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라 (이 글에서 ‘클라브지야’의 애칭처럼 쓰임) 드미뜨리예브나는 며칠전에 하늘나라로 간 남편을 그리워하며 울어서 눈이 퉁퉁 부운 딸을 끌어안아 주면서 말했다: '얘야, 아무리 힘들어도 계속 살아나가야 해…'
'불행은 겹친다'는 말이 있다. 남편을 잃은 자신의 상처도 아직 아물지 않았지만 그는 딸 앞에서 약점을 보일 수 없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버티고 일어서야 한다는 것이 박 클라브지야 드미뜨리예브나 (Пак Клавдия Дмитриевна)의 생활의 철칙으로 되어 있다. 바로 그의 이런 성격이 평탄하지 않은 긴 생을 참답게 살아오는데 힘을 주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클라라는 네살 때 부모와 함께 원동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되었다. 아버지는 소브호즈에서 경리로 일했고 어머니는 집에서 자식들을 돌보았다. 후에 알게된 바에 의하면 역시 강제이주된 어머니의 친척들은 구리예브에서 살고 있었다. 3년이상 친척들을 보지 못한 어머니는 구리예브 시를 다녀오기로 했다. 때는 1941년 여름이였다. 이 때에 이르러 자식들이 이미 넷이었다. 강제이주 올 때에 클라라와 료냐뿐이었는데 그 후에 또 딸애 둘을 낳았다. 어머니가 구리예브로 떠난 후에 위대한 조국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소식을 알게된 어머니는 속히 집으로 돌아오기로 했다. 집으로 돌아오던 중에 억수로 쏟아지는 비에 맞아 폐렴에 걸렸다. 어머니는 끝내 병이 회복되지 못한 채 어린 자식들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아버지는 직장에서 밤낮을 보내다싶이 했으니 어린 동생들에 대한 책임은 일곱살된 클라라가 지게 되었다.
- 그 시기에는 사람들의 동정심이 아주 깊었던것 같아요 – 클라라 드미뜨리예브나가 추억을 더듬으며 말한다 – 이웃에 사는 우즈베크 여인이 낡은 알미늄 냄비를 주면서 식당에 가면 국을 줄 테니 동생들과 같이 나누어 먹어라고 했어요. 아마 식당주인에게 그 아줌마가 부탁했던 것 같아요. 엄마가 없는 반고아들이니 점심때 국이라도 좀 주라고 말입니다. 그날부터 나는 날마다 그 냄비를 들고 식당에 가서 국을 받아왔지요, 국물이 맑았지만 그래도 그 때는 꿀맛같았어요…
얼마후에 외갓 친척들이 식구들을 구리예브로 데려갔다. 아버지와 동생들은 텡기즈 구역의 한 부락에 자리잡고 클라라는 외할머니 집에 남았다. 아버지는 그 부락의 어로꼴호스에서 전공에 따라 계속 경리로 일했다.
- 할머니는 강제이주 시기에 체포된 남편의 소식을 끝내 듣지 못했습니다. 할아버지가 누구였는지 우리도 모릅니다. 아마도 인테리측에 속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당시 똑똑힌 고려인-인테리들을 무조건 체포했기 때문에 말입니다. 할머니는 생의 마지막 날까지 할아버지를 기다리다가 세상을 등졌지요…전쟁시기의 생활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상상하시겠지요, 우랄 강이 우리를 구원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년간에는 우랄 강에 물고기가 들끓듯했거든요. 그러니 물고기가 우리를 먹여살렸습니다 – 클라라 드미뜨리예브나가 이야기 한다.
19세에 교원의 졸업증서를 받은 클라라는 러시아어와 문학 교사로 구리예브주 노워보가찐쓰끼구역 마가스 부락에 파견되었다. 이 부락은 아주 궁벽한 지역이었다. 집이라고는 볼 수 없었고 주민들은 반토굴 비슷한 집에서 살았는데 젊은 교사는 그런 집에서 사는 카자흐인 가정에 배치를 받았다.
-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드릴까요? 하루는 밤중에 무엇이 풍덩 떨어지는 요란한 소리에 모두 다 깨어났어요. 불을 켜고 보니 낙타가 지붕을 뚫고 방 바닥에 떨어진 것이지요. 우리들 보다 낙타가 더 놀란것 같아요. 지붕이라고는 짚과 잔도 기지로 덮은 것이니 사슴을 이겨낼 수 있었겠습니까? 낙타가 가다가 지붕을 디디고 떨어졌지요. 식구들이 다 양편 벽쪽에 누워있었으니 낙타가 방 복판에 떨어져서 다행이었습니다 – 클라라 드미뜨리예브나가 웃으면서 이야기 한다.
클라라 드미뜨리예브나가 학교에서 근무하는 기간에 교사와 학생들, 학부모들의 사이에는 서로 신뢰하는 관계가 맺어졌다. 우선 교과서가 부족했고 어려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부모들도 클라라를 ‘ 크싐’ (아가씨)이라고 정답게 부르면서 힘이 자라는대로 젊은 교사를 도와주려고 애썼다. 클라라 역시 카자흐민족의 모든 풍습을 지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이 러시아 말을 모르고 클라라가 카자흐 말을 몰랐지만 서로 배워가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가 맡은 9학년 반에서 미래의 유명한 카자흐 여류시인 파리사 온가르싀노바가 공부했다. 곱고 영리하고 우정이 깊은 여아이였다. 파리사는 학업에서 뒤떨어진 아이들을 열심히 도움으로서 교사의 짐을 어느 정도 덜어주었다고 말할 수 있다.
- 우리는 헤여진 후에도 오래동안 연계를 끊지 않았습니다. 나의 서가에는 다른 고전작가들의 책과 함께 러시어어로 번역된 파리사 온가르싀노바의 시집도 꽂혀있습니다. 시집의 앞장에 다음과 같이 씌여있습니다: “사랑하는 클라라 드미뜨리예브나에게! 당신 앞에 깊이 고개를 숙입니다. 우리를 지식의 세계로 이끌어 준 당신께 감사합니다! 1984년, 7월. 알마아타 시.” - 클라라 드미뜨리예브나가 말했다.
구리예브 시로 이주하여 온 후에 클라라 드미뜨리예브나는 직업을 바꾸기로 했다. 구리예브 농업전문학교 법과를 필하고 법률가-상담원으로 오래동안 일했다. 클라라가 러시아인 총각과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친척들이 <마우제>와 결혼하냐고 농담했지만 모두가 다 사위를 사랑했다. 농촌에 사는 시부모들은 고려인 처녀와 가정을 이루고 사는 아들네 집으로 우선 고려인들의 주식인 쌀 그리고 야채, 우유제품을 때때로 보내왔다.
자식 둘을 둔 클라라 드미뜨리예브나는 사랑하는 남편의 배려속에서 친척들과 자주 만나면서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그런데 먹장같은 검은 구름이 이미 이 가정의 위에 이미 뜨기 시작하고 있었다. 1990년에 가장이 세상을 떠나고 뒤이어 얼마 지나지 않아 딸애 랴나의 남편이 사망하였고 2003년에는 아들 예브게니가 참사하였다. 가까운 몇년 기간에 가장 귀중한 세 사람을 영원히 보낸 클라라 드미뜨리예브나의 심장이 그 아픔을 어떻게 견디어 냈는지? 상상하기도 어렵다. 이제는 모녀와 모스크바에서 사는 손녀가 남았다. 그리고 친척들이 받들어 준다.
- 그러나 나는 외로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악따우 고려인 협회장 황 라이사 이와노브나가 수년째 자주 찾아오고요 협회는 저에게 <고려일보>와 <오그니 악따우>신문을 구독해 주어서 감사히 받아봅니다. 딸애의 친구들도 때때로 들어옵니다. 그리고 나는 책을 읽기를 가장 좋아하거던요. 명절에는 이웃 아낙네들과 모여앉아 카자흐노래, 러시아 노래도 부르고요. 유감스럽게 한국노래는 모르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어느 민족노래를 부르던지간에 그 노래가 마음속에서 울려나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이미 90고개를 넘어선 박 – 소리나 클라라 드미뜨리예브나는 평탄하지 않은 인생의 길을 걸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행복한 사람으로 간주한다. 그것은 그의 주위에 항상 동정심이 많고 마음이 너그러운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강제이주 이후와 전쟁시기에 음식과 거처를 나누어 준 카자흐인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항상 간직하고 있다.
남경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