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하늘 아래 - 사주명리 인문학
| 봄 절기 2부무언가 시작했건만, 벌써 지치기 시작합니다.
분명 온몸에 차오른 봄의 기운을 바탕으로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묵은 관계를 다시 열고, 오래 미뤄둔 일을 실행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그때의 기세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약속은 늘어나는데 마음은 흩어지고, 시작은 했는데 방향을 잃은 듯한 기분. 몸은 바쁜데 정신은 멍한 이 묘한 허탈감. 봄이 왔는데 왜 이렇습니까.
봄의 앞 절반 — 입춘·우수·경칩 — 은 깨우는 봄이었습니다. 방향을 세우고, 굳은 것을 녹이고, 문을 여는 봄. 그러나 봄의 뒤 절반은 전혀 다른 일을 요구합니다. 깨어난 것을 어떻게 키워낼 것인가. 시작한 것을 어떻게 지속할 것인가. 춘분·청명·곡우는 그 질문을 품은 절기입니다.
춘분 — 균형잡힌 날에 묻는 가장 중요한 질문
양력 3월 20일경 / 황경 0° / 묘월(卯月)
춘분이 가까워지면 이상하게 마음이 한 번 멈춥니다. 경칩의 기세로 뛰쳐나오던 충동이 잠시 숨을 고릅니다. 대신 이런 질문이 올라옵니다. 나는 지금 어디쯤 와 있는가. 처음 세운 마음에서 너무 멀어진 것은 아닌가.
춘(春)은 봄이고, 분(分)은 나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춘분은 봄을 나누는 때입니다. 태양 황경 0도. 24절기에서 모든 황경의 기준점이 되는 자리입니다. 이날 낮과 밤의 길이가 거의 같아집니다. 음과 양이 팽팽하게 마주 섭니다. 《예기(禮記)》 〈월령(月令)〉은 이때를 "시월야 일야분(是月也 日夜分, 이달에는 낮과 밤이 나뉘어 같아진다)"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 분(分)은 쪼개짐이 아닙니다. 제자리를 찾는 것입니다. 1부에서 살핀 《동의보감》의 발진(發陳)이 무절제한 분출이 아니라 '천지가 함께 생겨나는 조화로운 열림'이 되려면 바로 이 균형이 필요합니다. 목기(木氣)가 왕성한 이때, 위로만 뻗으면 뿌리가 흔들립니다. 그래서 한국의 전통에서는 이 무렵 "이르면 늦추고, 늦으면 서두르라"며 때를 가늠하는 일을 농사의 으뜸으로 삼았습니다.
카자흐스탄의 춘분은 나우르즈(Наурыз)와 겹칩니다. 3월 21일부터 시작되는 이 명절에 사람들은 묵은 것을 정리하고, 화해하고, 이웃과 음식을 나눕니다. 나우르즈 코제(Наурыз көже)를 끓일 때 물·고기·소금·기름·밀·쌀·유제품이라는 일곱 가지 재료를 넣는 것은 단순한 풍성함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것이 하나의 그릇 안에서 어우러지는 것. 그것이 춘분의 균형이고, 나우르즈의 정신입니다.
고려인의 삶도 이 균형 위에 서 있었습니다. 고향의 기억과 새 땅의 현실, 잃어버린 언어와 살아가야 할 언어 사이에서 저울을 맞추는 일. 어느 하나를 완전히 버릴 수도, 어느 하나만 붙잡을 수도 없었습니다. 카자흐스탄 사람으로 살아가면서도, 한식에 산소를 찾고, 된장을 담그고, 국시를 끓이는 손끝에는 다른 시간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소련의 달력 위에 고향의 달력이 겹쳐져 있었던 것입니다. 낮의 시간과 밤의 시간이
마주 서 있듯, 두 시간 사이에서 쓰러지지 않고 서 있는 것. 그것이 고려인의 춘분이었습니다.
오행에서 묘월은 갑목(甲木)과 을목(乙木), 순수 목기로만 이루어진 유일한 달입니다. 기운이 이렇게 한쪽으로 강할 때, 오히려 춘분은 이렇게 물어오는 듯합니다. 지금 뻗어 나가는 그 마음은 정말 나의 중심에서 나온 것입니까. 아니면 주변의 요구에 떠밀려 가는 것입니까.
여러분의 마음은 지금 어느 쪽으로 기울어져 있습니까.
청명 — 흐릿했던 것이 비로소 똑바로 보일 때
양력 4월 5일경 / 황경 15° / 진월(辰月)
청명이 가까워지면 공기의 표정이 달라집니다. 겨울 내내 흐릿했던 하늘이 씻긴 듯 맑아지고, 멀리 있던 산의 윤곽이 또렷해집니다. 마음도 그렇습니다. 복잡하게 엉켜 있던 생각을 정리하고 싶어집니다. 집 안만이 아니라 마음의 창문도 열고 싶어지는 때입니다.
청(淸)은 맑음이며, 명(明)은 밝음입니다. 그러므로 청명은 맑고 밝아지는 절기입니다. 한국의 농가에서는 청명을 기점으로 논밭둑을 손질하고, 가래질을 하며, 못자리를 준비했습니다. 감상이 아니라, 맑아진 하늘 아래 실제 삶의 일을 시작하는 절기입니다.
그런데 이 절기가 한식(寒食)과 같은 날이거나 하루 차이로 겹치는 것은 깊은 뜻이 있습니다.
고려인 여러분에게 한식은 낯선 이름이 아닙니다. '부모의 날(родительский день)'이라 불렀던 그날. 온 가족이 산소를 찾아 조상에게 절하고, 염채(부추나물)·지름구비(찰떡)·깝초네(훈연생선)를 올렸던 그날. 고려인 사이에는 "한식은 아침식사이고, 단오는 점심이며, 추석은 저녁이다"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한식이 맨 앞에 놓인 것은 한 해의 제사 순서에서 한식이 가장 먼저 오기 때문입니다. 고려인에게 한식은 혈연뿐 아니라 지연의 유대를 돈독히 하는 날이었습니다. 멀리서 자손이 찾아오고, 마을의 고려인이 모두 북망산(공동묘지)에 모여 안부를 묻는 날. 산소에서 음식과 술을 나누었고, 지나가는 이웃에게도 내밀었습니다. 한식은 고려인에게 정체성과 동질성을 확인하는 날이었습니다.
한국에서 한식의 의미가 퇴색된 것과 달리, 고려인 사회에서 한식이 살아남은 이유가 있습니다. 소련 시절 다른 민족 명절들은 억압되었지만, 한식은 러시아의 전통 명절인 '조상들의 날'과 성격이 비슷했기 때문에 탄압을 비켜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더 깊은 이유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농사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조상을 찾아가는 것. 씨앗을 뿌리기에 앞서 뿌리를 돌아보는 것. 《대학(大學)》은 이렇게 말합니다.
物有本末 事有終始 知所先後 則近道矣 (물유본말 사유종시 지소선후 즉근도의)
사물에는 근본과 끝이 있고, 일에는 끝과 시작이 있다. 앞과 뒤를 알면 도에 가깝다.
청명의 맑음은 날씨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하늘이 맑아지면 마음도 따라 맑아집니다. 그리고 맑아진 마음은 묻고 싶어집니다. 내가 어디에서 왔는가.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것은 무엇인가. 기억은 나무의 뿌리와 같아서, 눈에 보이지 않지만 지금의 나를 서 있게 합니다.
오행에서 청명은 진월(辰月)의 문턱입니다. 진(辰)의 지장간에는 을목(乙木)·계수(癸水)·무토(戊土)가 깃들어 있습니다. 확산하는 생명(을목)과 적시는 물(계수)을 받아주는 토대(무토). 1부에서 살핀 인월의 무토가 수기(水氣)에서 목기(木氣)로의 거대한 전환 에너지였다면, 진월의 무토는 그 전환된 기운을 실제 현실로 착지시키는 힘입니다.
강제이주 이후 고려인 가족의 기억에는 늘 두 개의 땅이 있었습니다. 몸을 일으켜 살아내야 할 중앙아시아의 땅과, 선조들이 묻혀 있는 연해주의 땅. 그러니 한식의 성묘는 묘 앞에 서는 행위만이 아닙니다. 두 땅 사이에 흩어진 기억을 다시 한 자리에 모으는 일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도 청명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오래 흐릿하게 남겨둔 기억은 무엇이고, 다시 심기 위해 먼저 비워야 할 마음의 자리는 어디입니까.
곡우 — 마침내 뿌리내리는 봄
양력 4월 20일경 / 황경 30° / 진월(辰月) 깊은 자리
곡우가 오면 봄은 더 이상 마음속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비가 내려야 합니다. 그 비를 흙이 기다리고, 뿌리가 기다리고, 잎이 기다립니다. 봄에는 마음을 세우는 것으로 충분했습니다. 곡우는 그 마음에 물을 선물합니다.
곡(穀)은 곡식, 우(雨)는 비입니다. 곡식을 살리는 비. 이 무렵부터 한국의 농가에서는 못자리와 씨앗, 논밭의 물길을 본격적으로 살폈습니다. 봄비가 제때 내려야 곡식이 자랍니다. 곡우는 하늘의 물이 땅의 먹을거리로 바뀌는 절기입니다.
옛사람들은 곡우 무렵 산에 올라 고로쇠나무나 자작나무에서 수액을 받아 마셨습니다. 곡우물이라 불렀습니다. 나무에 물이 오르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경칩이 생명이 깨어나는 절기였다면, 곡우는 그 생명이 실제 몸을 만들어가는 절기입니다.
《논어(論語)》에서 공자(孔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也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야) 날이 차가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마지막까지 시들지 않음을 안다.
겨울을 견딘 나무의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이것은 곡우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시들지 않는 나무는 겨울에 갑자기 강해진 것이 아닙니다. 봄에 뿌리가 충분히 물을 머금었기 때문입니다. 겨울의 강인함은 곡우의 봄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오행에서 곡우는 물과 흙의 협력이 가장 절실한 때입니다. 물은 흙을 적시고, 흙은 물을 붙잡아 씨앗에게 건넵니다. 어느 한쪽만으로는 아무것도 자라지 않습니다.
카자흐스탄의 스텝에도 이즈음 생명의 색이 짙어집니다. 카자흐스탄은 야생 튤립의 중요한 원산지입니다. 건조한 초원 위로 피어나는 튤립은 단순한 꽃이 아닙니다. 때가 오면 생명은 자기 색을 드러낸다는 증거입니다.
크즐오르다(Қызылорда)의 시르다리야(Сырдария)강 유역에서 고려인들이 건조한 스텝에 벼농사를 일군 일이 그것입니다. 물길을 읽고, 흙을 다루고, 오래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밥이 되었습니다. 비를 삶으로 바꾸고, 물을 밥으로 바꾸는 것. 그것이 곡우의 일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도 오랫동안 품어온 씨앗이 있을 것입니다. 그 씨앗에, 지금 비가 닿고 있습니까.
봄은 시작이 아니라, 삶을 가꾸는 책임입니다
춘분은 균형을 물었습니다. 청명은 맑음을 물었습니다. 곡우는 돌봄을 물었습니다.
고려인은 늘 이 질문 속에 있었습니다. 잃어버린 고향과 새로 살아낼 땅 사이에서 마음의 저울을 맞추었고(춘분), 잊어서는 안 될 것을 잊지 않기 위해 해마다 한식 밥상 앞에 둘러앉았으며(청명), 척박한 스텝에 물길을 내어 끝내 그 땅을 논으로 일구었습니다(곡우).
독자 여러분, 지금 당신의 봄은 어디쯤 와 있습니까. 안과 밖이 어긋난 마음의 저울을 다시 맞춰야 할 춘분입니까. 흐려진 기억을 맑게 다시 보아야 할 청명입니까. 아니면 오래 품어온 씨앗에 물을 줄 곡우입니까.
봄은 이미 왔습니다. 이제 남은 일은 그 봄을 당신의 삶 속에서 살아내는 것입니다.
정태철
교육학 박사
'청명(淸明)' 이억영 作 [제공=한국세시풍속사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