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말과 80, 90년대에 타슈켄트에 자리잡은 <레닌기치> (<고려일보>) 기자 주재소가 신문 발간에서 막대한 역할을 하였다. 그 시기에는 <레닌기치>신문이 공화국 간 (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공동신문으로 되어 있었다. 김 블라디미르가 소장직을 맡았던 이 기자주재소에서 리 뱌체슬라브, 김 브루트, 리 블라디미르 기자들과 사진기자 안 빅토르가 우즈베키스탄 전역을 다니면서 우즈베키스탄에 거주하는 고려인들의 생활을 그리는 흥미있는 기사들을 취재하여 신문에 실었다. 그들이 쓴 기사들은 항상 독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주재 기자들은 동시에 문학작품들도 쓰면서 작품집과 시집도 발행하였다. 사진기자 안 빅토르는 후에 이름있는 사진작가가 되었다. 우리는 금년 7월에 80주년을 맞이하는 시인, 작가, 기자 리 뱌체슬라브 보리소비치에게 대해 본 기사에 이야기한다. <레닌기치>신문사가 1978년 가을에 알마아타로 이주한 후 1979년 2월에 주재기자들의 첫 회의를 소집했다. 후에 알게 된 바에 의하면 신문사 창작일군들과 주재기자들의 이런 모임은 일년에 한번 해마다 진행하는 전통으로 되어 있었다. 나 자신은 이런 회의에 처음 참가하였다. 김광현 주필이 회의를 열고 주재소 소장 김 블라디미르의 그동안 기자주재소의 사업보고가 있은 후에 점심식사를 하는 동안에 사업의 분위기가 풀리자 누군가가 <그러면 이제부터는 시간을 자유롭게 보내면서 재능이 있는 분은 제각기 자기 재능을 시위해 봅시다>라고 권했다. 주재기자 한 분이 리 뱌체슬라브께 시 낭독을 부탁하자고 말했다. 뱌체슬라브 기자는 좀 수집어하는 기색이었지만 일어서서 <내가 존대하는 작가 친기스 아이트마토브의 작품에서 몇 구절을 낭독하겠습니다> 라고 말하면서 낭독하기 시작했다. 그가 <붉은 수건을 두른 어린백양>소설에서 몇구절을 읊기 시작하자 모인 사람들의 시선은 즉시 그에게로 돌려졌고 방안은 곁에 앉은 사람의 심장의 고동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조용해 졌다. 그의 표현력이 풍부한 것은 말할 수 없거니와 말마디마다가 가슴속에 깊이 파고 들었다…
나는 그 때 뱌체슬라브가 이미 1959년에 <동방의 삐오녜르>신문 기자로 근무하면서 시를 신문에 투고했다는 것을 몰랐기에 저렇게 작품을 낭독하는 사람이 후에 시인이 되지 않을 수 없다는 확신을 가졌었다.
타슈켄트 기자주재소 기자들과의 첫 상봉이 이렇게 시작되었다. 집으로 돌아간 후에 그들은 좋은 기사들을 계속 써 보냈으며 우리는 그것을 번역하여 신문에 실었다. 번역했다는 것은 그들이 러시아어로 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시기에는 러문판이 아직 없었다.
1989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도에서 발간되는 <평양신문>사가 <레닌기치>신문사 사원들을 초청했다. 신문사 편집위원회의 결정에 의해 당 및 선전선동부 부장이었던 나와 편집국 부국장 한옥자 그리고 주재기자 리 뱌체슬라브가 평양으로 가게 되었다. 부모의 고향땅을 그리던 뱌체슬라브의 기쁨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는 <평양신문>사 선생님들의 안내를 받아 세계명승지인 금강산의 아름다운 곳을 거의 다 돌아보았고 팔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와 목욕을 했다는 팔담에서 떠 올린 물도 마셔 보았다. 평양에서 우리는 그 때 단식후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통일의 꽃이라고 불리우는 임수경과도 만났고 운이 좋아서 마침 주민들을 위해 다시 조직한 세계대학생 및 청년 축전 공연도 구경했다. 군사분계선, 판문점 방문은 우리의 기분을 흐리게 하였다. 특히 부모의 고향이 함경북도인 리 뱌체슬라브 기자는 푸른 하늘을 우르러 보면서 < 새들도 저렇게 자유롭게 드나드는데 왜 사람들은 남북을 드나들지 못하는걸까>하면서 가슴아파 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방문은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놓았다. 귀국한 후에 나와 뱌체슬라브는 기행문을 써서 신문 두 호에 게재했다. 조국의 발전 모습, 아름다운 경치에 감탄하는 것을 보고 뱌체슬라브의 애국심을 느낄 수 있었다…
지난해에 우리는 뜻깊은 주년일 즉 <고려일보> ( <선봉>, <레닌기치> )창간 100주년을 맞이했다. 물론 주재기자들도 다 초대했지만 리 뱌체슬라브 보리소비치는 건강상태로 유감스럽게도 우리와 이 기쁨을 나누지 못했다. 그런데 뱌체슬라브는 동료들을 통해 2016년에 타슈켄트 출판사에서 발행한 그의 시집 <운명의 시선을 맞받아>를 나에게 보냈다. 시집을 읽으면서 먼 40여년전에 뱌체슬라브의 낭송을 들으면서 꼭 시인이 될 것이라고 믿었던 나의 확신이 실현된 것이 기뻤다. 선조들의 땅에 대한 그리움, 쓰라린 강제이주, 그가 태어나서 자란 정든 우즈베키스탄, 동향인들이 시집의 기본 테마로 되어 있다.
…리 뱌체슬라브 보리소비치 ( 리영광 )는 1944년 7월 29일에 우즈베크 소베트 사회주의사회주의공화국 타슈켄트 주 상-치르치크 구역 스웨르들로브 명칭 콜호스에서 태어났다.
중학을 필하고 웨.이. 레닌명칭 모스크바국립사범대학 어문학부에 입학하였다. 대학졸업 후에 우즈베키스탄의 아한가란스크 구역 중학교에서 러시아어와 문학 교사로 일했으며 다음 <동방의 피오니어>신문 기자로 근무하면서 첫 시를 썼다. 1978 - 2004년에 <레닌기치> ( <고려일보> )신문 타슈켄트 주재기자로 일했다. 뱌체슬라브 보리소비치는 시인, 작가, 기자로서 <동방의 별>잡지, 우즈베키스탄, 러시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한국 문학잡지에 시와 단편소설을 실었다. 2000년에 시집 <시대의 꽃잎>을 발행하였다. 1988년에 우즈베키스탄 작가동맹의 단편소설 콩쿨 수상자로 되었다.
탄생 80주년을 축하하면서 리 뱌체슬라브 보리소비치에게 속히 건강을 회복하고 창작사업을 계속할 것을 기원하는 바이다.
남경자
아래에 리 뱌체슬라브 시인의 시 두 편을 소개한다.
개성의 마돈나
개성 부근 끝없는 인삼밭 따라
걷고 있는 젊은 어머니
피곤함의 흔적도 없는 젊은 어머니
그 녀의 포근한 등에 업혀
고히 잠든 귀여운 어린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짐이로다
아침햇살에 아름다운 경치를 안고
개성시를 자신만만하게 걷고 있다
현대의 우미한 마돈나가
시인이여, 그 녀를 찬양하라!
뉴욕도 아니고 파리도 아니다
개성이 또 눈앞에 떠 오른다
긍지와 아쉬움을 안고
이 구절을 어린이와 엄마께 드리노라!
소리
태여나서부터 듣는 가지각각 소리
이루 다 헤아릴수가 없도다
엄마의 자장가 소리, 작곡가의 음악소리…
허나 회상하기조차 싫은 소리도 있나니
마음의 상처를 건드리지 않을래
세상엔 심장을 격동시키는 소리도 많으니
그 소리는 싫증날 수가 없다네 –
끝없이 돌아가는 방직기 소리
새벽녘 바다의 파도소리
천진스러운 아이들의 웃음소리
표현력을 화폭에 쏟아붓는
화가의 붓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