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해주에서 양잠업 육성 정책이 본격화되면서 1926년 봄까지 약 200가구가 새로운 농업 분야인 양잠업에 참여하게 됐다. 개인 양잠 농가뿐 아니라 총 8개의 양잠 협동조합(아르텔, артель: '전문업자들이 함께 운영하는 연합'의 뜻 )이 설립됐으며, 이 가운데 니콜스크-우수리스크(Никольск-Уссурийск) 인근의 ‘한발라이 아르텔’(Ханбалайская)과 ‘붉은 동방’(Красный Восток) 아르텔이 가장 규모가 컸다. 이들 아르텔에서는 양잠업에 관심 있는 주민들을 대상으로 실습 중심의 교육과정도 운영했다.
1925년에 설립된 양잠 아르텔 ‘붉은 동방’은 구성원 전원이 고려인이었으며, 공동 노동과 현물 분배 방식으로 운영됐다. 아르텔은 활동 기간(1925~1928년) 동안 연해주 전역에 26만 그루 이상의 뽕나무 묘목을 보급했으며, 이 가운데 1만5천 그루는 블라고베셴스크(Благовещенск) 시의 원예 협동조합 ‘오프트’(Опыт)로 보내졌다. 1928년에는 생고치 1.6톤을 생산하는 성과를 거뒀다.
‘붉은 동방’ 아르텔의 지원으로 니콜스크-우수리스크 지역의 공산당 지구위원회는 한 달 반 동안 양잠 강습회를 개최했으며, 고려인 주민을 대상으로 한 양잠 교본도 발간했다. 지역 농민들의 수요에 따라 아르텔은 20명을 정원으로 하는 상설 양잠 교육 과정을 추가로 개설했고, 이를 최대 80명까지 확대할 계획도 세웠다. 그러나 전문 강사의 부족으로 교육 확대에는 한계가 있었다.
당시 경제∙정책적 과제에 따라 ‘붉은 동방’ 아르텔은 연해주 양잠업 육성이라는 보다 큰 국가적 사업의 일부로 편입됐다. 다만 확장은 가로막는 가장 큰 문제는 농지 부족이었으며, 지방 토지 관리 당국으로부터 필요한 농업용지를 배정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아르텔은 양잠업이 지역 경제에서 충분한 수익성을 지닌 사업이 될 수 있음을 입증했다. 1928년 기준, 식재 4년 차 뽕나무 농장 1헥타르당 수익은 1,000~1,500 루블에 달했다.
1925~1926년 동안 블라디보스토크 토지관리국은 양잠 조합들과 협력해 조선에서 뽕나무 묘목 100만 그루 이상을 들여와 지역 내 양잠 농가에 분배했다. 500~1000 그루의 소규모 뽕나무 재배지는 학교, 농민위원회, 여성부, 기타 사회단체 등을 중심으로 조성되었다.
S.아노소프(С. Аносов)의 저서 <연해주의 고려인들>에 따르면, 1925년 연해주 지역 15개 한인 마을에 총 3,000 그루의 뽕나무 묘목이 식재되었으며, 니콜스크-우수리스크 지역에는 7만5천 그루 규모의 양잠 조합 2곳이, 블라디보스토크 지역에는 1,000 그루 규모의 조합이 조직되었다고 기록돼 있다. 또한, 1926년 설립된 양잠 조합 ‘붉은 동방’은 10만 그루가 넘는 뽕나무 묘목을 보유한 양묘장을 운영했다.
1926년7월, 블라디보스토크 신문 ‘붉은 기’(Красное знамя)는 양잠 지도원 A.렐랴코프(А. Леляков)와의 인터뷰를 통해 연해주 양잠업은 고려인 마을 시넬니코보에서 시작돼 이미 2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전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1926년 현재 양잠업에는 10년 이상 경력을 가진 12개 조합과 더불어 비교적 경험이 적은 약 85개 농가가 참여하고 있었으며, 양잠업은 지역 농업 가운데 가장 수익성이 높은 분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렐랴코프는 잡지 ‘소비에트 연해주’ 기고문에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계산 근거를 제시했다. “1 헥타르 면적에는 뽕나무를 약 900~1,200 그루가지 식재할 수 있다. 이에 따라 1헥타르당 뽕나무 농장에서 기대할 수 있는 수익은 1년차 50~70 루블, 2년차 200~250 루블, 3년차 400~500 루블, 4년차 700~800 루블, 그리고 5년차에는 약 1,000 루블 수준에 이른다. 뽕나무가 사육용 잎을 가장 많이 생산할 수 있는 수령은 대략 12~15년으로 추산되며, 이 기간 동안 1헥타르당 총수익은 평균 1만2천~1만5천 루블로 계산된다. 지금까지는 줄기를 세워 키우는 ‘수간(樹幹) 재배 방식’이 주로 활용되어 왔으나, 현재는 관목형 재배 방식이 도입되고 있다. 이 방식은 노동력이 덜 들면서도 수익성이 약 20% 증가하는 장점이 있다. 또한 뽕나무 열식 사이 공간을 다른 작물 재배에 활용할 수도 있다. 실제로 수이푼강 지역 한발랄라이 고려인 양잠 생산협동조합은 뽕나무 사이 경작지에 콩이나 대두를 함께 재배하는 혼작 방식을 도입해 좋은 결과를 거두었다.”
신문 「선봉」(고려일보의 전신)은 포시에트(Посьет), 포크로프카(Покровка), 수이풍(Суйфун), 수찬(Сучан), 슈코토프(Шкотов) 등 주요 양잠 지역의 소식을 꾸준히 전했다. 보도에 따르면 이들 지역의 고려인 집단농장 농민들은 적극적으로 누에 사육에 참여했다. 각 지역에는 2~5개의 협동 양잠 아르텔이 운영되고 있었으며, 그 구성원은 모두 고려인이었다.
당시 연해주 전역에는 약 20개의 고려인 양잠 협동조합이 있었고, 이들이 보유한 뽕나무 묘목은 약 200만 그루에 달했다. 이 곳에서 생산된 고치는 비단의 인장 강도, 탄력성, 실 두께의 균일성, 광택 등 여러 품질 지표에서 표준을 크게 웃돌며 높은 평가를 받았다.
‘붉은 동방’(Красный Восток) 양잠 오르텔의 경험을 바탕으로 블라디보스토크 구역 토지관리국은 집단농장을 중심으로 한 고려인 농가에 양잠을 보급하기 위한 실질적인 정책을 실시했다. 토지관리국은 ‘붉은 동방’의 사례를 활용해 양잠업의 경제적 이점을 적극 홍보하기로 결정했으며, 동시에 생산 농가의 누에고치 판매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현지에 계절별 수매소를 설치하고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상설 수매소를 운영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이러한 조치는 고려인 사회 전반에서 양잠업에 대한 관심을 크게 높이는 계기가 되었고 지역 양잠업 발전을 촉진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통계 자료에 따르면 1929년 극동 지역에서 누에 사육을 진행한 농가는 100 가구에 불과했으며, 이들이 생산한 뽕잎은 3.9톤 수준이었다. 그러나 1933년에는 참여 농가 수가 1만200가구로 급증했고, 뽕잎 생산량 역시 1305.5 톤에 달했다. 그 결과 블라디보스토크 구역에서만 1930년 한 해 동안 약 82만 kg (820톤)의 생고치가 생산됐으며, 이는 건고치로 환산할 경우 280톤, 금액으로는 1백만 루블을 넘는 규모였다.
(다음 호에 계속)
김게르만 | 역사학 박사∙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