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호에 이어 <사회의 흐름을 바꾸고 역사를 움직인 위대한 카자흐 여성> 기획 연재를 이어간다. 앞서 살펴본 카자흐 초대 여성 저널리스트의 발자취에 이어, 이번 호에서는 드넓은 카자흐 대지 위에서 처음으로 여성 해방의 바람을 일으키며 시대의 금기에 도전했던 인물의 삶과 업적을 조명해 본다.
카자흐 사회 속 대표적인 여성 억압 관행으로 꼽히던 매매혼 풍습에 대한 금지법이 제정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카자흐 초대 여성 해방 운동가.
1898년 부케이 칸국(Bukey Horde/Бөкей Ордасы, 1801년부터 1845년까지 서카자흐스탄 지역에 존재했던 카자흐족 자치 칸국 )에서 가난한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난 알마 오라즈바예바는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학업능력을 가진 우등생으로서 장차 교사가 되겠다는 꿈을 키우며 성장했다. 장래희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끈기 있게 학업에 매진한 그녀는 결국 자신의 바람대로 농촌 소재의 학교 교사로 사회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교사로 재직 중이던 1917년 그녀는 제정 러시아의 멸망과 소비에트 연방 탄생의 서막을 올린 ‘2월 혁명’에 대한 소식을 접하면서 정치와 사회 문제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된다. 곧 카자흐 땅에서도 본격적인 소비에트 시대가 도래하자 알마 오라즈바예바는 소련의 볼셰비키당에 가입한 최초의 카자흐 여성이 되어 활발한 사회활동을 시작한다. 특히 카자흐 사회 속에 만연했던 여성들에 대한 하대와 억압을 어린시절부터 직접 마주하며 성장했던 그녀는 여권신장 운동에 열정적으로 임하게 된다.
이 방면에서 알마 오라즈바예바가 달성해 낸 대표적인 업적으로는 1920년 12월 25일 소련 당국에 의해 공식적으로 발표된 매매혼 관행의 폐지를 꼽을 수 있다. 앞서 다룬 나지파 쿨자노바의 생애에서도 언급된 바 있는 이 풍습은 당사자의 의지와는 관계 없이 부모가 독단적으로 혼처를 결정하고 몸값으로 돈을 받는 행위가 여성의 존엄성을 해친다는 비판을 받으며 소련 정부에 의해 금지되었는데, 이러한 처분이 구체적인 법의 형태를 띠며 세상에 나오게 된 데에는 알마 오라즈바예바가 볼셰비키 당원으로서 해당 사안에 대해 적극적으로 낸 목소리가 주효한 역할을 했던 것이다. 본 성과를 기리기 위해 한때 카자흐 사회에서는 매년 돌아오는 1월 4일을 ‘카자흐 여성 해방의 날’로 지정하여 기념하기도 했다. 이 뿐만 아니라 알마 오라즈바예바는 기혼 여성이 과부가 되었을 경우 죽은 남편의 형제나 친척 남성과 재혼하도록 강요하는 수계혼(收繼婚) 풍습에 대한 금지령이 내려지는 데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나아가 알마 오라즈바예바는 젊은 카자흐 여성들이 글을 배우고 남성들과 동일한 수준의 교육을 받음으로써 국가와 사회 건설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지는 데에도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녀는 당시 약자의 위치에 있던 유목민 중심의 가난한 카자흐 백성들, 그 중에서도 특히 여성들이 사회 전반적으로 남성과 동등한 위치에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크라스늬예 유르틔(Красные юрты – 붉은 유르트)’라는 이름의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정부 산하 조직체를 만들어 국내 곳곳의 오지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찾아다니며 교육과 보건의료 지원을 실시하고, 나아가 그들과의 긴밀한 소통을 통해 생활 속의 실질적인 문제점들을 파악하여 정부에 해결책을 건의함으로써 카자흐 사회 속 여성들의 지위 향상을 위한 법적 체계가 마련될 수 있도록 힘썼다.
이처럼 그녀가 펼쳤던 여권신장 운동은 카자흐 사회 속에서 여성들의 진출이 본격화되는 데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일례로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사회보장부 차관을 지냈던 누르자말 사날리예바(Нуржамал Саналиева)는 본인이 어렸을 적 미리 혼처를 정하고 ‘칼름’을 챙긴 부모 때문에 원치 않는 혼인을 앞두고 있던 상황에서 알마 오라즈바예바가 직접 나서서 자신을 구제해 주고, 글을 배워 사회에 진출할 것을 장려하며 학교에 입학시켜 주었던 일화를 밝히면서 “알마 오라즈바예바는 오늘날 내가 참된 인간으로 살 수 있도록 이끌어 준 은인”이라고 감사의 마음을 표한 바 있다.
(다음 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