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철의 한국에서 부치는 편지
같은 하늘 아래 - 사주명리 인문학
| 가을 절기 1부
입추(立秋)·처서(處暑)·백로(白露)
한없이 무덥고 더없이 밝았던, 그래서 모든 것이 자라나며 사방으로 번져가던 여름이 지나갑니다. 이제 그 모든 퍼짐이 안으로 집중되는 계절이 옵니다. 가을입니다. 봄이 음(陰)에서 양(陽)으로 단번에 넘어가는 극적 전환이었다면, 여름은 그 양기가 멈추지 않고 사방으로 번지는 확산이었습니다. 이제 가을은 다시 양에서 음으로 돌아오는 자리입니다. 봄의 전환이 새로 시작하는 일이었다면, 가을의 전환은 펼쳐 놓은 것을 거두어들이는 일입니다.
북송의 문인 구양수(歐陽脩)가 지은 「추성부(秋聲賦)」 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천지어물 춘생추실(天之於物 春生秋實)" — 하늘은 만물에 대하여, 봄에는 낳고 가을에는 열매 맺게 한다. 봄과 가을은 따로 있는 두 계절이 아니라, 하나의 일이 시작되고 끝나는 두 끝이라는 뜻입니다. 봄에 뿌리지 않은 것은 가을에 거둘 수 없고, 가을에 거두지 못하면 봄의 씨앗은 헛것이 됩니다.
옛사람들은 이 금의 기운을 숙살지기(肅殺之氣)라 불렀습니다. 무시무시한 말처럼 느껴지지만 풀어진 것을 거두고, 흩어진 것을 모으고, 설익은 것을 단단히 영글게 하는 갈무리의 기운입니다. 가을 1부 입추·처서·백로는 이 갈무리가 시작되는 길목입니다. 무성함이 어떻게 결실로 돌아오는가. 사방으로 번져가던 것이 어떻게 한 점으로 모이는가. 가을의 첫 세 절기가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결입니다.
입추 — 더위의 절정에서 시작되는 가을의 첫 기척
양력 8월 7일경 / 황경 135° / 신월(申月)의 시작
절기는 늘 우리 몸의 감각보다 보름쯤 앞서 옵니다. 입추는 양력 8월 초, 한국에서는 입추 바로 뒤에 말복이 이어질만큼 더위가 사납고, 카자흐스탄의 스텝도 한낮이면 땅이 뜨겁게 달아오릅니다. 가을의 기운이 세워졌다는 말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 때에 입추(立秋)가 찾아옵니다.
가을은 눈 이외의 감각으로 먼저 감지됩니다. 한낮의 볕은 여름인데, 동트기 전 마당으로 나서면 문득 새벽 공기에 서늘함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옛 농부들은 이 새벽 공기로 가을을 읽었습니다. 한낮의 더위 너머, 보름 앞서 온 가을의 기척을 먼저 알아챈 것입니다.
이 무렵 여름내 농부의 등이 휘게했단 논의 김매기가 입추 어름이면 마무리됩니다. 그래서 음력 칠월 보름 백중(百中)에는 호미를 씻어 걸어 두고 한 해 농사가 가장 잘된 집의 머슴을 소에 태워 마을을 돌며 잔치를 벌였습니다. 가장 고된 노동을 끝낸 사람들이 잠시 허리를 펴고 서로의 노고를 치하하던 날입니다. 흙에 깊이 매여 있던 손이 비로소 흙에서 놓여나는 때가 입추 어름의 백중이었습니다.
사주명리에서 신(申)은 가을의 시작이면서 동시에 흥미로운 자리입니다. 신월(申月)의 지장간은 무토(戊土)·임수(壬水)·경금(庚金)으로 읽습니다. 여름의 마지막 흙(戊土)이 남아 있고, 곧 다가올 겨울의 첫 물(壬水)이 담겨 있으며, 그 자리에 가을의 본기인 금(庚金)이 들어섭니다. 한 글자 안에 세 계절이 함께 있는 자리 — 그것이 가을의 입구입니다. 미월(未月)의 흙이 신월(申月)의 금으로 옮겨 가는 흐름이란, 여름 내내 길러진 기운이 이제 단단한 형체를 얻기 시작함을 말합니다.
카자흐스탄의 8월도 겉으로는 한여름입니다. 하지만 카자흐스탄의 사람들도 스텝의 풀이 끝에서부터 마르기 시작하는 이때, 여름내 머물던 목초지를 떠나 가을과 겨울을 날 곳을 향해 다시 움직여야함을 알았습니다. 한국의 농부가 들판을 바라보며 추수를 가늠하듯, 스텝의 유목민은 하늘을 바라보며 다음 길을 가늠했습니다. 멈춤과 떠남, 모습은 달라도 둘 다 여름을 매듭짓는 같은 손짓입니다. 훗날 이 스텝에 내려진 고려인의 선조들도, 머무는 농경의 리듬과 떠나는 유목의 리듬이 함께 흐르는 이 땅에서 새 절기를 익혀야 했습니다.
절정의 한복판에서 다음을 먼저 읽는 눈, 그것이 입추의 지혜입니다. 아직 한낮이 뜨겁지만, 새벽 공기 안에 이미 다른 결이 들어와 있음을 알아챕니다. 그 결의 포착이 한 해의 마무리의 시작입니다.
처서 — 더위가 물러나는 자리
양력 8월 23일경 / 황경 150° / 신월의 후반
처서(處暑)의 처(處)에는 '머물러 그친다'는 뜻이 있습니다. 더위가 마침내 걸음을 멈추는 때입니다. "처서가 지나면 모기 입이 비뚤어진다"는 익살스러운 속담이 그 끝을 말해 줍니다. 그토록 기승이던 모기조차 서늘한 기운에 풀이 죽는다는 것입니다.
처서가 단지 더위의 끝인 것만은 아닙니다. 한 해 농사의 성패가 갈리는 고비이기도 합니다. 벼가 이삭을 패는 때여서, 이 무렵 며칠의 볕이 가을 곳간을 채울 낟알의 무게를 정합니다. 그런데 벼가 여물려면, 잎은 시들기 시작해야 합니다. 푸름을 거두어들여야 결실이 영급니다. 구양수가 「추성부」에서 가을의 본질을 '상(商)'의 소리로 풀이하며 "상자 상야(商者 傷也)" — 상이란 상함이니, 만물이 무르익어 노쇠하므로 슬퍼지는 것이라 한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잎이 시드는 일과 알이 여무는 일은 둘이 아닙니다. 시드는 바로 그곳에서 열매가 맺힙니다. 이처럼 가을은 허무과 결실이 함께하는 시간입니다. 가을이 가르치는 자연의 이치란, 잎이 시들기 시작해야 열매가 영근다는 것입니다.
처서 무렵 한국의 농가는 분주합니다. 한여름 무성하게 자란 논두렁의 풀을 깎고, 산소를 찾아 벌초를 합니다. 여름 동안 눅눅해진 옷과 책을 햇볕에 말리는 음건(陰乾)과 포쇄(曝曬)도 이때의 일입니다. 모든 것을 햇살 아래 펼쳐 놓고 흩어졌던 것을 거두고, 젖었던 것을 말리는 자리에 처서가 있습니다.
거두는 절기인 까닭에, 처서 어름은 조상을 모시는 시간과 맞닿습니다. 한 해 농사의 결실을 햇곡식으로 차례 지내는 한가위가 오기전, 처음 익은 벼 이삭을 베어 사당에 올리는 일을 천신(薦新), 곧 올벼심리라 했습니다. 한 해 첫 곡식을 사람이 먼저 입에 대지 않고 조상에게 올렸습니다.
강제이주 뒤 중앙아시아의 고려인에게도 조상 앞에 음식을 올리는 절기의 마음은 여전히 함께 남아 한식·단오·추석 세 명절을 끝내 지켰습니다. 봄에는 산소를 찾아 한 해의 안녕을 빌고, 여름에는 액을 물리치며, 가을에는 거둔 한 해의 결실을 조상 앞에 바쳤습니다.
한 해 내내 펼쳐 놓은 것을 햇볕 아래 말리고, 무엇이 결실로 남았는지 가만히 살피는 것, 그것이 처서의 지혜입니다. 다 거둘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거두지 못한 것 또한 한 해의 일부였음을 인정하는 데에 처서의 깊이가 있습니다.
백로 — 풀잎 끝에 맺힌 첫 결정(結晶)
양력 9월 8일경 / 황경 165° / 유월(酉月)의 시작
백로(白露)는 '흰 이슬'이라는 뜻입니다. 이 무렵 새벽에 풀잎을 만지면 이슬이 맺혀 있는데, 그 이슬이 햇살을 받아 하얗게 빛난다 하여 백로라 했습니다. 이슬은 한낮의 공기 속에 보이지 않게 흩어져 있던 물기가, 밤사이 식은 풀잎 위에 모여 비로소 한 방울로 맺힌 것입니다. 사방에 퍼져 있던 것이 한 점으로 응결되는 일은 가을이 하는 갈무리를 풀잎 끝에서 가장 작고 또렷하게 보여 줍니다. 봄에 흩뿌린 씨앗이 가을에 한 알의 곡식으로 맺히는 그 큰 이치가, 새벽 풀잎의 이슬 한 방울에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사주명리에서 백로는 유월(酉月)의 시작입니다. 유(酉)의 지장간은 경금(庚金)·신금(辛金)으로, 다른 글자들과 달리 오직 금의 기운만으로 이루어진 자리입니다. 봄의 묘(卯)가 순수한 목(木)이었듯, 가을의 유(酉)는 순수한 금(金)입니다. 온전한 금의 기운으로 가을 결실이 완성되는 본격적인 자리입니다. 경금이 단단해지면서 그 안에 신금(辛金), 곧 잘 벼린 칼날이자 정교한 보석 같은 기운이 자라납니다.
옛 농부들은 백로 무렵 벼 이삭을 보며 한 해를 점쳤습니다. 백로 전에 이삭이 패야 알이 여물 시간이 넉넉하다 하여, "백로 전에 패는 벼"를 길하게 여겼습니다. 남쪽에서는 일찍 여문 벼를 베어 그해 첫 햅쌀을 맛보기도 했습니다. 들에는 포도가 검게 익어, 처음 딴 포도를 사당에 올리고 나서야 사람이 입에 대는 집도 있었습니다. 가장 처음의 것을 가장 먼저 조상께 올리는 그 마음에는 어김이 있을 수 없습니다.
카자흐스탄 스텝의 9월 새벽에도 풀잎은 차게 식고, 이슬은 맺힙니다. 강제이주 첫 세대가 시르다리야 강가 모래땅을 일구어 처음 벼를 심었을 때, 그들이 가장 마음 졸이며 기다린 것이 바로 이 무렵의 들판이었을 것입니다. 황무지에 뿌린 한 줌 씨앗이 한 해를 견디고 이삭을 맺었는지, 그 답을 새벽 이슬과 고개 숙인 벼가 함께 일러 주었을 것입니다. 흩어진 것을 한 방울로 모으는 백로의 이치는, 흩어진 한 민족이 낯선 땅에서 다시 한 톨의 곡식을 거두어 낸 그 손길과 다르지 않습니다.
백로의 기운을 품은 사람은 풀잎 끝에 맺힌 이슬 한 방울이 사실은 한여름 내내 흩어져 있던 모든 기운의 결정임을, 한 사람의 결실이 사실은 한 해 내내 들인 모든 시간의 응결임을 압니다. 가장 작은 것이 품은 가장 큰 것을 봅니다.
가을 1부를 마치며 — 거둔다는 것은 인정한다는 것
입추·처서·백로, 가을의 첫 세 절기는 한 가지를 함께 가르칩니다. 사방으로 펼쳐졌던 것을 다시 안으로 모으는 일, 그것이 거둠입니다.
「추성부」의 가을은 쓸쓸합니다. 무성하던 풀은 빛을 잃고, 우거지던 잎은 떨어집니다. 구양수는 그 소리에서 만물이 노쇠하는 슬픔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슬픔은 결실의 다른 이름입니다. 봄에 낳은 것을 가을에 거두어들이는 일, 잎을 떨구는 그 자리에서 곡식이 영급니다.
입추는 한낮의 더위 속에서 새벽의 가을을 먼저 읽는 눈을, 처서는 무성했던 것을 볕에 말려 간직할 것과 떨굴 것을 가리는 손을, 백로는 흩어진 기운이 풀잎 끝 한 방울로 맺히는 응결을 보여 주었습니다. 셋은 저마다 다른 길목에서 같은 일을 합니다. 펼친 것을 거두고, 키운 것을 영글리고, 흩어진 것을 한 점으로 모으는 일.
거둠은 풍요롭기만 한 일이 아닙니다. 무엇이 여물었고 무엇이 끝내 여물지 못했는지를 마주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한 해 동안 뿌린 모든 씨앗이 다 열매가 되지는 않습니다. 거두지 못한 것 앞에서 고개를 떨구되, 그 또한 한 해의 일부였음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가을이 가르치는 성숙의 의미입니다.
독자 여러분, 당신의 한 해는 지금 어느 길목에 와 있습니까. 봄에 뿌린 것 가운데 무엇이 여물었고, 무엇이 끝내 여물지 못했습니까. 잠시 걸음을 멈추고 당신의 들판을 가만히 둘러보아 주십시오. 거둔다는 것은, 여문 것과 미처 여물지 못한 것까지 모두 끌어안는 일입니다. 새벽 풀잎 끝에 맺힌 이슬 한 방울처럼, 당신이 보낸 한 해도 어딘가에서 조용히 빛나고 있을 것입니다.
정태철
교육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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