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의 족보에 대한 나의 관심은 약 2년전, 고려인의 중아시아 강제 이주에 관한 우연한 질문에서 비롯되었다. 그 질문을 통해 우리 가족사에는 공백이 많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나는 1937년 강제 이주에 대한 우리 가족의 기억이나 이야기를 전혀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인터넷으로 족보를 찾기 시작했다. 마치 재미있는 베스트셀러 소설을 읽듯이 피곤도 잠도 잊고 밤을 새우며 탐구했다. 탄압당한 가정에서 금기시되었던 이야기를 어린아이에게 들려주지 않았던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아버지가 무심코 흘린 말과 할머니의 우울한 회상이 어린 시절의 내 기억에 강렬한 흔적으로 남아 있었다.
내가 아버지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에 탐구를 시작하고, 러시아로의 한인 자발적 이주 160주년이 되는 해에 중간 연구 결과를 정리하게 된 것은 상징적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나의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선조들이 19세기 후반 러시아로 넘어 온 첫 한인 이주민들에 속하기 때문이다.
내가 아버지의 친척들에 대해 알고 있던 것은 어린 시절 할머니 리 ( 태어난 성은 한씨 ) 옐레나 옐리세예브나에게 들었던 이야기뿐이었다. 할머니는 자신이 원동에서 보낸 어린 시절과 김나지움 (16세기부터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교육기관 중의 하나로, 김나지움이 존재하는 국가별로 제도가 다르기는 하지만 평균적으로 대한민국의 초등학교 6학년~대학교 1년 과정의 교육기관이라고 볼 수 있음) 및 대학교 시절, 그리고 리 미하일 아파나시예비치 (나의 할아버지 )와의 결혼하여 하얼빈으로 이주한 일에 대해 이야기해 주셨다. 하얼빈에서 나의 아버지가 태어났다. 이렇게 내가 선조들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나는 우리 가족의 역사뿐만 아니라 고려사람들의 역사도 탐구하기 시작했다.
나는 소련에서 정치적 탄압 희생자들에 대한 정보가 가장 많이 보관된 자료들에서 할아버지에 대한 서류를 쉽게 찾았다. 할아버지는 1892년에 아무르 주 블라고슬로웬노예 촌에서 태어나셨으며, 1937년에 간첩 활동과 반소련 선전 혐의로 10년간의 징역형을 선고받아 스탈린의 강제 수용소에서 형기를 모두 마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후, 내가 들어본 적도 없는 할아버지에 대한 정보가 마치 꼬리를 물고 쏟아져 나왔다. 그 중 첫 번째는 항일운동 영웅이자 1920년 일본군에 의해 처형된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 (최재형)의 손자 최 발렌틴의 회고록에서 찾았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의 주도로 1918년에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조선어로 교육하는 한인 교사 양성학교가 열렸으며, 이 학교의 첫 학생 중 한 명이었던 리 미하일 아파나시에비치가 후에 그 학교의 교장이 되었다고 썼다.
역사학자 린샤 올가 (Lynsha O.B.)는 자신의 저서 <1882~1922년 니콜스크-우수리스크 한인 교사 양성학교의 역사>에서 이 학교와 학교 창설에 기여한 할아버지의 역할을 상세히 기술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1918년5월, 제2차 한인 혁명단체 연합 대회에서 최초의 한인 교사 양성학교 설립 결정을 채택했다. 고젠스키 (본명 박진순 (?) (1897년 ~ 1938년 3월 19일)은 조선 개성에서 태어나 극동에서 정치 활동가로, 조선공산당의 지도자 중 한 명이었으며, 한국학자, 철학사 연구자, 언론인이었음)는 다음과 같이 썼다. ‘콜차크 (알렉산드르 콜차크 (1874년~1920년)는 러시아 제국의 제독, 군사 지도자, 극 탐험가였으며 러시아 제국 해군에 복무하여 러일 전쟁과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음) 정권 시절, 젊고 재능 있는 교장 리 미하일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정부 지원을 받아 한인 교사 양성학교가 설립되었다.’ 이는 러시아에서 처음으로 조선인을 위한 직업 교육 기관이었으며, 그전까지는 모국어로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다.”
이와 같이 모스크바 상업대학 경제학부 학생이자 전직 교사였던 나의 할아버지가 이 한인 교사 양성학교를 이끌게 되었다. 모스크바 상업대학은 러시아 제국 최초의 경제 전문 교육기관으로, 오늘날의 플레하노프 경제대학교이다. 1912년 제정된 ‘모스크바 상업대학 규정’에 따르면, 경제학부를 졸업한 학생들은 경제학 학사 학위와 함께 개인 명예 시민권을 받을 정도로 높은 위상을 인정받았다. 안타깝게도 할아버지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하셨다. 원동에서 모스크바로 돌아오지 못해서 그랬던 것 같다.
새로운 교육기관 조직은 내전 시긴의 어려움 속에서 이루어졌다. 볼셰비키 정권 하에서 채택된 한인교사 양성학교 설립 결정은 정권이 콜차크 정부로 바뀐 이후에야 실현 가능해졌다. 그러나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1918년 가을,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 한인교사 양성학교가 설립되었다. 이 학교는 조선학교에서 가르칠 교사를 양성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하지만 초기부터 재정 문제가 발생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교장 리 미하일은 1919년1월, 학교를 시베리아 정부 내각의 교육부로 편입시키기 위한 요청을 하러 톰스크로 갔다. 교육부 결정 초안에는 다음과 같이 명시되어 있었다. “… 한인 교사 양성학교 설립은 고려인을 보호하고자 하는 러시아 정부의 관심을 보여주는 중요한 조치로, 이는 변방에서 퍼지기 시작한 일본의 영향으로부터 고려인을 지키는 데 있어서도 큰 의의가 있다.” 학교 재정 지원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은 몇 개월 동안 계속되었다. 그 과정에서 리 미하일은 톰스크와 옴스크를 오가며 학교 조직 문제를 해결했다. 결국 1919년 10월, 콜차크 정부는 한인 교사 양성학교를 국가 지원 대상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시점에서 할아버지의 학교 운영 참여는 끝났다. 일본군이 니콜스크-우수리스크로 접근했기 때문이다. 나의 짐작에 의하면 이 원인으로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하얼빈으로 망명한 것 같다. 할머니의 부모님은 이미 1917년 여름 하얼빈으로 떠나 계셨다. 소련 정권이 들어선 이후, 한인 교사 양성학교는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그리하여 1923년부터 몇 차례 개편을 거쳐 1926년에 니콜스크-우수리스크 조선 사범 전문학교가 설립되었다.
아버지의 가족은 1935년에 하얼빈에서 소련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1936년, 강제 이주가 있기 전 이미 리 미하일은 알마티에서 체포되었다. 나는 내무인민위원부 (통칭 NKVD는 공식적으로 국가 내 일반적인 행정사무와 치안경찰 및 방첩 등 치안과 관련된 모든 업무를 맡은 기관이었음) <하얼빈 사건> 자료를 읽으며, 1935년 중동철도가 매각된 이후 하얼빈에서 돌아온 사람들의 비극적인 운명과 비참한 현실에 충격을 받았다.하얼빈에서 몇 명이 돌아왔으며 그 중 얼마나 많은 사람이 탄압을 당했는지에 대한 통계는 없지만, 대략 수만 명이 탄압을 받았고, 이 중 3분의 2는 사형되었으며 나머지는 장기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리 미하일은 영구 동토 지대인 보르쿠타 수용소에서 10년간의 형기를 마치고 1958년에 명예 회복되었다.
최근 몇 년 동안 나는 겸손하게 꾸려진 할아버지의 집을 자주 떠올렸다. 거실 한가운데에는 큰 가족 소파가 있었다. 늘 엄격하고 말수가 적었던 할아버지였지만, 조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면 그 엄격한 표정이 사라지곤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 기억에 강렬히 남아 있는 것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늘 자랑스럽게 말씀하시던 한 마디였다.
“나는 조선 인민의 아들이다!”
어린 시절 나 또한 그 말을 들으며 자부심을 느꼈다. 하지만 두 분이 세상을 떠나신 뒤, 그리고 국제주의 정신 속에서 소련식 교육을 받으며 자라면서, 그런 애국심 넘치는 자부심이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다소 별난 성격의 일면처럼 느껴지곤 했다.
그러나 지금, 나는 고려사람들에 대한 방대한 자료와 학문, 그리고 회고록들을 연구하고 분석하면서, 아버지와 특히 할아버지 앞에서 더 큰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 그리고 이제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왜 할아버지는 편지에서 내 이름만 쓰지 않고 ‘리 마리나’라고 성까지 붙여 부르셨는지, 그리고 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늘 자랑스럽게 “나는 조선 인민의 아들이다!”라고 말씀하셨는지 ∙∙∙
마리나 볼롯베코바,
비슈케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