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되었다. 처음에 가정은 광부도시 쩨껠리에 배치되여 아버지는 그 곳 소학반 교사로 일했다. 얼마후에 가족들은 아버지의 부모형제들이 사는 까라딸 구역 알가 촌으로 자리를 옮겼다. 왈렌찌나의 아버지는 이 곳에서 몇년동안 경리 브리가지르로 일했다. 다음 그를 뗄만 촌 7년제 학교 소학반 교사로 파견하였다. 왈렌찌나는 1학년부터 4학년까지 아버지가 일하는 학교에서 공부했다.
-나는 아버지처럼 교사가 되려고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내게 5점을 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한번은 내가 울면서 어머니에게 말했어요 < 내가 오서도 하나도 없이 다른 아이들보다 대답을 제일 잘 했는데 아버지가 왜 5점을 매기지 않고 4점만 매긴단 말이요…> 그 때 어머니가 말하기를 <얘야, 좀 생각해봐. 네가 최우등생이 되면 선생의 딸이니 최우등생으로 만들었다고 사람들이 말할 수 있단 말이야…- 왈렌찌나 와씰리예브나가 이야기 한다.
딸듸꾸르간에서 중학을 필한 왈렌찌나는 똠스크 국립사범대학에 입학하여 1965년에 좋은 성적으로 졸업했다. 대학을 필한 후에 그는 똠쓰크주 싀랴놉스크구역 체르다트쓰크 중학교에 파견되어 2년동안 거기에서 일했다. 이 학교에서 일하는 과정에 왈렌찌나의 조직자적 기능이 완전히 발휘되었다 – 교원들 사이에서 정치크루쇼크를 진행하고 학생들과 교사들의 소인예술단도 조직하였다. 예술단은 구역콩쿨에서 여러번 우승자리를 차지했다.
왈렌찌나는 2년후에 가정사정으로 부모들이 이주한 우슈토베 시 (딸듸끄르간 주 까라딸 구역)로 돌아오게 되었다. 1967년 8월부터 엠.고리끼명칭 중학교에서 교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왈렌찌나의 열의와 조직자적 능력을 주시하고 있던 구역공청동맹 위원회는 1968년에 그를 구역공청동맹 위원회 제 2비서로, 다음 1970년에는 제 1비서로 임명하었다. 그가 공청동맹 위원회에서 사업하는 기간에 공청동맹 대회와 공청동맹 지도지 전국세미나 대표로, 공화국 및 주 공청동맹 대회 대표로도 파견되었다. 왈렌찌나는 카자흐공화국 최고소베트 상임위원회 영예표창장으로, 전연맹레닌공청동맹 중앙위원회와 카자흐스탄레닌공청동맹 영예표창장, 전연맹레닌공창동맹 명예휘장을 받았다. 그는 1973년에 알마아타 고급당학교로 파견되어 1975년에 최우등 성적으로 당학교를 필했다.
당학교를 필한 인 왈렌찌나 와씰리예브나는 까라딸구역당위원회 선전 및 선동부 부장으로 임명되었다. 다음 구역당위원회 사상문제담당 비서로, 구역대의원소베트 부회장으로, 까라딸 구역 부군수로 선거되었다. 인 왈렌찌나 와씰리예브나는 2001년에 은퇴하였다.
-그것도 내가 자청해서 은퇴한 것입니다. 젊은이들에게 길을 내 주어야지요, 끝까지 자리를 차지하고 버틸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내가 제 자랑을 하는것 같지만 제가 은퇴하는 날에 32개의 꽃바구니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많은 꽃바구니를 받은 은퇴자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 왈렌찌나 와씰리예브나는 사회사업에도 열심히 참가하였다. 1991년에 딸듸꼬르간 주 고려인 문화센터 회장으로, 1994년에는 카자흐스탄민족회 회원으로 사업하였다. 그에게는 표창도 수다하다 - <로동영용>메달, <원로>메달, <카자흐스탄독립 10주년 기념메달>, <카자흐스탄민족회 20주년>메달.
인 왈렌찌나 와씰리예브나는 실지에 있어 카자흐스탄과 한국간 가교역할을 하고 있다. 때문에 한국 표창도 있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는 한국에서 오는 손님들에게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의 쓰라린 사연, 카자흐인들의 너그러운 심정에 대해 이야기해 주고 있다.
-물론 아버지에게서 들은 이야기이지요, 그것도 세월이 많이 흐른 뒤에라야 공개할 수 있게 되였거던요…보통 카자흐인들은 두 칸으로 된 집에 살면서 한 칸은 부모들이 차지하고 다른 칸에서는 가정을 이룬 자식들이 살았는데 1937년 겨울 고려인들에게 한 칸을 내 주고 카자흐인 가족들이 다 좁은 한 칸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이런 공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 왈렌찌나 와씰리예브나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었다.
안정을 모르는 왈렌찌나 와씰리예브나는 은퇴한 후에도 가만히 앉아있는 성격이 아니다. 2002년에 그는 비정부기관 <까라딸구역 여성지원 센터>를 조성하였다. 여성들과 청소년들 사이에서 강압을 반대하는 큰 선전 및 해석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각이한 세미나, 트레닝, <원탁모임>, 검찰소 일군들과 법보호 기관 직원들과 모임을 조직하며 도시와 농촌에 아이들을 위한 마당클럽, 장애자-아이들을 위한 소생실, 여성리더 학교, 독신노인들을 돕기 위한 센터를 조성하고 있다.
인 왈렌찌나 와씰리예브나는 한동안 (2004-2008) 알마티에 초대되어 카자흐스탄고려인협회 책임비서로 일했다.
왈렌찌나 와씰리예브나의 남편 장 미론 니꼴라예비치는 광산인지니어의 직업을 전공하였으나 그동안 인지니어외에 생태연구자, 경제사,어로감독원 등 여러가지 일을 하게 되었다. 지금은 은퇴중이다. 부부는 두 딸을 자래웠는데 맏딸 옐레나는 아스타나에서 살면서 …회사 사장으로, 둘째 딸 따찌야나는 알마티에 있는 …회사 메니저이다. 다 가정을 이루고 있는데 사위들은 카자흐인이다. 왈렌찌나 와씰리예브나에게는 귀여운 손녀 셋과 손자 하나가 있다.
인 왈렌찌나 와씰리예브나는 맡은 사업에 충실하고 항상 책임성있게 대해야 하며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정직해야 하며 절박한 문제를 제때에 해결해야 한다는 원칙을 일생을 두고 지켜왔다. 바로 이 품성으로 하여 동료들과 주민들의 위신과 존경을 받고 있는 것이다.
2011년에 구역 마슬리하트의 결정에 의해 인 왈렌찌나 와씰리예브나에게 <까라딸 구역 명예공민>칭호가 수여되었다.
남경자
알마티-우슈토베-알마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