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의 흐름을 바꾸고 역사를 움직인 위대한 여성’이라는 주제를 품은 이번 호에서는 특별히 카자흐스탄의 역사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긴 위대한 카자흐 여성들의 일생을 간략하게나마 다루어 소개하고자 한다.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질서가 강고했던 시대에 태어났음에도 사회의 갖은 편견과 억압에 굴하지 않고 진취적인 자세로 타고난 재능을 꽃피우며 카자흐 땅 위에서 여권신장과 함께 민족 전체의 발전에 크게 공헌한 대표적인 카자흐 여성 위인들의 생애와 업적을 살펴보자.최초의 카자흐 여성 저널리스트, 나지파 쿨자노바(Нәзипа Құлжанова, 1887~1934).
카자흐 민족 최초의 여성 언론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아바이 쿠난바이울릐, 의브라이 알튼사린 등 카자흐 대문호들의 작품을 처음으로 러시아어 문화권에 소개한 번역가이며 근대 카자흐 사회에 공연예술 문화를 정착시킨 전방위적 여성 사회공헌가.
나지파 쿨자노바는 1887년 7월 27일 카자흐스탄의 북부의 아크몰라 주에 위치한 작은 도시 토르가이(Торғай)에서 태어났다. 카자흐 민족의 대표적인 계몽가이자 교육자였던 의브라이 알튼사린(Ыбырай Алтынсарин, 1841~1889)이 설립한 러시아어 학교를 다니면서 학식을 쌓기 시작한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일찌감치 기자·저널리스트의 기본 덕목인 집중력과 책임감, 근면성에서 남다르게 뛰어난 면모를 보였으며 이미 초등 고학년 시기부터는 선생들을 도와 학우들을 가르칠 정도로 명석함을 나타내 보였다.
나지파 쿨자노바가 태어나 성장한 시대의 카자흐 사회에서는 개인의 중대사를 결정함에 있어 부모, 특히 부친의 의견이 절대적인 가부장적 문화가 만연했다. 생활이 매우 궁핍했던 나지파의 부모는 이미 그녀가 어릴 때에 일찌감치 혼처를 정하고, 상대 집안으로부터 미리 신부대 를 받아 챙겼다. 그러나 처녀로 성장한 나지파는 ‘사랑 없는 결혼’을 할 수 없다며 정해진 상대와의 혼인을 거부했고, 자연히 그녀의 부모가 받았던 신부대는 물론, 위약금까지 물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나지파의 부모는 챙긴 돈을 모두 탕진해 버린지 오래였고 당연히 이를 변제해낼 능력도 없었다. 당찬 성격의 나지파는 여러 돌파구를 모색한 끝에 지역 군수사령부 총독에게 정식으로 청원을 올려 도움을 받음으로써 금전 문제를 해결하고 부모로부터 야기된 정혼의 족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처럼 신부대를 매개로 한 매매혼 풍습이 아직 금지되지 않고 있던 당시 카자흐인 사회에서는 엄격한 규율과도 같았던 부모에 의한 정혼을 용기 있게 거부할 정도로 스스로의 인생을 개척하는 것에 능동적이었던 나지파 쿨자노바는 결국 스물 다섯 살이 되던 해, 자신이 기다려온 운명의 짝을 만나게 된다. 상대는 당시 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던 누르갈리 쿨자노프(Нұрғали Құлжанов)라는 인물이었다. 둘은 교제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결혼하였고 세메이(당시 세미팔라틴스크)로 보금자리를 옮겼다.
세메이는 카자흐 민족의 대문호이자 계몽가 아바이 쿠난바이울리(Абай Құнанбайұлы, 1845~1904)의 고향으로, 나지파 쿨자노바는 평소 그의 열렬한 추종자이기도 했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1914년 아바이 타계 10주년을 맞아 그의 문학 세계를 조명하는 문화 행사를 여러 차례 주최하기도 했는데, ‘아바이의 밤(Абай кеші)’이라는 타이틀 아래 아바이의 작품 낭독, 음악 연주와 가창, 청중과의 소통을 결합한 당시의 카자흐 대중에게는 매우 신선한 형식의 무대를 선보임으로써 뜨거운 호응을 불러일으켰으며, 이는 근대 카자흐 사회에 새로운 공연 문화를 정착시킨 사례로 남게 되었다.
한편 나지파 쿨자노바는 이 무렵부터 정치에도 큰 관심을 갖고 본격적인 기자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나지파 쿨자노바가 저널리스트로서 써낸 초창기 글들은 당시 발행되던 ‘카자흐(Қазақ)’, ‘아이캅(Айқап)’, ‘사릐아르카(Сарыарқа)’, ‘크즐 카자흐스탄(Қызыл Қазақстан)’, ‘에이옐 첸듸기(Әйел тендігі)’ 등의 잡지에 기고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기사와 칼럼들을 통해 당시 카자흐 사회 전반적으로 만연해 있던 여성 차별 관련 문제들과 가정 및 사회 속 여성의 역할에 대한 자신의 통찰을 솔직하고 날카로운 필체로 풀어냈다. 나지파가 추구했던 능동적이고 진취적인 여성상은 특히 그녀가 어느 잡지에 기고한 글의 한 대목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여성은 곧 민족의 어머니이다. 오직 깊은 학식으로 연륜을 쌓은, 구속되지 않은 여성만이 자신의 민족을 선봉의 대열로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이다.”
나지파 쿨자노바는 1920년 카자흐 자치공화국 인민 교육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어 교과서 편찬 및 출판 관련 행정업무에 참여했으며 1922년부터는 당시 카자흐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인민위원회 위원장이자 신문 ‘옝벡쉬 카자흐(Еңбекші қазақ)’의 주필이 된 사켄 세이풀린(Сәкен Сейфуллин, 1894~1938) 의 제안으로 본 신문의 편집부 일원이 되어 정기적으로 글을 기고하게 된다.
한편 나지파는 카자흐 최초의 여성 기자였을 뿐만 아니라 직접 여러 저서를 집필해 낸 뛰어난 여류 작가이기도 했다. 특히 그녀의 대표작인 ‘전통적인 학교 교육(Традиционное воспитание в школе)’, ‘어머니와 자녀의 교육(Воспитание матери и ребенка)’ 등은 현대 사회에서도 통용될 정도로 시대를 초월한 교본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나지파는 번역가로서도 카자흐 사회와 대중문화에 큰 영향력을 미쳤는데, 일례로 아바이 쿠난바이울리와 의브라이 알튼사린 등 대표적인 카자흐 대문호들의 여러 작품을 처음 러시아어로 번역한 이는 다름 아닌 그녀였으며, 나아가 러시아어를 구사하지 못하던 카자흐인들 역시 그녀의 번역 작업을 통해 처음으로 레프 톨스토이, 막심 고리키, 알렉산드르 쿠프린 등 러시아 최고의 문학가들이 탄생시킨 작품들을 카자흐어로 접할 수 있었다.
1929년 무렵부터 나지파 쿨자노바는 그 전까지 활발히 펼쳐오던 모든 사회활동을 갑작스럽게 중단하고 자택에서 두문불출한 채 조용히 창작활동에만 전념하기 시작했다. 당시 기록되어 현재까지 남아 있는 여러 문헌들은 대부분 그녀의 건강 악화를 그 이유로 들고 있으나, 오늘날 다수의 역사학자들은 이 시기 그녀가 일찍이 소련에 의해 멸망했던 알라시 자치국의 정부인 ‘알라시 오르다(Алаш-Орда)’ 의 잔존 세력과 내통한다는 혐의로 소비에트 당국으로부터 박해를 받게 되면서 사회활동에도 큰 제약을 겪게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이미 오래 전 남편과 사별하고 일선에서 물러난 이후 사실상 외부 세계와의 소통이 단절된 가운데 그녀는 1934년 알마티에서 지병 끝에 조용히 생을 마감한다.
(다음 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