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자흐 칸국 시대의 무역은 어떻게 발전했는가··· 범아시아 무역의 중개자 역할을 한 카자흐 유목민
18세기 카자흐 영토는 단순히 광활한 초원에 머무르지 않았다. 이곳은 동서양을 잇는 거대한 대륙 무역의 혈맥이요, 북쪽에서는 러시아 제국, 동쪽에서는 청나라의 지정학적 야망과 유목민의 경제적 실리가 맞부딪히던 뜨거운 교역의 최전선이었다. 카자흐 역사·민족학 연구소의 굴미라 오른바예바 역사학 박사의 해설을 통해 당시 카자흐 칸국(Kazakh Khanate)과 러시아 제국 간에 얽힌 흥미로운 무역의 역사를 되짚어본다.
과거 수세기에 걸쳐 카자흐스탄 영토는 대륙을 관통하는 ‘범아시아 무역로’의 중심지였다. 자연스럽게 이 국경 지대들은 활발한 국제 무역과 경제적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거점으로 성장했다. 굴미라 오른바예바 박사는 당시 초원의 역동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전통적으로 유목 생활을 하던 카자흐인들은 주변 민족들과 상호 이익을 위한 물물교환에 적극적이었습니다. 이들은 초원 지대를 통과하는 대상(隊商·Caravan; 낙타나 말 등에 짐을 싣고 여러 지역들을 돌아다니며 특산물을 사고팔던 상인 집단)에게 화물 운송과 경호 등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중개자 역할도 수행했죠. 18세기 카자흐 초원은 카자흐를 비롯한 여러 중앙아시아 민족들과 러시아, 준가르, 청나라 등 주변 여러 세력의 특산물이 한데 모여드는 거대한 시장이었습니다.”
당시 카자흐인들이 러시아와 교역하던 주요 거점은 오렌부르크, 트로이츠크, 페트로파블롭스크, 옴스크, 세미팔라틴스크, 우스트카메노고르스크 같은 접경 도시들이었다. 이 국경 도시들을 중심으로 양측의 이해관계가 본격적으로 맞물리기 시작했다.
행정 지배보다 빨랐던 러시아의 ‘대(對)카자흐 무역 식민화’
당시 러시아 제국의 영토 확장 정책은 군사적·행정적 점령보다 ‘경제를 통한 침투’를 우선순위에 두었다. 오른바예바 박사는 이를 ‘무역 상의 식민화’라고 규정한다.
“러시아 시장 또한 카자흐인들에게 있어 매력적인 선택지였습니다. 즉, 양측 모두 무역 확대를 원했던 것이죠. 18세기 러시아의 산업 발전과 중상주의 정책은 상인들의 영리활동을 부추겼고, 당시 신생 제국이었던 러시아의 경제발전 필요성은 영토 확장이라는 지정학적 전략과 완벽히 맞물렸습니다. 급성장하던 러시아 내 공장들을 돌리기 위해서는 카자흐 초원의 풍부한 축산물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지요.”
러시아의 궁극적인 목표는 카자흐 초원을 발판 삼아 중앙아시아, 중국, 그리고 ‘꿈의 시장’인 인도로 진출하는 것이었다. 당시 러시아의 표트르 3세 황제가 내린 동방 및 인도와의 무역 장려 칙령(1762년 3월 28일자)에서도 이러한 야망이 고스란히 확인된다.
러시아는 이 거대한 무역로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복속된 초원의 통치자들을 포섭하기 시작했다. 이곳을 거쳐가는 캐러밴(대상)을 약탈로부터 보호하도록 의무를 지우는 대신, 다양한 하사품을 제공하며 이들을 서서히 제국의 영향력 아래 묶어둔 것이다.
카자흐어 ‘사투(Сату)’가 제정러시아 상인들의 유행어 ‘사토프카(Сатовка)’가 되기까지
당시 카자흐인과 러시아 제국 상인 간의 교역은 오늘날의 오렌부르크, 트로이츠크, 페트로파블롭스크, 옴스크, 세메이, 외스케멘 등 국경 지대 요새 도시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 요새들을 중심으로 상인과 주민들 사이에서는 ‘사토프카(Сатовка)’라는 독특한 어휘가 널리 쓰였다. ‘물물교환’을 뜻하던 이 낱말은 ‘팔다’, ‘유료로 제공하다’라는 의미의 고대 튀르크어 어근 ‘Sat-‘에서 비롯된 카자흐어 단어 ‘사투(Сату)’에 뿌리를 둔 일종의 접경지대 유행어였다. 이는 당시 접경 지역에서 러시아와 카자흐 상인들이 얼마나 치열하고 밀접하게 교류했는지를 여실히 증명한다.
제정러시아는 교역을 더욱 활성화하고자 1774년 당시 국가 최고 외교기관인 외무 콜레기움의 칙령을 통해 카자흐인들에게 관세면제 혜택을 제공하며 이들을 국경 시장으로 유인했다. 카자흐인들이 생산품을 면세로 판매할 수 있게 되면서 국제 무역의 확대는 이들에게 새로운 기회로 다가왔다. 초원 귀족들은 영토를 통과하는 상단으로부터 세금을 징수했고, 일반 축산농가들은 화물 운송이나 경호원으로 고용되어 경제적 이익을 얻었다.
여러 무역 거점 중에서도 특히 카자흐 땅과 가깝던 러시아의 오렌부르크는 카자흐-러시아 및 범아시아 무역의 핵심 중심지로 성장했다. 1753년 우랄강 서쪽 요새 근처에 대규모 무역 광장이 건설되자, 카자흐인들은 이곳을 ‘백색 시장(Ақ базар/Белый базар)’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사방 각 벽의 길이가 43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사각형 벽돌 구조물 안에는 수많은 상점과 창고가 들어섰고, 이른 봄부터 늦은 가을까지 군대의 호위 속에 활발한 거래가 이어졌다.
오른바예바 박사는 당시 오렌부르크 시장의 풍경과 그로 인한 사회적 변화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오렌부르크 시장에서 무역이 진행되는 동안, 장교가 지휘하는 1개 중대 규모의 초소가 질서 유지를 담당했습니다. 이곳에서 카자흐인들은 소, 양, 말, 낙타, 염소 등 대형 가축과 양모, 펠트, 가죽을 판매했고, 러시아 상인들은 면직물과 벨벳 천, 차, 설탕, 사모바르(러시아 전통 주전자), 도자기 식기, 철·구리·나무 제품 등을 가져다 팔았지요. 이 밖에도 중앙아시아 각지의 실크, 카펫, 건과일, 마구 등이 이곳을 통해 제정러시아 전역의 도시로 유통되었고요.
이처럼 제정러시아와 카자흐인 간의 무역 확대는 카자흐 칸국 내에 깊은 사회문화적 변화를 몰고 왔습니다. 접경 지역의 카자흐인들이 러시아 행정처와 상인들이 개설한 정기 시장에 활발히 참여하면서 새로운 문물이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했지요. 이 과정에서 카자흐 유목민들은 곡물 기반의 식문화에 점차 익숙해졌는데, 이 또한 제정러시아 행정부의 철저한 계산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당시 러시아는 곡물 무역을 장려하고자 카자흐 칸국의 귀족들에게 빵을 무상으로 지급하라는 명령까지 내렸는데, 이는 초원의 유목민들을 새로운 식문화에 길들이기 위한 고도의 통치 전략이었던 것이지요.”
천 조각과 말 한 필을 바꾸던 불평등 교역··· 화려한 활황의 그늘
그러나 표면적으로 활기가 넘치던 이들의 시장에는 ‘불평등 교역’이라는 짙은 그늘이 깔려 있기도 했다. 러시아 상인들은 단기간에 막대한 부를 쌓아 올린 반면, 정작 초원의 카자흐인들이 손에 쥐는 몫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카자흐인들은 주로 가축, 육류 제품, 가죽, 양모 등을 시장에 내놓았고, 러시아 상인들은 밀가루 등의 곡물류, 금속 및 섬유 제품, 가공 가죽 등을 가져와 판매했다. 당시 초원지대에는 유통되는 화폐가 거의 없었기에 교역은 주로 물물교환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문제는 가격 기준이 애매하여 그저 계절이나 수요에 따라, 혹은 ‘어린 새끼 양 한 마리’를 기준으로 상품의 가치를 대충 매기는 경우가 빈번했다는 것이다.
정보력과 자본을 쥔 러시아 상인들에게 이 느슨한 물물교환법은 ‘합법적으로 부를 쥐어짜 낼 수 있는 통로’였다. 이를 통해 초창기 러시아 상인들은 순진한 유목민들을 상대로 단기간에 부를 축적했다.
“초창기 양측 간의 무역은 전형적인 ‘식민지 약탈 방식’으로 전개되었습니다. 대부분 극심한 불공정 거래였지요. 예를 들어, 러시아 상인들은 당시 가치가 단 75코페이카(루블의 하위 단위)에 불과한 18미터 길이의 무명천 한 조각을 주고, 카자흐인들에게는 러시아 본토에서 12~15루블에 거래되던 말이나 황소 한 마리를 요구했습니다. 주철 솥 하나와 말 한 마리를 맞바꾸기도 했습니다. 곡물 상인들의 기만행위도 잦았습니다. 나중에 글을 깨친 카자흐 지식인들이 거세게 항의 서한을 보내기 시작한 뒤에야 오렌부르크 당국이 단속에 나섰을 정도입니다. 결과적으로 카자흐 초원에서 착취하듯 들여온 가축은 러시아 산업 자본의 거대한 이윤 원천이 되었습니다.”
중주즈 카자흐인들과 러시아 간의 무역 발전
‘중간주즈(Middle Juz, Орта жүз. 카자흐땅 동부/중부 일대의 부족 연합체)’ 카자흐인들의 입장에서 당시 러시아의 중심 교역지인 오렌부르크까지 왕래하는 데는 지리적 특성상 어려움이 따랐다. 이에 1745년, 제정러시아 측은 이들에게 비교적 거리가 가까운 접경 지역의 오르스크(Орск) 요새에서의 무역을 허용했다.
오른바예바 박사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 카자흐 지배층 중 러시아와의 무역을 가장 적극적으로 주도한 인물은 중간 주즈의 통치자 아블라이(Абылай) 술탄이었다. 그는 러시아 코르키노 요새 사령관에게 현지 주민들과의 교역을 제안하는 서신을 보내는가 하면 시베리아 야미셰브스카야 요새 지도부에는 정기 시장을 열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또한 노보이심스카야, 노보리네이나야 등 군사 국경 요새 영토 전역에 교역소들을 대거 개설하는 데도 앞장섰다.
그의 노력 덕분에 1750년부터 카자흐인들은 모스크바, 카잔, 툴라, 로스토프, 야로슬라블, 보로네시, 쿠르스크, 튜멘 등 러시아 전역에서 상인들이 몰려드는 대규모 교역지인 트로이츠크(현 첼랴빈스크 지역) 무역에도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이어 1759년에는 아블라이 술탄의 주도로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에 동계 무역 체제가 구축되었으며 이곳에서 카자흐인들은 가축과 축산물은 물론 소금까지 활발하게 판매하며 교역의 지평을 넓혀갔다.
범아시아 무역으로 확장되다
아블라이 한은 카자흐인들이 러시아 및 청나라와의 국경에서 무역을 개방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정기 장터를 활성화하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그의 헌신 덕분에 이후 한 세기 동안 초원의 유목민들과 인접 국가들 사이에는 활발한 교역이 이어졌다. 특히 시장 확대를 통해 판로를 확보하고 중앙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하려던 러시아 역시 이 국경 무역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18세기 중반 준가르가 멸망하면서 생긴 상권의 공백은 청나라 상인들이 빠르게 메워나갔다. 중간 주즈 출신의 카자흐 축산농민들은 청나라 국경 도시로 진출해 말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당시 군마 확보가 시급했던 청나라 조정에 몽골이나 동투르키스탄산 말보다 가격이 절반가량 저렴했던 카자흐산 말은 매력적인 상품이었다.
“청나라는 제정러시아와 마찬가지로 무역을 국경 지대에서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도구로 여겼습니다. 카자흐 초원은 청나라의 각종 수공예품과 차(茶)를 내다 팔 수 있는 주요 시장이었죠. 1758년, 아블라이 술탄의 주도로 현재의 우루무치 지역에서 카자흐와 청나라 간의 본격적인 교역이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청나라는 카자흐인들로부터 약 300마리의 말을 구입했는데, 이는 양국 간 정기 무역의 신호탄이었습니다. 초기에는 청나라의 군인과 관료들만 무역에 나설 수 있었고 평민의 참여는 금지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청나라 측이 독단적으로 매매가를 낮게 책정하거나 조악한 물품을 넘겨 카자흐 상인들의 불만을 사기도 했습니다. 결국 아블라이 한이 직접 개입한 후에야 불평등했던 무역 조건이 재조정될 수 있었습니다.”
오른바예바 박사의 설명에 따르면 이 시기 인접 국가 및 민족들과의 교역은 전반적으로 카자흐 사회에 있어 긍정적인 발전 계기가 되었다. 특히 18세기의 국경 무역은 카자흐인들이 직접 시장 경제의 주체로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사회문화적 대전환을 촉진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무역이 활성화되면서 카자흐 백성들의 일상에는 새로운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러시아와 아시아 각지에서 유입된 완제품을 비롯해 직물, 철물, 금속류, 보석류 같은 원자재와 반제품들이 생활 속에 자리 잡았습니다. 접경 지역의 유목 카자흐인들은 러시아의 영향으로 빵과 곡물을 주식으로 소비하기 시작했죠. 이처럼 무역은 국가 간 문화 교류의 통로가 되어주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료를 통해 알 수 있듯, 이 무역은 본질적으로 ‘식민지배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일반 카자흐 유목민들에게 러시아나 청나라 상인과의 거래는 대개 불평등하게 흘러갔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해당 시기 인접국들과의 무역을 통해 범아시아 시장의 한 축으로 자리 잡은 카자흐 칸국의 역사는, 18세기 카자흐 사회가 직면했던 현실과 역내 지정학적 흐름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