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해주의 고려인 농민들은 이 지역 농업 집단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토지가 없는 고려인 농민들이 대거 아르텔(артель; 협동조합)에 참여하면서 극동 지역의 집단화 비율은 눈에 띄게 상승했다. 아르텔과 콜호스의 설립과 확대는 고려인들이 사회주의 경제 체제에 편입되는 계기가 되었고, 동시에 소련화 과정, 러시아어 습득과 러시아 문화 수용을 가속화했다.
막대한 노력으로 조직되고 경제성까지 갖추었던 양잠업은 결국 연해주 농업의 핵심 산업으로 자리 잡지 못했다. 부가가치가 높은 비단 직물을 생산하려면 뽕나무 재배지 조성에서부터 누에알 생산, 고치 수확, 실 뽑기, 비단 직조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계획하고 자금을 투입해 체계적으로 운영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27년 극동구 계획국은 연해주에서 완제품 비단을 생산하는 것이 비효율적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양잠업을 고치 생산에만 한정했다. 이에 따라 연해주에서 생산된 고치는 러시아 내 비단 직물 공장이나 수출용 원료로만 공급되었고 지역 내에서 부가가치 산업으로 발전할 기회는 차단됐다.
1928년부터 연해주에서 생산된 모든 건((乾) 고치(말린 누에고치)는 소련의 국영기관인 ‘실크트러스트(Шелкотрест)’에 일괄 납품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에는 집하소가 설치돼, 이곳에서 고치를 철도로 모스크바의 제사(製絲)∙직물 공장으로 운송했다. 그러나 가볍고 부피가 큰 고치를 생산자가 직접 부담해 전국을 가로질러 운송하는 구조는 연해주 양잠업을 구조적으로 수익성이 낮은 산업으로 만들었다.
연해주산 양잠 제품의 판로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고치를 그대로 판매하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비단 원단이나 실크 제품으로 가공해 판매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첫 번째 방식에서는 양잠업이 ‘실크트러스트’에 종속될 수밖에 없었으며, 이 기관은 일본 업체들이 제시한 가격보다 50~80%나 낮은 가격으로 고치 가격을 책정했다.
한편 두 번째 방식, 즉 현지에서 제사∙직조 공장을 건설해 완제품을 생산하는 방안도 1920년대 후반 연해주에서 논의되었으나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연해주에서 양잠업이 억제되고 결국 중단된 데에는 민족적 요인도 크게 작용했다. 이 산업은 주로 고려인들이 담당하고 있었으며, 러시아인 농민들은 이 분야에 막 참여하기 시작한 시점에 이미 모스크바에서는 극동 지역에서의 양잠업 발전이 비전망적이라는 결정이 내려진 상태였다.
잘 알려져 있듯이, 고려인 양잠 아르텔, 협동조합 그리고 콜호즈는 ‘민족 단위 집단농장’이라는 이유로 구조적 차별을 받아왔다. 이들은 필요한 기계와 설비를 항상 가장 나중에 공급받았고 농업 대출이나 생산 확대를 위한 추가 토지 배정에서도 불리한 처우를 받았다. 그 결과 고려인 아르텔과 콜호즈는 규모와 생산 능력 면에서 영세한 상태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쇼비니즘과 차별이 고려인 집단농장의 발전을 가로막는 주요 원인이라는 지적은 당시 지방 신문들에서도 반복적으로 제기됐다. 이 문제는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열린 지방 회의에서도 공식적으로 논의되었으며, 당시 회의에는 56개 고려인 콜호즈에서 파견된 67명의 대표가 참석했다.
회의를 앞두고 포시에트(Посьет) 촌의회(сельсовет) 의장이자 당세포 서기였던 최 엘레나는 고려인 마을이 직면한 현실적인 문제들을 밝혔다. 그는 결론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작년(1929년) 대표자 회의에서 뽕나무 묘목 약 300 그루를 구입했다. 이 사업은 확대할 필요가 있다. 콜호즈에도 매우 유익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를 도와주는 곳이 없고, 우리 여성들은 큰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충분히 추진할 수 있다. 다만 누군가를 양잠 교육 과정에 보내기만 하면 된다.”
양잠업 발전을 가로막은 또 하나의 문제는 수공업적 방식의 비단 생산이었다. 이 방식으로 생산된 직물은 밀수로 유입되던 비단에 비해 품질이 크게 뒤떨어졌다. 연해주에서 생산된 고치를 일본 공장으로 보내면 최고급 비단 실과 직물이 만들어졌지만 현지의 수공업 생산은 거칠고 품질이 낮은 직물만을 만들어냈다.
수공업 방식으로 고치를 풀어 실을 뽑을 경우 직물 제작에 사용할 수 있는 비단 실은 전체의 30~40%에 불과했고, 나머지 대부분은 솜으로 처리되었다. 또한 고치 껍질을 풀어내는 특수기계가 없어 이를 태우거나 폐기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 결과 전체 고치 생산량의 약 60%가 헐값에 처분되거나 아예 손실 처리되었다. 이러한 비효율성은 양잠업 전체의 수익성을 크게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1920~1930년대 연해주에서 생산된 누에 고치를 반출하는 것은 방직공업 발전 전국 프로그램의 일부로 되었다. 연해주는 뽕나무 재배와 누에 사육에 적합한 기후 조건을 갖추고 있어 고치를 생산했고, 이 고치는 모스크바의 ‘트료흐고르나야(Трёхгорная)’ 직물공장이나 이바노보의 대형 비단 공장 등으로 보내져 가공되었다.
고치 반출은 산업화 전략의 일환이었으며, 비단은 의류와 직물은 물론 군사용 낙하산 제작에도 필요한 중요한 자원으로 간주되었다. 연해주는 생산 규모가 크지는 않았지만 이 산업에 필요한 원료를 공급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한편 극동 당국은 블라디보스토크의 옛 병영과 각종 건물을 활용해 비단 실을 뽑는 공장을 설립함으로써, 지방 재정 수입을 늘리고 지역 내 산업 발전과 일자리 창출, 고부가가치 제품의 현지 생산을 도모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러한 구상은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
이와 관련해 또 다른 실패 사례도 지방 신문에 보도됐다. 체르니고프스키 지역의 고려인 콜호즈 ‘인터나치오날’(Интернационал)이 위치한 곳에는 계획된 양잠 공장을 위해 600 헥타르의 토지와 상당한 자금이 배정되었으나, 행정 당국이 이를 건설에 사용하지 않았고 고용된 노동자들마저 흩어져 버린 것으로 전해졌다.
연해주에서 양잠업을 본격적으로 확대하려는 모든 계획은, 해당 산업을 보다 유리한 다른 지역에서 육성한다는 방침에 따라 모스크바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이로 인해 누적된 여러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았고, 193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높은 생산 원가와 북캅카스∙중앙아시아 등 소련 내 다른 지역과의 경쟁 심화로 연해주산 누에 고치의 반출 규모가 점차 감소하게 됐다. 이들 지역은 연해주보다 양잠업의 수익성이 훨씬 높았다.
1920~1930년대 소련 극동 지역에서 고려인들이 주도한 비단 생산의 흥망은, 소련 농업사와 민족 정책사에서 매우 주목할 만한 한 장면을 이룬다. 이는 고려인 디아스포라의 노력과 소련의 경제 정책, 그리고 당시의 지정학적 환경과 사회적 조건이 복합적으로 맞물린 결과를 보여준다.
고려인들은 누에 사육에 필수적인 뽕나무 재배에 비교적 유리한 기후 조건을 활용해 연해주 지역에 양잠업을 도입하고 이를 확대해 나갔다. 1920년대 소련 정부 역시 토지 배정과 자원 지원, 제한적이지만 기술적 도움을 제공하며 비단 생산을 장려했다. 양잠업은 소련의 경제적 자립을 도울 수 있는 잠재적 수출 산업으로 인식됐다.
1920년대 말에 이르러 양잠업은 일정한 성장 국면에 접어들었고 고려인 농민들은 이 분야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집단으로 자리 잡았다. 이 산업은 많은 고려인 가정의 생계 기반이 되었으며, 지역 경제에도 일정한 기여를 했다.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스탈린 체제의 중앙집권 정책과 농업 집단화는 그 동안 양잠업의 성공을 뒷받침해 온 전통적인 생산 방식을 크게 훼손했다. 동시에 스탈린 정권은 소수 민족에 대한 경계심을 점차 강화했으며, 특히 일본과의 관계를 둘러싼 정치적 우려 속에서 고려인에 대한 의심은 더욱 커졌다. 결국 1937년, 극동 지역에 거주하던 모든 고려인들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했다. 민족적 기준에 따른 이 강제 이주는 연해주 지역에서 고려인들이 주도하던 양잠업을 사실상 단숨에 종식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정리하자면 양잠업은 연해주에서 하나의 안정적인 산업으로 자리 잡지 못했다. 이 실패의 원인은 단선적이지 않으며, 모스크바에서 수립된 계획과 그 실행 과정, 고려인 양잠업 종사자들과 관련 행정 기관 간의 상호작용 등 복합적인 요인이 얽혀 있다. 여기에 자연∙기후 조건의 한계, 뽕나무 농원에 적합한 토지 부족, 고치 풀기와 비단 실∙직물 생산을 위한 기반 시설의 부재도 영향을 미쳤다. 또한 군국주의 일본과의 관계 악화로 연해주산 고치의 수출이 중단된 점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무엇보다도 지역 양잠업의 핵심 주체였던 고려인들이 카자흐스탄과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사실은 결정적인 타격이 됐다. 더불어 소련 당국이 양잠업의 유망 지역을 러시아 남부와 캅카스,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 등으로 재설정하고, 연해주와 멀리 떨어진 지역에 대규모 비단 생산 시설을 구축한 점 역시 연해주 양잠업 쇠퇴를 가속화했다
(끝. 앞부분은 이전 호에 게재)
김게르만 | 역사학 박사∙교수

